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의 시대 읽기 –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려면

김원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려면

– 교회 일 하는 평신도들, 행복한가요?

우연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40주년 기념 심포지엄 뒤풀이에 참석하게 됐다. 그저 맛있는 저녁밥을 푸짐하게 얻어먹을 심산으로 갔던 자리였다. 40주년이라는 단어가 주는 충분히 감개무량한 느낌들과 굉장히 격식 있게 차린 밥상 같았던 기념행사 전반이 다 감동이었다. 늦게야 참석해 정작 가고 싶던 미사는커녕 심포지엄도 아주 살짝 분위기만 느꼈는데도 좋았다. 그 자리의 신부님과 실무자들 대부분을 ‘사진’ 속에서만 봐왔던 내가 선뜻 따라나선 것도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사제단의 40, 길 위의 신부님들 그리고

오랫동안 교회 일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사제단만큼은 보지 않으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교회 매체를 끊어도, 사제단만은 연일 이 나라 각종 뉴스와 신문을 장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세상의 덕담이 아닌 돌팔매와 비난과 각종 악에 받친 ‘딱지’들이긴 했지만, 사제단은 너무나 자주 화제의 중심이 돼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프고 눈물 나는 곳에는 늘 사제단이 함께했다. 득달같이 달려와 촛불을 켜고 미사라는 형태로 사람들을 모으고, 추워도 더워도 천막을 치고 미련하고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

누군가 벼랑 끝에 내몰려 울부짖는 자리가 생기면, 가장 먼저 사제단이 가 있었다. 비겁한 나 대신 누구라도 있어 주었으면 하는 자리라면, 그런 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이미 가서 죽치고 앉아 계셨다. 원래부터 거기 살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원래부터 길바닥에서 밥을 먹고 한뎃잠을 자던 사람들처럼. 로만 칼라만 아니라면 노숙자나 다름없어 뵈는 얼굴로, 눈물과 분노가 뒤범벅된 채 목이 쉬도록 ‘데모’를 하고 또 했다. ‘주류 언론’이 공격하고 사제답지 않다고 욕을 먹어도, 사제의 품위란 고통 받는 사람들 곁에서만 말할 수 있다는 듯이 자리를 지켰다. 그 ‘천막 교회’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교회’나 ‘높은 분’들을 탓하며 무정한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어질 때마다 가슴 밑바닥을 흔들어 놓곤 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끈질기게 질문하면서 한 번만 여기를 돌아봐 달라고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고 때로는 무섭게 호통을 치셨다. 교회가 싫어질 때도, 눈비 맞으며 버티는 길 위의 신부님들만은 눈물겹게 고마웠다.

그런 신부님들을 가진 한국 천주교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심경이 복잡하다. 사제단이 자랑스럽다면, 우리 사회의 아픈 곳이 그만큼 많았고 상처가 깊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어쨌든 나는 40주년의 뜻깊은 저녁상 한 귀퉁이에 끼여 신부님들과 실무자들 속에 섞여 고기를 구워 먹었다. 실컷 맛있게 먹었다. 기쁨과 감회가 있었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신부님들이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인 반가움도 있었다. 그날에서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제단’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실제로 활동하시는 신부님은 얼마나 (터무니없이) 적을 수 있는지. 자유롭게 합류하고 떠날 수 있는 이 조직의 특성 상, 실무를 맡은 몇몇 신부님들은 정말 전국을 누비며 몸이 여럿인 것처럼 분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몰랐던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부님들뿐 아니고, ‘사제단’이 움직일 수 있으려면 활동 실무자인 신도들도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도 그제야 깨달았다. 어이가 없었다. ‘평신도’와 ‘성직’의 구분과 이분법에 대한 반성을 그 어디보다 치열하게 해 온 우리신학연구소의 창립을 함께한 후원회원이면서도, 나도 모르게 성직자들이 ‘얼굴’이고 ‘간판’이며 ‘전부’ 인양 여겨온 건 아닐까. 사제단의 40년과 분주하기 이를 데 없는 오늘에는 분명 평신도 실무자들의 노고와 헌신이 함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뒤에서 묵묵히 자신들의 맡은 일을 해왔다.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사제와 수도자들보다 더 먼저 더 부지런히 뛰어야 했던 많은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교회 일 하는 평신도들, 행복한가요?

얼마 전까지 광화문에서 단식기도회를 진행한 뒤끝인지, (비교적) 젊은 신부님들은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게 역력했다. 어떤 젊은 신부님은 식사 도중에 속이 안 좋다고 한참 나가 계시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참석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보게 되었다. 나로선 안면 있는 분이 별로 없는 자리라, 말하자면 연극 관람할 때처럼 ‘낯설게’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으로 지켜보았다. 엉뚱한 생각을 한껏 곁들여서 말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세 종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아니 세 종류의 집단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연배가 있으신 신부님들은 그날 대체로 미소 띤 얼굴이셨다. 40주년의 그 날만큼은 마음껏 기뻐하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감회가 깊으셔서 오히려 말씀을 아끼셨지만, 온화한 미소에 꽤들 건강해 보이셨다. 아쉬움과 회한과 뿌듯함이 교차하는 신부님들의 표정은 그 자체로 그날의 상징 같았다. 그리고 젊은 신부님들. 어딘지 퍽 고단해 보였다. 먼 곳에서 오셨다가 바삐 다음 장소로 가야 하는 빡빡한 일정과 시간에 쫓기느라 식사도 급히 하기도 했다. 수단과 영대를 하고 계실 땐 몰랐던, 피로하고 푸석푸석한 얼굴이 드러났다. 광화문, 밀양, 강정……. 그 밖의 긴급한 곳에 ‘천막’은 여럿이지만 사실 가는 사람은 정해져 있기까지 한 우리 실상이 보였다. 젊은 신부님들이 쉴 수 있고 ‘여유’가 생기려면, ‘늙어야’ 할 것 같았다. 원로 신부님들의 여유로운 미소와 비교됐다.

다음으로 평신도들. 그들은 정말로 ‘찌들어’ 있었다. 피곤은 일상인 듯했고 표정은 무덤덤했고, 무엇보다 이 자리 또한 ‘일’의 연속인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날 그 자리가 즐겁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끊이지 않는 행사와 일과 회식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는 ‘교회 일’ 혹은 ‘봉사와 헌신’으로 일해야 하는 직장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40주년이라고 해서 특별한 감회를 느끼기에도, 그들은 지쳐 있었다. 내일은 또 어디, 그 다음 날은 또 어디…. 할 일은 늘 산더미인 듯했다. 젊디젊은 그들은, 또래 젊은이들보다 푸석푸석했다. 의외로 생기도 없었다. 나는 정말로 충격을 받았다. 여름의 지난했던 길거리 행사들의 탓이라고만 돌릴 수 있을까. 내가 본 세 가지의 표정에 대해, 그날 이후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요즘 신문에는 ‘빈곤층 고도비만 비율 높다’에 이어 ‘시간 빈곤’을 다루는 기사들이 등장했다. 장거리 출퇴근, 산책로 없는 동네, 패스트푸드, 야근, 회식, 박봉, 주말 근무. 원인은 뻔하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지 기사를 읽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안다. 돈 벌려면 시간이 없고, 직장의 여건은 최소한의 운동 시간과 충전 기회도 빼앗는 쪽으로 끝없이 치닫는 우리의 오늘. 이후 이 얘기를 여러 곳에서 꺼내보았다. 교회 일 하는 평신도들은, 무너진 표정이 되곤 했다. 너무 아픈 데를 찔린 것이었을까. 어쩌면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교회 안의 사람들부터 행복해지는 일이라 생각된다. 늙어야만 주어지는, 하늘나라에서만 주어지는 그런 ‘행복’이 아니라, 조금만 더 여유롭고 생기 있는 일상을 누릴 사소하고 구체적인 방법들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지상에서 맛보고 실제로 주어지는 행복감 말이다.

김원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김원의 리얼몽상’을 연재 중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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