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의 시대 읽기 – 일베는 괴물인가?

조현진

일베는 괴물인가?

2014년 9월 6일 광화문 광장 앞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단식농성장 앞에서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이하 ‘일베’로 약칭)와 자유대학생연합 회원들이 라면과 치킨을 먹는 소위 ‘폭식’ 행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일베는 8월에도 유가족들의 단식농성장 앞에서 삼각김밥을 먹는 퍼포먼스를 벌여 비난을 받은 바 있지만, 이날은 대규모의 회원이 공개적으로 단식을 조롱하는 행사를 벌여 큰 충격을 주었다.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코뮤니티에서 여성, 호남, 좌파에 대한 여과없는 혐오 발언을 토해내던 이들이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여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행동은 물론 엄청난 반감을 몰고 왔다. 진보적인 언론 뿐 아니라 보수적인 언론도 이들의 ‘몰상식’과 ‘패륜’을 지적하며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새누리당의 한 국회의원은 찌질한 짓으로 “보수 얼굴에 먹칠하지 말”라며 일갈했고, 유명한 한 진보논객은 “사회에서 배제당한 사람이 모여 배제하는 놀이를 하는 것”이라 조롱했다. 일반 시민들의 평가는 더 가혹했다. 상당수의 시민들은 이들을 ‘사이코패스’와 다를 바 없는 공감무능력자나, 취직도 못 한 채 집구석에 처 박혀 인터넷으로 소일하는 ‘잉여’와 ‘루저’로 규정했다. 이들의 행동은 너무나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기에 공포보다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적어도 9월 6일 하루동안 이들은 대한민국의 다른 시민과 섞일 수 없는 ‘괴물’이자 사라져야 할 ‘공적’으로 지탄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일베의 행동을 할 일 없는 백수의 ‘잉여짓’이나 소수 사이코패스의 ‘패륜’으로 보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일까? 나는 일베의 행동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올바른 분석도 아니고 적절한 평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 출간된 논문에 따르면(2014, 김학준), 일베는 2012년을 기점으로 회원수가 크게 증가하게 되고 여론의 관심대상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런 양적 성장과 여론 주목의 계기가 된 사건이 이른바 ‘인증 대란’이다. ‘인증 대란’이란 일베이용자들이 자신들을 루저나 잉여로 보는 일반 네티즌의 인식을 뒤집기 위해 학벌이나 직업을 ‘인증’한 사건을 말한다. 2012년 10월 23일까지 500여명에 이르는 일베이용자들이 ‘인증’을 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소위 명문대 혹은 의치대 계열의 학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후 이런 인증 내용 중 여럿이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신뢰도가 깎이기는 했지만, 이 사건은 일베이용자들이 루저나 잉여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일반 네티즌들에게 심어주었다.

사실, 어떤 주장을 평가할 때 그의 신분이나 지위는 본질적인 고려사항이 아니며, 따라서 일베이용자의 주장을 평가할 때도 그가 루저인지 아닌지는 핵심적인 고려사항이 될 수 없다. ‘루저’나 ‘잉여’라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지 말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증 사건이 보여준 건 일베이용자들의 신분이나 학력이 아니라 ‘루저’나 ‘잉여’를 판단하는 우리 사회의 은밀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가 아무리 몰상식한 주장이나 비속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명문대’나 ‘의치대’ 학생이라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며 재고해 보려는 우리의 야릇한 이중 잣대 말이다.

공교롭게도, 루저나 잉여를 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은 일베가 여성, 호남, 진보좌파를 배제하는 시각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일베가 여성, 호남, 진보좌파를, 사회통합을 깨뜨리기에 배제해야 할 타자로 대상화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 역시 입시경쟁이나 직업경쟁에서 낙오하거나 뒤쳐진 루저와 잉여의 소리는 들을 가치가 없는 타자의 목소리로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남을 타자로 묶어 배제할 뿐 아니라 이렇게 배제하는 이유의 정당성에 대해 자문하거나 성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태도는 마치 뒤집힌 거울상처럼 닮아 있다.

일베를 공감무능력자로 보려는 시각 역시 일면적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이런 시각은 그들의 행동이나 동기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베 이용자들은 공감이 없다기보다는 공감의 방향이 가해자로만 향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베회원들은 세월호 유가족에게 단식농성을 그만두고 여야가 졸속 합의한 세월호특별법을 수용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 없는 상황에서 일베의 이런 요구는 정부의 입장에 일방적으로 공감을 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유가족을 보상금이나 노리는 속물로 보는 반면, 대통령과 정부부처 및 해경은 이런 속물의 피해자나 희생자로 보는 시각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공감의 대상이어야 할 희생자나 피해자가 오히려 반감의 대상이 되는 반면, 반감의 대상이어야 할 가해자나 책임자가 오히려 공감의 대상이 되는 이러한 ‘전도된 공감’ 현상은 자신을 ‘피해자’나 ‘패배자’로 상상할 수 없는 이들의 상상력의 결핍에서 나온다. 최근 연구에서는 이런 전도된 공감 현상의 원인을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를 내면화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고 있는 청년층의 멘탈리티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김학준, 2014, 129 참조). 일베 회원들 상당수가 자격증취득 같은 ‘스팩 관리’를 중시할 뿐 아니라 감정적인 대중과 다르게 자신을 ‘논리적’ 존재로 각인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이런 분석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일베이용자들의 주 연령대가 20-30대 청년층이라고 해서 일베의 문제가 곧 청년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들이 표적으로 삼고 있는 호남, 여성, 진보좌파는 그들만의 공격대상이 아니고, 이제까지 한국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받았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도 있다. 이전에는 지역차별, 여성차별, ‘빨갱이 사냥’이 서로 독립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면 일베에게 이 셋은 마치 하나처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일부 ‘불순세력’이 개입했다는 그들만의 ‘심증’을 근거로 5.18유공자가 6.25유공자에 비해 특혜를 받고 있다는 발언이나, 국민의 정부가 만든 여성가족부가 추진한 군가산점 폐지 등으로 남성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발언 등이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 밑바탕에는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할 존재가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도착된 정의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일베의 문제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청년실업, 민주주의 후퇴, 왜곡된 시민교육 등의 문제가 응축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 따라서 우리는 일베 현상을 한탄하거나 비난하기보다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해자와 책임자에게 오히려 공감을 표하는 그들의 ‘전도된 공감현상’과 차별에 대한 시정이나 민주화 운동유공자에 대한 보상을 역차별로 간주하는 ‘도착된 정의관’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 1등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의 낙오와 패배를 노력의 부족으로 단죄하는 문화가 지배하는 한 자신의 실패에 대한 비난과 책임을 타자에게 돌리는 현상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일베를 통해 우리 자신 속의 ‘도착된 정의관’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파업을 불순한 사회혼란으로 보거나,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여성고용할당제 등을 남성에 대한 역차별로 보는 시각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으며, 일베를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현진 대학에서 근대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정치철학과 종교, 기본소득과 관련한 연구를 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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