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우리신학연구소 창립 20돌 – 걸어온 길, 가야할 길 – 경동현

경동현

무 살 연구소를 응원해주세요!

교회 안팎으로 민주화운동이 활발했던 1987년 봄, 춘계주교회의는 사회참여에 적극적이던 당시의 평신도사도직협의회와 가톨릭농민회,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대학생전국협의회 등 전국 단체를 교구 단위로 환원시키고, 전국기구로서의 명칭과 운영방법을 폐지할 것을 결정했다. 민주화의 원년으로 기억되는 이 해에 교회 장상들은 평신도 사회운동에는 침체의 시작을 알리는 결정을 한 것이다. 평신도 사회운동의 중요한 축이었던 당시 청년 대학생들은 민주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에 절망하는 한편으로 꿈꾸는 교회공동체를 직접 만들어보자며 여성, 인권, 노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발적인 모임들을 만들어갔다. ‘교회쇄신’을 주요과제로 내세운 평신도 연구자 집단 ‘우리신학연구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신학을 중심으로 종교학, 사회학 등 관련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자 공동체를 꿈꿨던 우리신학연구소가 교회의 쇄신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고민했던 이유는 복음을 살고자 하는 평신도들의 실천에 교회가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던 역설적인 체험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부 전공은 제각각이었던 청년들이 늦깎이로 신학, 종교학 공부를 시작했고 그렇게 스무 해가 지났다. 20년이 지난 지금 연구소의 꿈은 얼마나 현실이 됐을까? 평신도의 사정은 좀 나아졌을까? 아직 평신도 신학박사가 신학교에 교수로 임용됐다는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적어도 신학분야에서는 제자리걸음인 것이 분명하다.

현재 세월호 관련 천주교 서명운동이 주교회의 정평위의 이름으로 전국 여러 곳의 본당과 온라인에서 진행 중이다. 대수천(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이라는 평신도 모임은 이 서명운동에 딴죽을 걸고 지난 10월 10일 자 조선일보에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세월호특별법 서명강요를 즉각 중단하라. 평신도들이여 깨어 일어납시다. 목자의 탈을 쓴 위선자들의 정치놀음을 더 이상 좌시하지 맙시다.”라는 아주 자극적인 제목의 하단 광고를 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방한 기간 세월호 유족을 위로하고 귀국길에 올라서도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남겼지만, 실제 서명 현장의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없다. 유족의 고통에 연대하는 사제, 수도자들을 ‘종북’이라 서슴없이 부르고, 서명을 받던 실무자들에게 육두문자를 날리는 신자들도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과거보다 이곳저곳에서 평신도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쇄신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신앙을 빙자한 정치 언사들만 난무하는 형국이다. 나는 이런 흐름이 자발적인 평신도 사회운동의 흐름을 꺾어놓았던 1987년 주교회의 결정의 업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일할 평신도 일꾼을 쫓아낸 자리를 누가 차지하고 있는지, 본당에서 목소리를 내는 평신도들의 면면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평신도가 중심이 돼 교회를 쇄신하자고 했는데, 오히려 평신도들이 쇄신의 걸림돌이 되고 있으니 연구소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제 중심의 교회에 쓴 소리를 해온 연구소는 본래의 취지에 맞게 말하려면 교회의 재정 지원 없이 홀로서야 가능하다는 판단으로 특정 교구에 등록되거나 지도신부 없는 사단법인의 형태를 취했다. 그래서 연구소 출자회원이라면 사제, 수도자, 평신도에 상관없이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행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를 가졌다. 임원중에 사제가 있기는 하지만 초창기부터 이사장, 소장은 평신도가 맡는 것이 불문율처럼 관행이 됐다. 그러다가 설립 10주년을 맞은 2004년, 이사장은 사제가 해야 재정 운영에 도움이 된다며 창립 초기부터 연구소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던 사제를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사제 이사장 체제가 들어선 2000년대 중반기는 그동안 연구소의 주요 연구 사업이자 수입원이었던 교구, 본당, 교회기관 진단 작업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사그라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진단은 진단대로 하고, 진단결과와 실천이 별개인 현실이 제일 큰 원인이었다. 진단사업이 줄면서 연구소 재정에 빨간 경고등이 예상됐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설립 10년 만에 처음으로 후원회원 모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후원회 사업을 시작하고 몇 년 만에 후원자 500명이 가능했던 것은 사제 이사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연구소 운영의 상당 부분을 사제에 기대어 왔던 게 사실이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를 넘어서자고 말하는 연구소의 재정 운영이 성직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 교회의 현실이긴 하지만, 사제 이사장에게 의존하는 시간이 1년 2년 세월이 지나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치열함과 열정이 사라진 건 아닌가하는 이야기들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 그렇게 8년여의 세월이 흐르고 2012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시 평신도 이사장, 소장 체제로 돌아오고 2년 넘는 시간이 더 흘렀다. 평신도들이 연구소의 중심을 다시 잡고 나서 생겨난 큰 변화는 역시 재정적인 어려움이다. 이제 안락했던(?) 온실을 나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감하며 2년여를 지내고 보니 나름 몸속 깊숙하게 숨어있던 연구소 초기의 헝그리 정신이 다시 꿈틀거리기도 하고, 치열함과 열정을 다시 끌어내 주는듯하여 반갑기도 하다.

이달 11월 15일 연구소 20주년 심포지엄과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심포지엄 경비와 내년 상반기 발간 예정인 20주년 기념 단행본 발간 비용 마련을 위한 모금 사업을 지난 9월 19일 시작했다. 이 모금사업에 오늘(10월 20일)까지 총 39명의 은인께서 800만 원이 넘는 정성을 모아주셨다. 모금 목표액 1천만의 80%가 넘는 액수로 모금 마감일인 11월 중순까지는 목표액을 달성할 수 있을 듯하다. 연구소 이사로 참여하는 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에서 소문을 내주셔서 몇몇 수도회에서 도움을 주셨고, 연구소 이사, 출자회원, 후원자와 여러 길벗께서 정성을 모아 주셨다. 멀리 비금도에 사시는 한 길벗께서는 20주년 기금을 모은다는 페이스북 글을 보고 천일염 100kg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이 소금은 20주년 심포지엄 참석자들께 나눠 드릴 예정이다. 참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제주강정기지 반대활동으로 형사재판을 받았던 소희숙 스텔라 수녀는 모금사업에 쌈짓돈을 보내시면서 이런 메시지를 남기셨다.

“20년! 청년입니다. 놀랍습니다. 부디, 비약하시길 바랍니다. 제자리걸음은 장애입니다. 획기적인 기획을 바랍니다.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을 넘어섰으면 합니다. 무엇이든, 답습은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모든 땀과 노고를 주님께서 어여삐 보시고 축복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나도 빈자라서 소액, 5만 원 보내드립니다. 이럴 땐 나도 부자였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소 수녀의 이야기처럼 살아남기,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획기적인 기획으로 보답하는 것이 20주년을 맞아 도움을 주고 계신 분들께 조금이라도 빚을 갚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20주년이 연구소 구성원들에게는 제자리걸음을 넘어서는 획기적인 기획으로 심기일전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연구소가 새로운 기획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도록 길벗께서도 조금 더 힘을 모아주시길 부탁드린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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