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내 마음 속의 성전

배안나

내 마음 속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11월 9일, 요한 2,13-22.

장면 하나. 내가 다녔던 성당엔 괜찮은 남학생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다. 인근 학교에서 전교 1등 하던 오빠도 여럿 있었고, 잘생겼다는 소리 좀 듣고 다니는 오빠들도 많았다. 뜬금없이 나에게 미사 시간을 물어오거나 성당에 같이 가자고 해서 청소년 미사에 왔던 친구들이 어느 순간 그 오빠와 ‘아는 사이’가 되면서, 다시는 성당에서 볼 수 없게 된 경우도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오빠들이 잘생긴지도 몰랐다. 남자들 얼굴을 거의 안보는 편인데, 남편은 내가 자기 외모에 반한 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게 외모를 안 본다는 거짓말 좀 하지 말라고 한다. 흠.

장면 둘. 큰 아이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다. 다른 곳은 알아보지도 않고, 동네 성당 유치원으로 결정했다. 동네에서 가장 오래되기도 했고, 나름 동네에서는 명문 유치원이기도 했다. 명성답게 입학시키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과연, 우리 큰 애 입학원서 접수받은 게 월요일인데, 금요일 저녁부터 밤을 새우며 기다린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부부는 원서접수 세 시간 전, 그러니까 새벽 6시에 도착해서 끝에서 두 번째로 접수에 성공했다. 아,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나려고 한다.

장면 셋. 고등학교 동창에게 연락이 왔다. 굉장히 친한 친구다. 친구는 동네 성당에 있는 유치원에 아이를 꼭 보내고 싶어 하는데, 입학조건 중 하나가 부모가 신자여야 한다. 내게 세례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기꺼이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훌륭하신 분들의 이름과 삶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도’가 정말 약했다. 최종 선택은 어느 신부님께서 곧 태어날 내 조카에게 추천해주신 세례명으로 정했다. 친구는 딸이 의사가 되길 원한다(아기 돌잔치 때 그리 말했던 기억이 난다). 라파엘이 의료인들의 수호성인이라 이야기해주었더니 딸의 세례명은 라파엘라로 결정했다고 알려주었다.

장면 넷.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미사 중에 눈물이 철철 흐를 때가 가끔 있다. 미사 중에 듣는 숱한 말씀 중 어느 한 마디가 목에 턱 걸려 그런 적도 있다. 그날의 응답송이나 시편이 꼭 나 들으라고 작정하고 써놓은 것 같은 적도 있었고. 마음이 응급상태나 다름없을 때, 나는 예수님이 내게 ‘처방전’과 약을 함께 주신 거로 생각했다. ‘병자’가 병원에 입원한 환자만을 일컫는 게 아님을 알게 되면서 그 범주 안에 내가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수많은 병자의 리스트에 내 이름도 올렸다.

내 마음속 ‘성전’에 쓰인 여러 기억을 끄집어내 보았다. 예수님이, ‘뭐, 어렸을 땐 그럴 수도 있지 허허!’ 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성당을 둘러싼 나와 내 이웃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 웃음이 쏙 들어간다.

이 구절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구절이 다른 복음서에 나온다. 성전 앞 장사치들을 내치신 후 예수님의 행적은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고, 많은 이들을 가르치셨다. 나와 하느님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아픈 이웃들이 치유 받는 곳. 더 나아가 배움과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이 신성한 곳을 바로 그 자신으로 생각하신 예수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 언짢아하고 두려워하며 없앨 궁리까지 하기 시작했을 만큼 예수님의 삶은 46년간 그들 곁을 지킨 성전을 허물어뜨릴 만큼 힘이 있었다. 내 일상의 안락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믿음, 진심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이웃사랑을 외치는 그 위선, 노예에서 해방된 그 날을 기념하지만 정작 그때와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시대정신.

지금도, 그 옛날에도 지도층들은 시민들이 깨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선거를 해서 바꿔보자고 외치지만,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자선을 행하라고 목소리를 드높이지만, 정작 그 주체인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얘기는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 나와 이웃은 모두 하느님을 닮았지만, 말과 글에서만 같은 선상에 있을 뿐이다. 마음속에서 내 이웃들은 늘 내 뒤에 있었다.

변화의 출발점은, 언제나 나 자신이어야 한다. 내가 오늘 만난 예수님이 그러하였듯, 성전이 곧 나와 다름없어지는 그런 행복을 내 삶 어느 때에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그래도 로또보다는 이게 더 확률이 높을 것도 같은데….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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