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운동의 영성을 찾아서 – 통합적 평신도 영성 연구를 시작하며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 / 정리 : 이미영

‘평신도 운동의 영성을 찾아서’는 한국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자발적 모임을 통해 보는 평신도 영성의 흐름을 연구한 기획물로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대표적인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영성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비춰 되새겨 보려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50년, 오늘의 평신도

수천 년 동안 닫혀 있던 교회의 문을 세상을 향해 활짝 연 것으로 평가받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 그리하여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로 하여금 “새로운 오순절”이라는 찬사를 불러온 이 공의회는 평신도를 교회의 가장 낮은 직분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실현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바라보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에서 말하는 평신도의 신원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 백성으로 구성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교 백성 전체의 사명 가운데에서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31항)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평신도를 이렇게 정의한 지 50년이 지난 오늘,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는 정말 그러한 평신도로 살고 있는가? 한국 평신도에게서 나타나는 몇 가지 현상을 짚어보자.

거룩함에 대한 열등감

“먹고 살기에 바쁘다 보면 하느님을 잊고 살 때가 많아요. 주일미사를 드리면 한 주의 죄를 다 용서받은 기분이지만, 어쩌다 미사에 빠지는 때면 더 큰 죄의식 때문에 성당에 가기도 망설여지고 영성체도 못해요. 물론 저와 달리 평신도 중에서도 기도생활과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있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부대끼다 보면 그 안에서 죄를 많이 짓잖아요. 평신도들과 달리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께 삶을 봉헌한 분들이니 거룩한 분들이에요. 물론 그분들도 인간이라 간혹 실수하시긴 하지만, 어쨌든 하느님 뜻을 사시는 분들이니 우리 평신도들은 그분들 지도에 잘 따라서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해야지요.”

한국 평신도들에게서 자주 보게 되는 모습 중의 하나는,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세상은 속된 곳이라고 여기는 ‘성속이원론’적인 태도이다. 거룩함을 교회와 연결해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거룩함을 사제와 수도자에게만 돌리고 수동적으로 의존하곤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평신도의 ‘세속적 성격’이 고유하고 독특한 것이라고 강조하며 평신도가 세상 안에서 거룩함을 살아가는 것이 그 소명임을 밝혔지만(<교회헌장> 31항 참조), 세상보다는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을 더 거룩한 것으로 여기곤 한다.

또한, 비슷한 이유로 사제나 수도자를 막연하게 동경하는 것을 넘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도 흔하게 일어난다. 사제와 수도자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거룩하게 생각하는 것은 거꾸로 결혼과 성(性)을 ‘더럽고 천한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지극히 비이성적인 태도지만, 교회 안에서는 이미 자연스러울 정도로 익숙한 ‘문화’가 되어 있는 듯하다. 이는 평신도 스스로 성스러움과 속됨의 이분법 안에서, 죄의식 안에서 살아온 결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앙에 확신하지 못하게 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가부장적이고 수직적 교계제도와 성직 중심적 교회 질서는 이런 평신도의 잘못된 신앙관을 강화시키고 고착시킨다.

신앙 따로, 삶 따로

“본당에서는 주일미사도 빠지지 않고 단체 활동도 열심히 하는 분인데, 동네에서는 그분 별로 좋게 보지 않아요. 지난번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거기서 종업원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막 고함치며 소리 지르고 그러더라구요.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마치 모든 사람을 자기 아랫사람처럼 부리고 함부로 대하거든요. 그분이 묵주반지 끼고 다니는 거 볼 때마다 천주교 신자라는 걸 그렇게 드러내는 사람이 저러나 싶어 부끄러워요. 사실 뭐 저도 평소에 신자답게 살지는 못하지만, 남들보다 잘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죠.”

  교회와 세상의 삶을 분리하는 ‘성속이원론’이 몸에 밴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는 거룩함을 찾지만, 성당 문밖을 나서는 순간 복음을 잊는 경우가 많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평신도가 기도나 전례 등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세상 안에서는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를 바 없는 가치관과 삶을 살아가는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곤 한다. 마치 교회 밖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듯이.

실천적 무신론은 ‘무늬만 신자’라는 말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생활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쳐 30% 이상의 사람들이 믿는 종교로 성장했지만, 그리스도교 신자가 늘어났다고 우리 사회가 더 복음화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특히 도시 교회에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산층 신자들이 많아졌음에도, 나눔이나 희생적 봉사를 하는 이들을 찾기 어렵다. 삶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노력보다는, 신앙이 하나의 취미생활이나 장식품처럼 부수적으로 여겨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개인적인 영성에 치우침

“저는 매일 새벽마다 가족을 위해 기도해요. ○○수도회에 후원금을 보내면 평생 미사를 드려준다고 해서 그것도 신청했어요. 작년엔 우리 아이가 고3이라 성당에서 하는 수험생 백일기도에 빠짐없이 참석해서 기도했지요.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인지 애가 원하는 대학에 다행히 합격했어요. 감사한 일이죠. 이렇게 항상 기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다 보면 다 이루어져요. 바로 응답이 오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구나!’ 싶어 더 열심히 청합니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예수님 말씀처럼 매일 미사를 빠짐없이 드리고, 9일 기도를 계속 바치고, 밤샘 성령기도회에도 나가는데, 결국은 들어주시더라고요. 기도를 열심히 할수록 은총을 많이 받는 거 같아요.”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의 입교 동기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이다. 미사나 기도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 하고 또 그런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일은 일종의 수행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부정적이기보다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라는 내적 갈망은 종종 세상 안에서 개인(가정)의 안녕과 성취를 바라는 개인적 욕망을 충족하는 데에만 한계 지음으로써, 우리 주위를 돌아보게 하는 힘을 잃게 한다. 곧, 고통 받는 이웃은 결코 ‘나의 삶’으로 들어 올 수 없는 영원한 남으로 남게 되는 이기적 신앙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 지속해서 노출되거나 익숙해지면, 개인적인 지향을 넘어 공동체적 신앙으로 나아가자는 요청에 대해 형식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외면하고 때로는 적극 반대하기도 한다.

형식적인 복음나누기와 전례

“성경을 매일 읽지는 못하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은 복음나누기를 해요. 반모임에서도 하고 어떤 때는 단체회합에서 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복음나누기를 하라니까 하기는 하는데, 쉽지는 않아요. 할머니 중에는 간혹 한글을 익히지 못하는 분들도 있어서 돌아가면서 읽는 걸 부담스러워하고, 또 소리 내서 읽을 때 떠듬거리면 창피하니까 싫어하더라고요. 우리 세대는 자기 생각을 나누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말 잘하는 사람들만 주로 얘기하고, 매번 비슷한 얘기니까 별로 감동도 없고 형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또 반모임에서 이런저런 생활 얘기 나누는 건 좋은데, 거기서 누구 뒷말하고 그런 게 새어 나가서 분란이 생기기도 해요.”

현대 영성가 로날드 롤하이저는 “오늘날 서구사회는 교회에 나가는 사람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영성에 관심을 갖는 사람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면서 “현대 사람들은 신앙은 원하지만 교회는 원하지 않으며, 의문들을 갖기를 원하나 해답은 원하지 않으며, 진리는 원하지만 순종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사람들을 “새로운 가치로의 복원을 꿈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반대쪽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에 나가는 신자 중에 많은 이들이 교회는 원하나 신앙은 원하지 않고, 해답은 원하나 의문은 원하지 않고, 전례는 원하나 경건함은 원하지 않고, 순종은 원하나 진리는 원치 않고 있다. 복음 나눔과 전례에서 의미를 찾는 노력은 사라지고 형식화되는 흐름은 이러한 현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경계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

본당 신자들은 세상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자신과 가족의 구원을 위한 기도만 해요.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세상이 온통 불의와 고통으로 가득한데, 그걸 외면하고 기도만 하면 뭐합니까? 세상과 담을 쌓은 본당은 답답하기만 해요. 성당은 점점 크고 화려해져 가는데, 가난한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은 교회에서 환영하는 것 같지도 않고 있을 자리조차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을 교회가 감싸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교회는 왜 필요한 건지 모르겠어요. 권세와 재력 있는 사람들만 대접받는 건 사회나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런 본당의 모습에 염증이 나요. 저는 그래서 본당에는 안 나가요. 가끔 거리미사를 가기는 하는데, 제 생활이 있으니 자주 가지는 못하죠.”

한국 천주교회는 70-80년대 한국 사회의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역사가 있었기에 사회적 신뢰도가 높은 편이고, 그 덕분에 80-90년대 신자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고 평가받는다. 그 당시 입교한 이들 중에는 교회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기대와 갈망이 큰 편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유로 입교했던 신자들이나 젊은 평신도 중에는, 교회가 신앙의 문제에만 몰두하고 사회참여에 미흡한 모습을 보일 때 실망하고 냉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최근 들어 교회운영이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이나 양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모습,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병원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규모가 커지고 기업화되고 비정규직 등의 노동문제를 외면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제도교회에 희망을 찾지 못하고 점점 더 제도교회와 멀어져 마침내는 발을 끊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교회와 세상 가운데 있는 평신도, 그 통합적 영성을 찾아서

이처럼 오늘날 한국의 평신도들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은 평신도 영성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평신도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세상 안’에서의 평신도의 소명을 특히 강조하였고, 그러한 소명을 살기 위해 평신도 스스로 ‘성화’되어 거룩함을 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곧, 신앙생활을 통해 거룩함을 지향하며, 그 성화된 삶을 세상 안에서 몸소 실천하라는 것이다. 평신도의 영성은 바로 이런 ‘세상 안에서의 거룩함’을 살아가는 길일 것이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안에서의 거룩함’을 살기 위해서는 교회와 세상 가운데서 균형 있고 성숙한 영성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개인이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세상과 이웃,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해 나가는 데에서 그 깊이와 성숙도가 가늠된다고 할 수 있다.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적극 이해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그 핵심 역할을 하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직분, 특히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강조하였다. 평신도 사도직 활동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세 질서를 복음 정신으로 변화시키고 완성하는 것도 포함한다. 최근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가톨릭 사회교리를 배우도록 요청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평신도 영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이미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평신도 사도직 활동들은 그러한 영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러한 평신도 사도직 활동들이 마치 개인 신심활동으로만 인식되며 세상 안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이제민 신부는 우리나라의 훌륭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들이 신심단체로서만 머물고 있는 이유를 두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자신을 쇄신하지 못한 데 있다고 에둘러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영성을 새롭게 보는 작업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

이번 연재는 우리신학연구소의 연구 주제 중 하나인 ‘평신도성 정립’이라는 중심 의제를 수행하기 위한 기초 연구 작업으로,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대표적인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영성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비춰 되새겨 보려 한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대표적인 평신도 사도직 활동으로 손꼽히는 레지오 마리애, 성령쇄신봉사회, 성서모임, ME/선택, 꾸르실료, 마리아사업회(포콜라레), 연령회 등을 중심으로 이러한 평신도 사도직 활동이 어떤 평신도 영성을 지향하는지, 특히 개인 신심의 차원을 뛰어넘어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측면이 있다면 이를 깊이 탐색하여 통합적 영성의 시각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또한, 한발 더 나아가 이러한 평신도 운동의 영성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 실천적인 삶을 사는 신자들을 심층 면접하여, 통합적인 평신도 영성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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