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돋보기 – 교회로의 환대, 가정시노드를 통한 동성애 문제를 바라보다

정중규
교회로의 환대
, 가정시노드를 통한 동성애 문제를 바라보다

시노드 폐회, 긴 토론의 시작

교황 폐회 연설, 진솔한 대화 속 일치 강조

(기사 전문: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394)

편집국 |editor@catholicnews.co.kr

교황

▲ 이번 시노드에 참여한 추기경, 주교와 대화하는 교황. (사진 출처=바티칸 라디오)

가정을 주제로 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 제3차 임시총회가 10월 19일 끝났다.

시노드의 분위기와 표결의 내용은 마지막 회의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연설에서 일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우선 이번 시노드가 “함께 가는 길(여행)”이라는 “시노드”(synod)의 본뜻을 충실히 실현했다고 평가했다. 참가자들이 서로 대립도 있었지만 이 또한 진솔한 대화의 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번 시노드에서 보인) “이른바 전통주의자”와 지식인들의 “냉담한 완고함”을 강력히 경고했다. “글로 쓰인 단어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놀라움의 하느님’, 성령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상처를 치료하기 전에 붕대부터 감으려는” “공상적 사회개혁주의자”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 “진보주의자”에 대해서도 주의를 줬다.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지 않고

증상만 다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도 악마의 유혹을 받았는데, 그 제자들이 이런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다독였다.

그는 또한 교황직에 대해서도 주교들과 연관해 말하고자 한다면서, 교황의 의무는 교회의 일치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교황의 의무는, 사목자들에게 그들의 첫째 의무가 양떼를 돌보는 것, 즉 잃어버린 양을 찾아 환대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점에서, (이번 시노드에서) 자기는 사목자들에게 밖으로 나가 잃어버린 양떼를 찾으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환대하라고만 말하는 실수를 했다고 고백했다.

이번 시노드는 10월 13일에 발표됐던 중간보고서에서는 동성애자 등에 대한 “환대”(welcome)를 언급해 서구 언론을 놀라게 했지만 보수파들이 언론을 통해 강력히 반발하면서 결국 결말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서방의 유력 언론들은 찬성이 2/3에 2표 모자랐지만 과반수를 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내년 10월에 다시 같은 주제인 “가정”을 주제로 열리는 시노드 정기 총회를 기다리는 분위기다. 그간 교회 안에서는 더욱 활발한 토론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교황에 따르면, 이번 시노드 보고서는 각 나라 주교회의에 “의안집”으로 보내져 지역별 토론과 의견 수렴을 거친 뒤 내년 시노드 정기 총회에서 다시 다룬다. 그는 연설 끝 부분에서 “이번에 제출된 의견들을 더 다듬고 구체적 해결책을 찾아서, 여러 가정을 에워싸고 질식시키는 많은 장애에 해답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참석자들을 축복하고, “고맙습니다. 편히 쉬세요, 네?”하면서 말을 맺었다.

교황의 연설을 보면, 이번 시노드는 구체적 열매를 맺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쟁점을 드러내고 솔직한 의견을 교류하며 접점을 모색하는 예비회의로서는 충분한 구실을 한 듯하다.

대림시기이다.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때’이자 구세주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강생의 신비를 준비하며 깨어 기다리는 ‘때’이기도 하다. 그분은 왜 오셨는가. 차별과 배제와 소외가 키워드인 장애인운동을 하는 내겐 늘 그 차별과 배제와 소외를 없이하신 분으로 다가온다. 그 분 둘레에 모인 갈릴래아 사람들의 얼굴을 보라. 세리, 창녀, 여성, 장애인, 가난한 이들, 그 시대 유대 사회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못해 울타리 밖에서 헤매며 사람으로 대접 받지 못하던 밑바닥 인생(Am ha’araz) 민중(Ochlos)이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난도 공연한 말은 아니었다. 고단한 삶에 쫓겨 지키지 못한 율법 때문에 죄인 취급당하는 딱한 그들을 그분은 무조건 무죄 방면시켰는데, 요즘으로 보면 ‘생계형 범죄자’에 대한 사면행위였다. 하느님 나라는 잃어버린 양들을 되찾음으로 실현된다고 보셨기에 몸소 소외된 이들을 찾아 나섰던 그분이다.

오늘 이 시대 그 분께서 다시 오신다면 누구를 찾아 나설까. 일반사회보다 교회에서 더 혐오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동성애자들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은 분명하다. 「가톨릭 교리서」의 “동성애는 성행위를 생명 전달로부터 격리한다. 그 행위들은 애정과 성의 진정한 상호 보완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성의 성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될 수 없다”는 대목을 보라. 최근 ‘차별금지법안 발의’와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움직임에 맞서는 ‘WCC반대운동연대 및 로마가톨릭·교황정체알리기운동연대’ 등 일부 개신교 단체들의 동성애 반대운동 그 폭력성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동성애는 성적지향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방임적 퇴폐를 초래할 위험행동이며, 창조 질서를 해치고 가정과 사회질서에 큰 혼란을 야기하여 인류 멸망을 초래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키는 죄악이다. 동성애차별금지법은 그리스도교를 말살하려는 사탄의 간계다”라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 주교 대의원대회(주교 시노드)에서 동성애 문제를 의제로 삼은 것은 대단히 의미 있었다. 교황은 이미 지난해 7월에 “동성애자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각별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물론 교황이 공론화한 동성애 담론은 보수파의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가톨릭교회가 동성애자에게도 폭넓게 문을 열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던 중간보고서와 달리 최종 보고서는 그 내용이 삭제 당했다. 최종 보고서 투표를 앞두고 ‘동성애자도 은사(gifts)가 있으며, 가톨릭 사회에 헌신할 자격이 있다’는 문구를 ‘동성애 성향이 있는 남녀를 존중하는 태도로 환대해야 한다’로 수위를 낮추며 교황청은 보수파와 타협하려 했지만, 이 문구를 최종 보고서에 넣을 것인가를 묻는 투표는 118명 찬성에 62명 반대로 전체 참석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최종 보고서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소극적인 언급에 그쳤으며, 결혼은 남녀만 할 수 있다고 확실한 선을 그었다. 하지만 3분의 2 이상 찬성 조건은 채우지 못했지만, 절반이 훨씬 넘는 참석자가 찬성했다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가 아닐 수 없다. 교황청 대변인의 표현대로 “최종 보고서는 끝이 아닌 시작이며 내년 10월 열리는 시노드에서 진전의 여지가 있으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런 비호감(배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물론 성경(동성애자 단죄의 근거로 ‘전가의 보도’처럼 드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도 사실은 동성애가 아닌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은 도시의 사악함 때문에 하느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라고 보는 신학자들이 있다)과 교리를 내세우지만, 이런 혐오와 배제가 종교 신념화된 데엔 앞서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언급한대로 “동성애가 성행위를 생명 전달로부터 격리시킨다”는 것, 곧 종족보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존과 관련된 까닭에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반감이 그토록 거세고 뿌리 깊은 것이니, 그 뿌리는 아마 다산의 여성을 여신으로 숭배까지 했던 원시시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지구촌 전체가 오히려 인구과밀로 몸살 않는 이 시대에 있어 그런 집단 무의식의 퇴행적 정서는 이제 벗어던질 때도 되지 않았는가! 종족보존이 꼭 육체적 유전자를 통해서만 이뤄질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에 와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대한 문제는 결국 차별과 배제와 소외의 문제 곧 인권 차원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교회라면 당연히 ‘예수라면 어떠하셨을까’를 성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당시에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당신 선교의 전부인양 하셨던 그분의 자세를 생각해 본다면, 거기에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길을 가려 한다면 이 문제는 결국 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인간 기본권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 사회적이든 문화적이든, 또는 성별, 인종, 피부색, 사회적 신분, 언어, 종교에서 기인하는 차별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극복되고 제거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는데, 여기에 동성애자가 제외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누가 무지개 깃발을 짓밟는가』의 저자 스프링클 교수는 흑인 노예 수송, 나치의 유대인 학살, 마녀 사냥과 종교재판 등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배제도 결국 사라졌는데, 이데올로기로 배제당하는 최후의 특정 그룹일 동성애자 문제 역시 해결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무릇 인류 인권발달사가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하나 둘 받아들이는 것 외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젠 더욱 더 적극적이고 성숙한 자세를 지닐 필요가 있다.

한국가톨릭교회의 진보적 대안언론 《지금 여기》는 그동안 동성애와 동성애자 문제를 대단히 열린 자세로 다루어왔다. ‘동성애’라는 검색어를 치니 관련 기사가 159개나 검색될 정도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이 문제에 접근해 왔었다. 특히 술, 담배, 녹차, 파운데이션, 수면제, 묵주. 이렇게 여섯 친구를 지녔다며 스스로 육우당이라 했던 19세 가톨릭 청년 동성애자, 성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와 가톨릭교회의 차가운 편견과 멸시, 소외와 차별을 견디다 못해 지난 2003년 4월에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육우당 관련 기사들, 특히 2013년의 10주기 기사는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지금 여기》는 그밖에도 서울학생인권조례, 가톨릭청년회관의 동성애 단체 ‘소수자 주거권 확보를 위한 틈새 모임’에 대한 대관 거부, ‘성 소수자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선언문’이 발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 주교 시노드 등 관련 사건들에도 발 빠르게 기사화하였다. 단지 스트레이트 기사를 넘어 이 문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기획기사가 보고 싶었다는 아쉬움은 늘 있었다.

동성애와 동성애자 문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되찾음으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된다고 보고 몸소 소외된 이들을 찾아 나서 받아들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적 모범에서 살펴볼 때 그리스도교가 궁극적으로 껴안아야 할 교회 신원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백 마리 양들이 함께 기뻐하기 위하여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들판에 놔두면서까지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온 들판 헤매는 그 마음이 예수 마음, 그리스도교의 바탕이다. 그런 측면에서 동성결혼식을 올렸던 가톨릭 신자 김조광수 감독이 끝내 성공회로 옮겨갔다는 뉴스는 뼈아프다.

이젠 사회가 교회를 앞서가는가.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 Pew Research Center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동성애 수용 증가율이 조사대상 39개국 중 가장 높게 나왔다고 한다. ‘장애도 개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은 개성이다. 창조주께서 모든 피조물을 보시기에 참 좋았다 하셨기 때문이다. 창조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모두가 더불어 사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데 교회도 동참해야 할 것이다. 마침 한국가톨릭교회에서도 이번 주교 시노드의 논의 내용을 바탕으로 각 교구 차원에서 성 소수자 포용문제를 다룰 예정이라는데, 부디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되기를 바란다.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이자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으며, 교회 쇄신에 뜻을 두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를 뜻있는 이들과 창간하고 편집위원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2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