생활하는 복음 – 길 위에 있는 사람들

윤성희

길 위에 있는 사람들

10월 26일, 연중 제 30주일, 마태 22,34-40.

어릴 때 나는 비 내리는 걸 무척 좋아했다. 분위기에 사로잡힐 수 있고, 왠지 낭만적인 느낌에 비 내리는 게 좋았다. 그러나 회사를 다닐 때는 비 내리는 게 싫었다. 비는 더 이상 ‘낭만’이 아니라 ‘짐’일 뿐이었다. 우산은 너무 무거웠고, 고인 물에 신발이 젖는 건 정말 싫었다. 그 중에 최악은 바람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는 빗물에 온 몸이 젖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습한 날씨에 축축한 옷을 입고 근무하는 것은 차라리 형벌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랬던 비가 다시 ‘낭만’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건 프리랜서가 된 이후부터였다. 비가 오거나 말거나, 집에서 책 읽으며 작업하는 내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창을 활짝 열고 비 내리는 모습을 보거나 빗소리를 들으며 작업하는 것은 꽤 운치 있는 일이었다. 잃어버린 낭만을 찾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 낭만도 얼마가지 못했다. 길 위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내게 길 위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준 분들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었다. 사실 나는 그 분들에 대해서 잘 몰랐다. 함께 차를 타고 대한문 앞을 지나던 남편이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라치면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내가 그분들의 사연을 알게 된다고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는 것으로 그들을 외면했다. 그러다 공지영 작가가 쓴 『의자놀이』의를 구입하면 수익금이 기부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싶어서 책을 구입했다. 구입했으니 읽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 충격에 빠졌다. 지금 거기, 길 위에 있는 분들이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강정과 밀양에 계신 분들, 콜트콜택에서 기타를 만드시던 분들 그리고 자식을 잃고 길 위에서 생활하시는 세월호 유가족들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파하는 분들이 길 위에 있었다.

그 분들께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있는 길 위로 달려 나갈 처지도 못되었고, 그들을 위해 큰돈을 기부할 형편도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분들께 관심을 갖다 보니 그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분들이 서로 아는 사이인줄 알았다. 아니면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거나. 그러나 그들은 길 위에서 처음 만난 사이었고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분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연대하며 기도하는 신부님과 수녀님들도 그들의 ‘이웃’이었고, 길 위에 있는 분들께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하는 분들도 그들의 ‘이웃’이었으며, 경찰들에게 짐짝 취급을 받으면서도 함께 있는 분들도 그들의 ‘이웃’이었다. 옆집에 살지 않아도, 한 동네에 살지 않아도 이 나라 이 땅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

함께 모여 앉은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그들과 이웃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거리로 뛰쳐나가 그들과 함께 할 수도 없고, 기부를 할 형편도 아닌 내가 그들과 이웃이 되는 방법은 그들과 함께 悲를 맞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들의 슬픔을 나누어 가지며 기도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 ‘이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그만 모든 걸 덮고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자녀인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직도 그 길 위에서 우리의 ‘이웃’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말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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