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톡톡 – 이상한 ‘자유의 언덕’ 에 오르다 – 홍상수, 「자유의 언덕」

정미선

이상한 자유의 언덕에 오르다

  • 홍상수, 「자유의 언덕」

“이게 영화야? 뭐 이런 이상한 영화가 다 있어? 이런 걸 영화관에서 상영한단 말이야?”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 조명이 밝아지기가 무섭게 앞줄에 앉아있던 아저씨 한 분이 함께 온 일행에게 자신의 언짢은 기분을 큰소리로 전했다. 홍상수 감독의 16번째 영화 「자유의 언덕」은 확실히 이상한 영화다. 배우들의 영어 연기는 원어민이라면 자막이 필요할 정도로 어색하고, 영상은 생전 처음 카메라를 만져보는 이가 찍은 것처럼 단순하고 투박하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기 위해 타국에 머무는 일본 남자의 로맨스 영화 같기도 하고, 매 장면마다 관객이 직접 앞 뒤 맥락을 맞춰나가야 하는 미스터리 영화 같기도 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위와 대사가 산발적으로 전개되고, 영화를 보면서 갖게 되는 수많은 의문은 결국 아무 해답도 얻지 못한 채 답답함과 허무함만이 영화관을 가득 메운다. 스토리와 캐릭터 중심의 극영화만 보다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이라면 “이상한 영화”라는 평가에 충분히 동의할 것이다. 점점 더 포악하게 오르고 있는 영화 값을 기꺼이 감수하며 간만에 문화생활을 즐겨보고자 영화관에 온 기운 센 아저씨가 “뭐 이런 이상한 영화가 다 있어?”라며 화를 내고 소리를 내질러도 별로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이상한 감독의 이상한 영화가 16편이나 만들어지고, 전국에 있는 영화관에서 번듯하게 상영되며, 대한민국을 대표해 해외 유명 영화제에 초청되는 일들 사이에는 일련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당장 내 눈에 이상하고 내 귀에 거슬리는 영화라도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거니 하는 낌새를 차릴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모든 장면을 면밀히 분석하고 감독의 의도를 낱낱이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상한 것”,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 “모르겠는 것”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용기 있는 일이기에, 이 이상한 「자유의 언덕」을 올라보도록 한다.

흔히 어떤 사건을 떠올리고 그것을 이야기 할 때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하지만 「자유의 언덕」의 경우, 보통의 방식과는 다른 전개 방식을 보여준다. 어학원 강사인 “권”은 타지에서 병을 고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자신 앞으로 온 편지를 전달받게 된 “권”은 그 편지가 헤어진 연인 “모리”가 자신에게 쓴 편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편지를 읽으며 계단을 내려오던 권은 현기증에 잠시 중심을 잃고 손에 든 편지를 떨어트리게 되는데, 영화는 “권”이 아무렇게나 주워 모은 편지 속 내용들로 전개된다. 순서가 뒤죽박죽 뒤섞인 편지들이 그대로 영화화된 것이다.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구성이 아닌, 어떤 일관성도 없고 기준도 없는 상황들이 이어 붙여진 영화다.

그렇다면 감독은 도대체 왜 이런 전개 방식을 택해 영화를 “이상하게” 만들었을까?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을 미루어 예상컨대 “시간”의 순서를 뒤섞은 이유는 인물의 행위에 더욱 집중하고 깊은 관찰과 성찰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순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이 사건을 꿰고 있는 한, 인간의 행동은 원인과 결과로 나뉘게 되고 순간의 불완전함이나 감정의 모호함과 같은 인간 자체가 가진 문제들을 포착하기 어렵다. 실제로 관객들은 “모리”가 남긴 편지로만 그를 접하게 되는데, 앞 뒤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그를 평가하자면 한 여자에게 순정을 다하는 로맨티시스트로 보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 나쁜 남자(?)로 보이기도 한다. 시간과 분리되어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인간의 행동은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저지른 잘못에 대해 변명할 때, 구구절절 앞 뒤 상황을 설명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전개방식은 관객 입장에서는 매우 낯설고 생소한 방식인 것 같지만, 흔히 반전영화라고 불리는 미스터리․서스펜스 장르에서 편집 기법을 활용해 많이 이용되고 있다. 실제로 영화를 보다 보면 헝클어진 편지의 조각들을 시간순서대로 이어붙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이야기를 전달할 때뿐 아니라, 이야기를 들을 때(볼 때) 역시 시간 순서대로 사건들을 나열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이 편지를 넘기고 그 편지의 내용에 해당하는 장면이 펼쳐질 때마다 다른 장소, 다른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인상 깊은 상황이나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영화의 앞 뒤 맥락을 가늠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들여다봐야 할 이 영화의 이상한 점은 사라진 편지 한 장이다. “권”이 계단에서 편지를 떨어뜨려 순서가 뒤섞였을 때, 미처 줍지 못한 한 장의 편지가 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권”이나 우리나 알 길이 없다. 다만 영화에서는 편지 속 내용의 연결고리가 느슨한 지점들, 예를 들면 “모리”가 누군가와 싸워 얼굴에 잔뜩 상처를 입은 채 등장하는 장면이나, 길을 지나가다 한옥 대문 틈을 들여다보며 오묘한 표정을 짓는 행동 등을 포착하게 되는데, 전혀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임에도 관객들은 기를 쓰고 그 장면을 추적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편지 한 장의 내용을 찾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자신이 가진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 순간-설사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장면이라 하더라도 관객들의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야 말로 이 영화의 재미이자 영화라는 예술 장르가 갖는 가장 큰 흥이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 관객들을 모두 창작자로 만드는 재미이다.

홍상수는 “감독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아니라, “관객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의 이상한 점들이 지닌 공통분모는 관객 한 명 한 명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대로 흘러가도록 둔다는 점이다. 시간이라는 수레에 관객들을 태우고 자신들이 만든 결말로 끌고 가는 다른 감독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관객 한 명 한 명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결말을 만들어 낸다. 물론 이런 방식에 익숙지 않은 관객의 경우, 감독의 책임을 운운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술관에 걸려있는 미술품을 보고 궁금증이 생겼을 때, 옆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작품 설명에 늘 그 답이 있던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영화라기보다 잘 만들어진 예술품에 가깝다. 따라서 이 이상한 영화를 보고 자신이 아는 전개, 자신이 아는 결말, 자신이 아는 해답을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그저 날(生)것 그대로인 것만이 가진 비린내를 느끼고(설령 그것이 약한 비위를 자극한다 하더라도) 무수한 질문을 쏟아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로 삼는 것이 어떨까?

정미선 가라앉지도, 떠 있지도 못해 항상 헤엄치는 중인 스물넷의 직장인 여자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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