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예수님의 행복론

김의열

예수님의 행복론

위령의 날, 11월 2일, 마태 5,1-12ㄴ (첫째 미사 기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던 지난 93년, 우리 지역엔 몇 명의 농부들이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생명농업을 실천하고 있었다.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이미 생명농업의 세례를 받은 나는 자연스럽게 이들과 어울리게 됐고 이들과 함께 94년 ‘솔뫼농장’을 만들었다. 당시 모든 농사를 무농약이나 유기농법으로 짓는다는 건 참으로 험난한 일이었다. 우선 병충해와 제초 문제가 가장 골머리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풀과 씨름을 하지만 결국 잡초 밭을 만들기 일쑤였고 진딧물, 도열병, 탄저병 등이 번지면 수확은 형편없었다. 그렇게 농사를 지어놓고도 마땅한 판로가 없어 애를 먹었다. 당연히 수입은 형편없었고 빚은 늘어갔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주변의 색안경과 손가락질이었다. ‘미친놈들’이란 소리를 듣는 건 예사였고 심지어 ‘빨갱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린다는 마음 하나로 온갖 어려움과 모욕을 이겨내며 묵묵히 걸어온 초창기 솔뫼농장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마태복음 5장은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설교다. ‘예수님의 행복론’인데 8가지를 말씀하신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대개 우리는 행복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경제적 풍요나 물질적 안락은 기본이고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지위 등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 여긴다. 아이들에게도 너의 행복을 위해 남을 밟고 일어서라고 암암리에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행복이 결코 외부에서 주어지는 물질적인 풍요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곧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늘나라의 주인이라고, 그들은 위로를 받고 흡족해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의 기준에 빗대어보면 과연 어떠한가?

솔뫼농장 농부들의 삶을 보면서 이들의 삶이 예수님의 행복론과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한다. 돈 보다는 생명의 가치를 선택하고 스스로 어려운 길을 걸어온 데서 이들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이들임을 알 수 있다. 온갖 어려움과 주위의 손가락질 속에서도 늘 여유와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은 온유함과 평화로움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권위의식이나 선배의식 없이 열린 마음으로 귀농한 후배들을 아무 조건 없이 농장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며 도시소비자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모습에서는 깨끗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느낀다. 지역이나 사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어려움에 부딪힌 이웃들의 처지를 살피는 모습에서 이들이 의로움에 굶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난 이들의 삶을 바라보며 인간의 행복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늘 생각한다. 이들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주인으로서 땅을 차지할 사람들이다. 예전에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영감(?)을 받아 내 나름대로 떠올렸던 행복론을 다시 읊조려본다.

“태양을 동경하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진리의 원천에 다다른다. / 땅과 함께 숨 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순수한 생명의 공기를 함께 호흡한다. / 꽃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신비로움에서 하늘나라를 찾는다. / 새의 날갯짓을 원하는 이는 행복하다. 그는 자유를 향해 날아오르는 법을 안다. / 물의 흐름을 따르려는 이는 행복하다. 그는 낮아짐으로써 드높아질 것이다. / 음악을 듣고 춤출 수 있는 이들은 행복하다. 뛰노는 생명력이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내면의 정화가 그를 평화롭게 할 것이다. / 사랑의 원형에 다다른 이는 행복하다. 그의 있음 그 자체가 사랑이므로.”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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