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우리신학연구소 창립 20돌 – 걸어온 길, 가야할 길 – 조광

조광

평신도 신학운동 20, 그 역사적 의미

들어가는 말

230년 전 한국천주교회가 평신도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한국교회는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지 210년이 지나서 우리신학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평신도 신학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오늘에 이르러서 우리신학연구소는 그 설립 20주년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우리신학연구소는 앞으로 전개될 또 다른 20년을 전망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운동이 미래에 대해 올바른 전망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걸어온 지난날의 발자취와 자신이 살아왔던 환경에 대한 역사적 검토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한국교회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신학운동의 특성을 요약하면서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한국교회에서 평신도 신학운동

한국교회는 평신도의 노력으로 설립되었다. 교회가 세워지던 18세기의 80년대 우리 선조들은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고, 이를 교회창설로 연결해 나갔다. 그들이 전개했던 것은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한 학문운동이요 문화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운동은 곧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운동이기도 했다. 이 운동에 투신한 평신도들의 열정 때문에 한국교회는 세워졌다.

교회가 1784년에 세워진 이후 불과 3년 만에 교회 서적에 대한 한글 번역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번역작업의 주역은 신자들이었다. 이 번역작업은 교회창설을 위한 노력 못지않게 새로운 지적 운동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초기교회의 지식인 신도들은 천주교 신앙을 자신의 전유물로 남겨놓지 않고 ‘공번된’ 가르침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 한문으로 된 교회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1801년의 박해 때에 조선정부 당국이 압수한 천주교 서적은 120여 종이었다. 이 가운데 87종이 한글로 된 교회 서적이었다. 교회가 세워진 후 17년 만에 그 많은 책자가 한문에서 한글로 번역되었다. 이때 번역된 책자 가운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성경직해”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주일과 주요 축일에 읽히는 복음서를 번역한 것이었다. 그 번역된 분량은 4복음서의 3분의 1에 이르는 분량이었다. 이 엄청난 작업이 평신도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또한, 초기 교회사에서는 평신도가 저술한 신학 서적의 존재도 확인된다. 즉, 복자 정약종은 한글로 된 “주교요지”를 지었다. 1795년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이 책을 높게 평가하고 자신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책을 저술한 정약종은 우리나라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손위 형으로서 한문에 능통했다. 그러나 그는 한글이라는 만인(民人)들의 문자로 천주교 교리를 정리해서 제시해 주었다.

한국교회사를 검토해 보면, 항상 평신도 신학자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평신도 신학자들은 초기교회 단계에서 활동했던 점은 분명하지만, 교회사의 전개과정에서 점차 그 존재를 찾기 어려워져 갔다. 물론 황석두와 같이 탁월한 인물이 선교사의 저술 작업을 도와 한글로 된 교리서를 간행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신학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이르기까지 선교사가 오로지 했던 단계에 놓여 있었다.

물론, 1930년대에 이르러 선교사가 신학연구의 중심이었던 한국교회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교황 베네딕트 15세는 모든 선교지역의 교회를 관장하는 수도단체와 선교단체들에게 교회의 현지화를 강력히 요청한 바 있었다. 그의 권고에 따라 한국교회에서도 매우 뒤늦게 유럽에 신학생을 유학 보내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사에서 신학의 현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노기남 주교 단계에서 신학의 연구를 위해 한국의 신학생 다수가 해외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한국 가톨릭신학계를 주도했고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신학이란 학문분야는 성직자들만의 학문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평신도 신학운동의 향방

현대 한국교회의 성장 과정에서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1970년대 이래로 한국교회가 감행했던 교회의 사회참여는 한국교회 특히 그 평신도들의 각성을 자극했다. 1994년에 창설된 우리신학연구소도 이러한 교회사적 흐름의 연장이었다. 여기에서 특히 신학운동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 데에도 이유가 있다. 당시 이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신학이 결코 사변(思辨) 일변도의 정태적 학문이 아님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들은 신학이 실천을 통해서 그 진정한 의미가 논증될 수 있는 학문이며, 사회의 발전과 변혁에 이바지하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해 갔다. 여기에서 신학이란 학문은 연구에만 그치지 않고 운동으로까지 전개될 수 있었다. 이 운동은 단순히 평신도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곧이어 이 운동에 성직자, 수도자들의 지원도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평신도 신학 전문가들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교회사에서 18세기 말엽에 등장했던 신학운동의 열정을 방불케 하는 일대 사건이기도 했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해내와 해외에서 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우리나라의 신학 발전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신학운동을 전개했던 초기의 구성원들을 이어받아 새로운 연구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연구자의 폭은 점차 더욱 넓어져 갔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은 우리 신학운동이 반(反)성직주의적 경향으로 흐를 수 있음을 염려하며,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신학연구소 자체의 경우에서도 결코 순탄한 길을 걷지 만은 않았다. 특히 우리나라 평신도 신학자들의 존재 기반이 가지고 있는 취약성을 그 재정적 빈곤을 통해서 계속해서 노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신학운동은 계속되었고 20년을 이어왔다.

이 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우선 역사적 힘의 작용을 들 수 있다. 특히 복자 정약종과 같은 평신도 신학자의 존재나 초기교회의 지식인들 사이에 일어났던 신학운동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대중화하기 위해 평신도들이 전개했던 번역운동의 존재를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오늘의 우리신학연구소가 버티어나가는 데에는 너무나 먼 시간적 간격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교구 소속 성직자들만으로도 신학교 교수진을 구성할 수 있는 매우 드문 지역이다. 이는 신학연구가 교구소속 성직자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연구의 폭이 수도자에게까지도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최근에 이르러서 수도회 출신 신학자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현대교회 일각에서는 한국교회사의 전통에 따라 평신도의 중요성을 확인하면서 이를 지원하려 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이 존재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신학은 교회 구성원 모두의 공동자산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우리신학연구소도 존립하게 되었다.

나가는 말

한국교회가 평신도의 주도로 성립되었다 하여 한국교회를 평신도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로 구성된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학은 성직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그렇다 하여 신학이 성직자들만의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학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 모두의 공통적 관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신학연구소는 지난 20년 동안 신학이 교회구성원 모두의 관심사임을 천명하며 실천해 왔다. 그리고 신학의 연구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성숙, 한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는 우리신학연구소가 우리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신학연구소가 가지고 있는 더욱 중요한 의미는 현대사회의 제반조건에 적응시켜 신앙과 신학을 선포해 나갈 방안을 모색해주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그 20주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신학연구소는 앞으로도 우리 교회의 전통에 따라 평신도들이 신학을 연구하며 교회의 성숙에 기여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아 나가야 한다. 우리신학연구소는 한국교회의 성숙과 한국의 사회발전에 이바지 하는 일은 결코 둘로 구분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확인해 주어야 한다. 이 입장에 확고히 할 때, 연구소와 그 연구원들은 21세기의 정약종이 될 수 있으며, 한국교회의 새로남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한국의 옥스퍼드운동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신학연구소는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20년 동안 더욱 밝은 빛을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남기게 될 것이다.

조광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우리신학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1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