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가정과 교회, 세계주교회의 평가와 전망

조민아

(sexuality): 포기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

성(sexuality). 우리에겐 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직도 불편하고 부끄럽고 조심스럽다. 교회의 성교육에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모두 안다. 하지만 당연한 듯 이중적인 잣대를 안고 살아간다. 가장 쉽게 사람을 정죄하는 기준도 성에 관한 규범들이다. 미혼모들, 동성애자들, 이혼자들에게, 교회는 이웃이 되기를 거부한다. 성에 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은 좁혀질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생각이 다르다 싶으면 말을 접는다. 그리고 기도를 빙자로 뒤에서 험담한다. 이렇게 한 주제를 놓고 감추고 물어뜯고 관계를 끊고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이제껏 지탱해 온 교회의 가르침이 재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시노드 임시총회로 촉발되고 있는 성에 관한 토론들이 반갑다. 내년 정기총회에서 어떻게 입장이 정리될지 예측하는 것은 섣부르지만, 적어도 물꼬는 터졌다. 가정과 성에 관한 논의에서 시작되었지만, 시노드의 결정이 가져올 파급은 이 사안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변화하는 세상과 어떻게 호흡을 맞추어 나갈 것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비전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이 중요한 시기를 성찰과 성숙의 계기로 삼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까?

다른 모든 교리와 신학의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성 윤리를 논의하고 재구성하는 데 지침이 되어야 할 자료는 성서와 전통이다. 그러나 첫발을 떼기도 쉽지 않다. 성에 대한 성서와 전통의 가르침이 보편적이고 일관된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성에 관한 성서와 전통의 가르침, 문자 너머 맥락도 함께 보자

구약성서의 저자들은 기본적으로 성을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선하고 아름다운 선물’로 이해했다. 이들이 성을 삶을 풍성하고 윤택하게 하는 근원 중 하나로 간주했다는 것은 아가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낯 뜨거우리만큼 절절한 사랑의 고백으로 채워진 아가서를 민족의 가장 큰 축제였던 과월절 전례 때마다 낭독했을 만큼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구약성서에서 성은 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와 항상 연결되어 있다. 생육과 번성의 계기가 되는 성은 하느님의 축복이지만, 잘못 사용할 경우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결정적인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성은 언제나 결혼이라는 안전장치를 동반한다. 성에 관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공동체와의 관련성이다. 유다 민족이 처한 특정 정치적 상황에 어떻게 결부되느냐에 따라 성은 축복의 도구가 되기도 했고, 징벌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즉,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보편적으로, 일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구약의 성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약성서는 유다인들의 성에 관한 인식과 결혼관을 전승하지만, 그리스‧로마라는 전혀 다른 문화권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이렇게 다른 가치관과 윤리가 공존하던 시대에 살던 이들이다. 성에 관한 다양한 인식과 태도들을 가늠하여 보편적이고 일관된 성 윤리를 정립해 내는 것에 그들이 관심을 가졌을까? 아니다. 신약성서 저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곧 도래하리라 믿었던 주의 재림과 심판에 대비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때를 예비하는 것이었다. 재림과 심판이 지연되던 상황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야 했던 바오로 사도에게조차 성 윤리는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주 관심사는 공동체의 회복과 질서 확립이었다. 따라서 신약성서를 통해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성에 관한 체계적인 이해를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약 성서와 마찬가지로, 맥락을 떼어 놓은 채 문구만 갖고 신약성서의 성 윤리를 구상하려는 시도는 치명적인 오해만 낳을 뿐이다.

가톨릭 전통이 보유해 온 성에 관한 인식에 큰 획을 그은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이다. 마니교 교세가 크게 성장하던 4세기에 살았던 그는 주로 마니교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초기 신학적 입장을 확립했다. 마니교 교리의 특징은 이분법적 세계관이다. 그들은 물질과 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인간의 육성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들을 혐오하도록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세계관을 비판하며 성의 재생산적 기능이 갖는 실질적인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신의 축복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우월성 또한 입증해야 했던 그는, 결혼과 재생산의 목적 이외 성에 관한 모든 욕망과 행위를 죄로 규정하여 악한 것, 억제해야 할 것이라 가르쳤다. 통전적인 성 윤리를 구상하는 것이 주된 목적은 아니었으므로, 그의 성 인식은 다분히 편협하고 한계가 있다. 타부와 금기와 죄성을 강조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들은 수세기를 거치며 반복되고 과장되고 강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안타깝게도 성에 관한 인식에 있어 가톨릭 전통은 시대와 삶과 신앙을 역동적으로 연결시키며 하느님의 말씀을 동시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실패했다. 교리에 갇히고 규범에 갇혀 전통주의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성서와 전통을 살아있게 하는 힘: 경험과 식별

이렇듯 성서와 전통에서 제시하는 성에 관한 인식은 해당 시대의 상황과 저자들의 특정한 의도와 함께 설명되어야 한다. 맥락을 떼어내고 문자만 짜깁기하여 보편적이고 일관된 가치관인 양 둔갑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성서와 전통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어 신자들이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성에 관한 일종의 지침서를 작성하겠다는 시도는 포기하는 게 좋다.

그러나 성서와 전통은 여전히 가톨릭 성윤리 구상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이 중요한 자료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이다. 역사 속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기록하고 전승한 것이 성서와 전통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통해 하느님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식별하는 통로 또한 인간의 경험임을 깨달을 수 있다.. 신앙인들의 다양한 경험은 성서와 전통의 권위를 위협하는 요소가 아니다. 경험을 무시하고 성서와 전통의 문자적 독해에만 의존하여 성윤리를 구성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끊임없이 소통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소외시키는 행위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언어다.” (Rabbi Menachem Mendel of Rymanov) 인간의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삶 속에 임재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성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모두 잘못되었다거나 완전히 쇄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책임한 성관계가 만연하고, 낙태에 대해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고, 정당한 이유도 없이 배우자와의 평생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 쉬워지며, 섹스산업이 암암리에 주요 산업의 하나로 떠오르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나는 생명과 사랑의 소중함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여전히 옳다고 믿는다. 교회는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윤리적 기준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정죄이전에,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자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그들을 배려해주며 다독여 주어야 할 책임도 있다.

이러한 까닭에, 가톨릭 성윤리를 성찰하고 숙고하는 이 시기가 단순히 어떤 입장이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는 차원에 머무르기보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되묻고 반성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수천 년을 가로질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앞으로도 지켜져야 할 그리스도교의 근본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차별 없이 주어진 삶의 원칙이며, 성윤리 구상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할 전제이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언은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모든 질서에 맞서는 저항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자체로 존엄하게 여겨질 세상을 바라는 간절한 호소다. 가톨릭 윤리학자 리사 카힐 (Lisa S. Cahill)이 표현했듯, “차별과 폭력의 질서를 자비와 공감과 평화의 질서로 전환함으로써, 또 그와 더불어 변화하게 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경험한다(Lisa S. Cahill, Sex, Gender, and Christian Ethics,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21). 차별과 폭력을 양산하는 근거가 아니라, 자비와 공감과 평화를 실현하고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비전—그것이 미움과 냉대와 소외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적 기준이 아닐까?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생각과 글과 삶이 일치된 신학자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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