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톡톡 – 상실의 시간을 견디다 –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싱글맨』

이아람

상실의 시간을 견디다

  •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싱글맨』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웠던 나는 갑작스레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과의 이별이 언젠가는 닥칠 것으로 생각하자 두려워졌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어서 당혹스러워졌던 것이 떠오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감수성이 유달리 예민해지던 사춘기 무렵의 부끄러운 치기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의 공허함과 두려움에 대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사실 삶의 시계추가 조금씩 흐르면서부터 무언가와 이별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원히 나와 함께 머무를 것 같은 사람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감정은 몹시 생경하고도 낯설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 흔히 무언가를 상실해버릴 때의 공허감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삶과 일상, 마침내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잊힐 것이라는 잔혹한 진실이 거기에 있다. 누구도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을 영원히 잃고 만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싱글맨』은 그 상실에 관해 이야기 하는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조지는 58세의 대학 교수이며 16년간 만나던 동성 연인 짐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날 적마다 ‘나는 급히 끝날까 봐 두려워’ 라며 죽음을 생각하고 집안 곳곳에 스며있는 짐의 흔적에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상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친구인 샬럿의 전화를 받고 약속을 거절했다가 후회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헬스클럽을 간다. 조지라는 육체는 그렇게 정신적인 괴로움과는 멀리 떨어져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삶은 무기력하다.

소설 속 조지의 상황은 1962년이라는 사회적 배경, 쿠바에서 미사일이 날아들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분위기―하지만 조지와 케니의 대화 속에서 미사일은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와 함께 맞물린다. 조지는 그 속에서 모든 상황을 냉소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그는 ‘두려움’ 과 공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조지는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성적 소수자라는 두려움, 늙고 혼자 죽어 갈 것이라는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어떤 부분은 아름답게 빛난다. 단번에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 해변을 거닐다보면 문득 발견하게 되는 예쁜 조약돌처럼 말이다. 이 소설에도 그런 장면들이 숨어있다. 바로 조지가 삶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를 만나게 될 때이다. 조지는 짐과 함께 하던 일상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지만 여전히 살기를 원한다. 해변의 바에서 제자 케니와 진지하고 열의에 띤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그런 것을 엿볼 수 있다. “요즘은 무턱대고 친한 척하는데 그건 정말 가식이에요. 사람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는 척하다니. 선생님도 오늘 아침에 소수집단 이야기를 하면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잖아요. 선생님이랑 제가 전혀 다르지 않다면, 서로 뭘 줄 수 있겠어요?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케니의 이 영리한 대답에 조지는 기뻐하며 생각한다. “이 아이는 정말 ‘이해’하는구나.” 라고. 케니의 이 말은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조지가 성 소수자이자 스스로를 ‘소수 집단’ 의 일원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말은 그들 사이에 피어날 새로운 우정을 암시하는 말로 짐작된다. 조지는 짐과의 사별 이후에 진정한 소통을 나누게 되고, 자신과의 대화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케니에게 기쁨을 느낀다.

“벌써 불빛은 아주 멀리 있다. 두 사람을 비추는 불빛은 전혀 없다. 그래도 두 사람은 빛난다. 높이 깔린 안개 너머에서 내려오는 달빛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앞의 파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해변의 어둠은 차갑고 축축하다. 케니는 크게 소리 지르며 옷을 벗는다. 마지막 한 방울 남은 조지의 조심성이 가로등과 순찰차를 의식하지만, 그래도 조지는 망설이지 않는다. 아니, 이제 망설일 수 없다. (…) 조지는 자기 정화의 의식을 치르듯, 한 번 더 비틀비틀 앞으로 나아가서 양팔을 쫙 벌리고 귀가 멍멍한 파도의 세례를 받는다. 파도에 완전히 몸을 맡기고, 생각도, 말도, 기분도, 욕구도, 모두 씻어낸다. 자기 전부를, 인생 모두를 씻어낸다. 그렇게 파도에 몸을 씻을 때마다 점점 더 깨끗하고 자유로워진다. 자신을 덜어낸다. (…) 어두운 언덕에 자리한 집들의 유리창에서는 불빛이 흘러나온다. 메마른 사람들이 메마른 침대에서 메마르게 잠자리에 드는 메마른 집들. 그러나 조지와 케니는 메마름에서 벗어나 있다. 옷을 벗어서 관세로 내고 국경을 넘은 뒤, 물의 나라로 탈출했다.”

이 순간의 조지에겐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짐도, 자신을 괴롭히는 상념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지는 마지막에 잠들기 전까지, “언젠가는 때가 찾아오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현재’ 와 ‘새로운 짐’을 찾기 위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조용히 잠들어 있는 조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독자들에게, “그렇지만 따져보자….” 고 속삭이며 생명의 불빛이 꺼져가는 조지의 모습의 모습을 그린다. 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그 순간 죽음을 맞이하다니. 이토록 허무할 수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행운과 불행이 엇비슷한 차이로 서로 비켜나가는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죽음의 문제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 장면은 몹시 마음이 스산해지는 동시에, 어떤 체념에 빠지게 한다. 조지가 그렇듯이, 나 역시도 상실의 시간 이후로도 계속 해서 살아가고 싶어 할 것이라는 욕망을 들켜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드문드문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그가 끝끝내 무사하길, 완벽한 해피엔딩이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죽음 이후의 삶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톨릭 신자들은 사도신경을 통해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단순한 육체적인 의미에서 부활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삶이 계속 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다. 상실의 시간 이후에도 삶은 계속 된다. 조지의 삶이 사랑을 상실한 이후에도 계속 되었던 것을 떠올려 본다. 우리는 그 죽음을 삶 안에서 만나며, 견디고 준비하며 항상 깨어서 기다리는 것이다. 톰 포드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에서도 마지막의 조지 역을 맡은 콜린 퍼스의 원 대사가 “때는 그렇게 온다. (And just like that it come….)” 이었듯이, 때는 그렇게 온다. 아니, 올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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