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돋보기 –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회 개혁과 함께 교회 쇄신에도 나서야

정중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회 개혁과 함께 교회 쇄신에도 나서야

정의구현사제단, 해방의 요람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 40주년을 축하하며

(기사 전문: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247)

한상봉 | isu@catholicnews.co.kr

정의구현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은 누구인가?
교회쇄신과 사제갱신운동이 필요하다

한편 정의구현사제단이 한국교회에서 주류가 아닌 것처럼 다른 흐름 역시 완강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실을 충분히 성찰해야 한다. 1978년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가 “현정권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주장하면서, 김수환 추기경과 지학순 주교 등이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전주 전동성당에서 150여 명의 사제단과 함께 1만 명의 신자들이 시국미사에 참석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구국사제단”이 등장하기도 했다. 서울교구 김창석 신부와 마산교구 정하권 신부가 주축이 된 ‘교회 현실을 우려하는 연장사제 49명’은 <주교단에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해 성직자들의 사회참여를 비판하면서 사제들이 제2선에 머물도록 조처해 달라고 요청했다.

1970년대 이후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해 한국천주교회가 민주화운동에 나선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대구대교구의 서정길 대주교와 경갑룡, 정진석, 김남수 주교 등이 교회의 사회참여를 가로막고 정권친화적 태도를 유지해 온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에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등 극우 천주교단체까지 나서서 정의구현사제단 등 참여적 사제들을 ‘종북사제’로 규정하며 겁박하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역설적이게도 “사제단이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종조차도 ‘정치적 사랑’을 강조하고 가톨릭사회교리가 ‘행할 교리’로 제도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교회분열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정치권력을 옹호하는 세력이 일으킨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사람은 중년기에 접어들면 자기 생애의 의미를 다시 묻기 시작한다. 밖을 응시하던 시선을 잠시 내려놓고 ‘나는 누구인가’ 묵상하게 된다. 이처럼 정의구현사제단도 창립 40년을 맞이하면서, 세상의 복음적 변혁뿐 아니라 교회의 개혁에도 마음을 써야 한다. 흔히 교회 안에서 정권에 대한 욕은 하더라도 교회에 대한 비판은 금지되어 있다는 게 통념이 된 지 오래다.

교종마저도 ‘교황청 개혁’을 서두르고 있는 마당에 한국교회는 교회개혁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가 없고, 결국 교황방한 효과가 벌써 시들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교회 안의 권위주의와 관료화, 사제 줄 세우기와 성직이 직업이 되는 현상, 상업주의와 출세주의, 남녀차별주의, 장애인 배제 사목 등 사회문제 만큼 심각한 것이 교회문제다. 다만 개신교처럼 이러한 문제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교회개혁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비민주적이며 권력지향적인 평신도들이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이다. 교회가 투명하고 민주적이라면 교회는 신자들에게 민주주의를 배우는 학교가 될 것이다.

한편 어쩔 수 없는 가톨릭 권위주의 체제에서 교회개혁은 사제갱신운동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년기에 접어든 정의구현사제단이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사제갱신운동이다. 어느 사제들은 동기모임에서 “우리 동기 중에는 골프 치는 신부가 없도록 하자”고 결정했다는 소식을 며칠 전에 어느 사제로부터 전해 들었다. 사제들이 청렴하고 온유한 사목자로서 본당생활을 잘 할 수 있다면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을 테고, 신자들은 그의 음성을 깊이 새겨듣는다. 그러나 사제로서 기본적 직무를 소홀히 하면서 사회참여에만 골몰한다면 아무도 이러한 사목자의 음성을 귀담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 동참하는 사제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본당에서 민주적인 사목관행이 정착되어야, 그 민주주의를 사회에 요구하는 예언자적 외침에 힘이 실린다.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고난의 뜻을 지니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의 지난 여정 역시 그러했다. 지난 9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기념 미사 강론에서 전종훈 신부의 언급대로 사제단의 40년은 “모질고 모진 고난의 40년”이었다. 1970년대에는 박정희 유신 독재, 80년대에는 6월 항쟁을 정점으로 한 전두환 군부 독재, 90년대에는 남북 분단과 국보법에 각각 맞섰던 시기였다면, 2000년대에는 새만금, 영월댐, 평택미군기지, 천성산 터널, 이라크 파병, 한미FTA, SOFA, 4대강 사업 등에 반대하는 삼보일배와 오체투지, 삼성비자금사건 폭로, 용산 참사, 두물머리, 제주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위한 225일 미사,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 시국선언,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광화문 단식 등 ‘길 위의 사제들’은 현장에 복음적 열정으로 투신하면서 40년을 한결같이 광야의 외침으로 헌신했다. 그날 기념 미사에 세월호 유가족, 쌍용차 해고자, 용산 참사 유가족, 두물머리 농민들이 참석해 축하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날 같은 자리에서 열린 ‘사제단의 활동 평가와 전망’이란 주제의 학술대회에서 사제단에 대한 과거 평가와 미래 전망 그 모두가 사제단의 대사회 활동에만 집중되었던 점은 교회 쇄신을 바라는 내게 무척 아쉬웠던 부분이었다. 40년을 넘어가는 사제단이 사회 개혁을 위한 비판과 참여 활동과 함께 앞으로는 교회 내부 개혁에도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보는 까닭이다. 한국가톨릭교회는 강남의 신자율이 25%라는 사실이 말해주듯 이미 우리 사회 기득권의 한 중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점이 가톨릭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였던 40년 전과 달라진 현실이다. 어쩌면 교회 쇄신 없이는 사제단의 사회 개혁 노력도 ‘앞에서 벌어 뒤로 까먹는 꼴’이 될 것이다. 물론 제 눈의 들보보단 남의 눈에 든 티끌을 지적하기가 쉽고 우선 공명심 차원에서라도 신명 나는 짓이다. 가톨릭 교계제도의 상명하달 식 권위주의적 특성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내부 개혁이 얼마나 힘든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교회 내부만 아니라 교회 바깥에서도 비판받는 정진석 염수정 두 추기경의 행보에서 드러나듯 이미 사회 변혁에 걸림돌이 되어가는 한국가톨릭교회의 행태를 외면하고 광야의 외침으로 남겠다는 것은 눈 감고 아웅 하는 책임회피다. 2000년 전 광야의 두 외침,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타하신 상대는 바로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었지 않았던가! 마침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독재로 규정하고, 세상을 향해 개혁을 외치며 교회로 하여금 세상 밖으로 나가라고 재촉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깥을 향한 외침 못지않게 바티칸 내부 개혁도 강도 높게 추진하고 있다. 사제단이 진정 한국가톨릭교회의 누룩이라면 교황처럼 교회 내부 쇄신에도 앞장서야 한다. 여기에서 빛이 아닌 누룩이란 표현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자신을 던져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누룩의 역할이다.

사제단은 개인 사제가 부임하고 있는 본당의 쇄신은 물론이고, 교회 내 권력형 부패와 비리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을 들이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명동성당 재개발 문제, 가톨릭 병원들의 노사 문제, 사제들의 공공연한 비밀인 성 추문 문제, 냉담자 문제, 피임과 낙태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로 지새우는 생명 문제, ‘평화드림’을 비롯하여 교회의 사기업화 문제 등등 ‘드러내지 못해 곪아가고 있는’ 쇄신이 필요한 교회 내부의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꽃동네 문제도 그 하나이다. 이번에 방영한 KBS 2TV ‘추적60분’ 제작을 위해 여러 사제들께 협조를 부탁하는데, 사제단 소속 사제들조차 조심스러워하며 손사래 쳤다고 한다. 한국가톨릭교회만큼 내부 고발이 힘든 폐쇄적인 조직이 또 있을까. 이런 침묵의 카르텔이 깨져야 교회 쇄신의 창문도 활짝 열릴 것이다. “‘연대’는 교회 밖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교회 안에서도 뜻있는 사제들과 신자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하느님 이름으로 맘몬을 섬기는 기득권층의 포로가 된 교회를 해방시켜야 한다.”(가난한 사제들을 변호함, 한상봉). “고통받는 이들 앞에 중립은 없다”는 교황의 가르침이 교회 내부의 불의와 비리 문제에만 예외로 적용되어선 안 되며, 오히려 우리 문제이기에 더욱 엄정한 자세로 그 해결에 나서야 한다. 남에게 엄격했던 그만큼 사제단은 스스로에게도 엄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날 학술대회에서 박기호 신부도 사제단의 활동이 한국가톨릭교회를 쇄신했는가 묻고 “고단한 광야의 예언자로서 가볍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단의 역량으로 충분히 할 수 있었던 다른 일이 분명히 있었다”고 성찰하면서 “정의구현을 위한 사제의 행동은 분노나 공명심이 아니라 영성의 행동화라는 확고한 믿음이어야 한다”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그런 점에서《지금여기》한상봉 주필의 칼럼 ‘정의구현사제단, 해방의 요람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40주년을 축하하며’는 반가운 글이었다. “밖을 응시하던 시선을 잠시 내려놓고 ‘나는 누구인가’ 묵상하자”는 이 글은 사제단에게 “창립 40년을 맞이하면서, 세상의 복음적 변혁뿐 아니라 교회의 개혁에도 마음을 써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회 안의 권위주의와 관료화, 사제 줄 세우기와 성직이 직업이 되는 현상, 상업주의와 출세주의, 남녀 차별주의, 장애인 배제 사목 등 사회문제만큼 심각한 교회문제”에 대해 비록 “정권에 대한 욕은 하더라도 교회에 대한 비판은 금지되어 있다는 게 통념”을 깨지 못하고 있는 사제단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교종마저도 ‘교황청 개혁’을 서두르고 있는 마당에 한국교회는 교회개혁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가 없고, 결국 교황 방한 효과가 벌써 시들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이유가 교회 내부에서의 자정의 목소리가 부재한 까닭은 아닌가. 사회 내의 불의의 현장을 고발하고 교회 밖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외침을 대변하는 그 목소리로 교회 내의 불의의 현장을 고발하고 교회 내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외침도 대변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한국가톨릭교회 쇄신이 바로 우리 사회에 변혁에 곧장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만 한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가톨릭교회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이 높아져 가면서 사회 흐름을 주도할 만큼 주류화되었다는 의미이고, 교회 쇄신과 사회 개혁이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교회’를 외치는 교황의 메시지가 한국가톨릭교계에 부담스러웠던 것도 그러할 것이다. 교황 방한의 메시지를 교회 쇄신의 움직임을 촉진하는 씨앗과 불씨로 삼기는커녕 오히려 교회 내부에서부터 교황의 흔적을 지우려는 움직임들만 노골화되는 현실은 결국 방한 전에 교황청 대변인 롬바르디 신부가 염려한 대로 교황 방한을 ‘4박 5일짜리 이벤트’ 이상으로는 삼고 싶은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것 아닌가. 《지금여기》에 주문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교황 방한이 일회성 이벤트가 되지 않고 교회 쇄신의 불씨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금여기》만의 특색 있는 후속 작업을 해달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잠들려는 아테네를 깨우는 등에’라고 했다. ‘교회에 약이 되고 세상에 밥이 되는 언론’이라는 기치대로《지금여기》야말로 한국가톨릭교회 기관지 《가톨릭신문》과《평화신문》이 할 수 없는 역할, ‘잠들려는 교회를 깨우는 등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10% 신자율과 500만 신자 수를 내세우지만, 뒤로는 75%에 달하는 냉담자 비율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 한국가톨릭교회의 외화내빈 현실이다. 외형적 풍요의 축복을 탕진하지 않고 내적 쇄신을 향한 전환기로 삼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교회의 신원과 정체성을 재정립하고서 참된 복음화를 향한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 할 지금이다. 참된 복음화란 사회에 그리스도의 ‘옷’만 입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지금여기》는 사제단을 비롯한 교회 구성원들의 교회 쇄신을 향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공론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이자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으며, 교회 쇄신에 뜻을 두고 가톨릭뉴스《지금여기》를 뜻있는 이들과 창간하고 편집위원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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