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단짝_길거리 본당의 지킴이들

이아람

길거리 본당의 지킴이들

–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한국 교회는 11월 16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낸다. 평신도란 누구일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평신도를 ‘듣고 따르는 교회’라 하여 수동적인 면을 강조했지만, 공의회를 계기로 “평신도를 통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따르며, 그것을 실천하는 사도이자 복음사가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한국천주교회의 평신도에게 2014년은 뜨거운 해였다. 많은 평신도가 길거리와 팽목항 등 어둡고 소외된 곳에서 함께 했다.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이하 가톨릭 행동) 역시도 ‘길거리 본당’에서 많은 신자와 그 시간을 보냈다. 평신도 주일을 맞아, ‘길거리 본당’이라는 한 공동체에서 머무르고 있는 가톨릭 행동 구성원들을 만나보았다.

가톨릭 행동은 지난해 9월 ‘천주교 평신도 1만인 시국선언’을 계기로 조직되었다. “교회의 쇄신과 가난한 이웃과의 연대, 사회적 불의에 대한 예언자적 활동, 그리고 갈라진 민족의 평화와 화해를 기도하고 실천하고자 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연대’의식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아픈 이들이 머무르고 있는 광화문 광장, 즉 세월호를 기억하는 그곳에서도 실천되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에는 봄 소풍을 떠났던 아이들을 기억하는 작은 천막들이 모여 있다. 가톨릭행동의 보금자리도 여기에 있다. 천막을 걷고 들어가자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란색 목도리와 실 팔찌를 뜨는 손놀림들이 분주하다. 함께 뜨개질하며 까르르 웃기도 하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퍽 다정하다. 서로를 길거리에서 만난 인연이라고 소개한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저 아는 지인분들이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옆에서 같이 참여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가톨릭 행동에 와 있더라고요. 어떤 행동을 취하고 싶어서 했던 건 아니었어요. 교회 안에서 했던 활동들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죠. 제가 했던 교리교사나 성서 모임봉사 같은 것도 그렇고요. 그런 내용이 전반이었다면, 그래서 교회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면 가톨릭 행동 같은 경우에는 세월호 같은 문제들, 어떻게 보면 세월호가 교회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인데, 우리가 배워왔던 그 교리가 분리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과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인 것 같아요. 그런데 꼭 단체가 아니더라도 그런 부분이어서 좀 더 넓어진 느낌이 들어요. 시야도 넓어지고, 실천할 수 있는 부분에서 도움도 받고 있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 같아요.”_임수아 (젬마)

임수아 씨가 이런 활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우연찮은 기회를 통해서였다. 그전에는 이런 가톨릭 단체에서 활동해 본적도 없었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있었노라고 말했다. 강정이나 밀양, 쌍용자동차 문제 같은 것을 말로만 전해 듣고 마음이 무거운 상태였는데, 마침 예수회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기도 모임에서 만난 여대생이 물꼬를 터주게 되었다. “그 친구가 강정에 가보고 싶은데 무섭다고 말하더라구요. 제가 그 친구보다 연배가 있음에도 그런 생각을 못 하고 있었던 것이 좀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함께 가보자고 해서 둘이 가게 되었죠.”

밀양 송전탑 같은 경우에도 지인이 밀양 가르멜 수도원에 있기에 그런 이야기가 들려 올 때마다 그분의 터전이 걱정되었다. 10월, 3천 명 가까이 경찰 인력이 투입된다는 소식이 기가 막히고 황당했다고 한다. 운이 좋게도 마침 휴가기간과 맞물리게 되어, 몇 개월에 친구와 약속했던 경주 여행이 끝나고 임수아 씨는 홀로 밀양으로 향했다. 127번 움막에서 할머님들과 지내면서 밀양 송전탑 사건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밀양에서의 체험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리고, 또 가톨릭 행동의 구성원들을 비롯한 이런저런 인연을 만나면서 사람들을 아는 범위가 넓어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곳에 소속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 것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입견으로 다가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혼자서 활동하기에는 너무나 거칠고 힘든 부분이 있지만 가톨릭행동 안에서는 도움도 받을 수 있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즉 함께한다는 연대 의식이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행동 천막 밖에는 ‘누구든지 들어오세요! (함께해요)’라는 종이가 붙어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미사가 시작되는 여덟 시 전까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고났다. 미사 때는 옆 천막인 원불교 천막을 빌려 공간을 쓰기도 한다. 크게 보자면 이 광화문 광장에서만큼은 서로가 믿는 종교나 나이, 직업을 불문하고 허물없는 관계로 함께 하는 ‘동료’인 것이다. 이들의 파트너십에 관해 묻자, “오다가다 보고 싶으면 들리고, 생각나면 들리곤 해요. 이런 게 저희의 파트너십이죠, 뭐.” 라는 답이 돌아온다. 실제로 가톨릭행동의 천막에 들리는 사람 중에는 신자가 아닌 이들도 참여해서 기도를 드린다.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노란리본공작소에는 예비 신자인 분도 있다고 한다. 가톨릭행동 천막에 모인 이들은 목도리와 더불어 노란 알로 알알이 엮은 작은 묵주를 만들고 있다. 처음에는 노란 리본을 여기저기에 많이 나누어주었는데, 막상 달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천주교 교우들은 대개 묵주는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고 교우만이라도 세월호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묵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묵주에 대한 호응이 좋아서 재료비를 후원해주시는 고마운 분들도 생겨났다. 추워 져가는 날씨의 유가족분들에게 드릴 목도리를 뜨기 시작한 것도 금세 퍼져서 실을 보내주는 분들도 있고, 목도리를 떠서 직접 보내주는 분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묵주나 목도리를 만드는 아주 작은 일부터도 도와주고자 하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각자의 삶의 자리를 지키면서 세월호를 기억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가톨릭행동의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가정이 있고, 또 각자의 일터가 있지만, 어느새 이 천막으로 삼삼오오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전영미 씨는 근무를 마치고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 상태로 이곳에 오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틀에 한번 꼴로 참석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길 위에서 미사가 어떻게 집전이 되는지 궁금증이 생겨서 오게 되었는데 거의 빠짐없이 오다 보니 가톨릭행동에 소속이 되었고, 지금은 미사에서 전례도 맡고 있다. 아무래도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면 큰 실수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거리 미사는 외부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날씨의 영향도 큰 변수고, 때로는 그 날 전해지는 뉴스의 소식에 따라 분위기도 많이 다르다. 그동안 길거리 미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화를 들려달라고 부탁하자, 전영미 씨는 ‘평화의 인사’을 나누는 순간을 꼽았다. 가톨릭행동의 미사의 평화의 인사는 보통 악수를 하거나 묵례를 하는 기존 전례 방식과는 달리 조금은 새롭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자그만 잔에 담긴 물을 조금 묻혀 서로의 이마에 십자성호를 긋는 예식을 했다. 대한문에서 미사를 드리던 때는 서로를 포옹해주며 ‘평화의 인사’를 나눴는데, 전영미 씨에게는 이것이 무척 인상 깊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가톨릭행동과 길거리 미사는 마침 신앙생활을 새롭게 하려는 찰나에 만난 인연이었다. 하지만 이런 열정적인 활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인들도 있었다.

“제가 노란 리본 목걸이를 하고 직장에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도 ‘그건 좀 그렇다….’ 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제가 계속 대한문 미사에 오는 걸 그곳을 왜 가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고요. 그럴 때는 화도 나고 이해를 못 하기도 했는데, 점차 이해하게 됐어요. 퇴근하고 부득이하게 길거리 미사에 오지 못하면 마음이 참 불편하기도 했구요. 제 직장이 강남에 있는데요. 비가 아주 많이 왔던 날이었는데 차가 막혀서 부랴부랴 미사에 도착하고 보니 어느새 미사가 거의 다 끝나있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들이 잘 왔다고, 와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여름 때 한창 에너지가 바닥이었을 때 이곳을 통해 위안을 많이 받았거든요.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어떤 신부님께서 몸도 좀 생각하면서 하라는 말씀을 해주시면서, 길게 갈 싸움이니 여정을 길게 보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네 에너지가 100%라면 80%는 소진하고, 이십 프로는 남겨두었다가 쓰라는 조언도 주셨고요. 하하.”_전영미 (요셉피나)

가톨릭행동에서 드리는 미사는 멋진 제대와 깨끗하고 밝은 조명, 더울 때는 시원하고 추울 때는 따뜻한 아늑한 공간은 아니다. 그러기에 더 어려움도 많고,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벽들이 참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모인 이들은 모두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에 본당을 두고 있는 민혜경 씨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정말 아프고 고통 받는 현장에서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신앙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요즘은 평일 미사를 밖에서 드려요. 전에는 너무나 편안하게, 깨끗하고 높은 천장이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곤 했는데 정말 거룩했죠. 그렇지만 그것이 정말 얼마나 나만의 신앙생활을 했었던가를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어디에서 하는 봉사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봉사이고 봉헌이지만, ‘예수님이 여기 계신다면 깨끗하고 아늑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그런 성당에 계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얼마만큼 더 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는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달렸지요. 그렇지만 살아있는 한, 신앙생활을 가능하면 아픈 이, 고통받는 이, 벼랑에 몰린 이들이 있는 곳에서 저의 신앙을 나누고 싶어요.”_ 민혜경 (아녜스)

어려운 이들의 곁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함께 십자가를 나누어지는 것. 그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2,000년 전 청년 예수는 그 십자가를 직접 나누어지기 위하여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상처를 직접 어루만지고 껴안았다. 가톨릭행동은 ‘생활 속에서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살아내며 실천하고, 함께 격려하는 연결망이다. 그 촘촘한 연결망을 통해 이들은 계속 청년 예수의 모습을 살아내고, 기억하며 그것을 각자의 자리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라는 복음 말씀을 출범 선언문에 적었던 그 마음처럼 이들은 그 어둡고 소외된 곳에서 서로를 향한 등불을 밝히고 있을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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