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도대체 넌, 나에게 누구냐?

배안나

도대체 넌, 나에게 누구냐?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 요한 1,6-8.19-28.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았던 2014년도 어느새 마지막 달이다. 숨이 가쁘다.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다. 당사자도, 지켜보는 사람도 힘들었다. 동화처럼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상을 받아야 마땅한데 세상은 동화를 마음껏 비웃는 것 같았다. 악 그 자체로 느껴지는 일들, 그릇된 증언들, 정의를 저버린 법의 판결을 지켜보며 우리는 얼마나 절망하고 또 절망했던가. 증언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긴 한 걸까? 말이 점점 말 같아지지 않은 이때, 세례자 요한의 드높은 목소리가 가슴을 친다.

광야라는 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구절을 들었을 때 하늘과 땅 사이, 그곳에서 혼자 절규하듯 외치는 한 사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소명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의 증언을 통해 모든 사람이 빛을 따르도록 하는 것. 그러나 그는 절대 빛이 될 수는 없다. 증언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빛”을 믿게 되고, 사람들은 그 빛으로 이끌어주는 그를 보며 분명히 추종자도 많았을 것이다. 그건 이 시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많은 존경을 받고 사람들이 진심으로 따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분들이다. 그리스도를 믿고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더라도, 나 역시 그분을 기꺼이 따랐을 것 같다.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의 질문으로 보건대, 세례자 요한은 이미 세간에서 ‘그리스도’, ‘엘리야’, ‘예언자’였던 것 같다. 바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존재의 모습을 이미 다 갖고 있지 않았을까?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차세대 대선후보? 세례자 요한이 정치인이었다면, 아마 저 모든 질문에, “바로 내가 그 사람이다!”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저런 소문을 잘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 확장에 잘 이용했을 테고. 그러나 그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욕심도 없었고, 드물게 야망도 없었던 걸까? 그는 이미 세상이 그에게 붙여준, 욕심과 야망에 불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냈을 그 명패들을 집어 던진다. 그는 우직하게 자신의 소명을 따랐다. 복음서엔 빛이 아니고,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 이라고 못을 박지만 이미 사람들은 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썼을 요한복음 사가는 어땠을까? 우리 공동체의 존재 이유와 사명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했으나 다만 아버지에게서 아버지로, 어머니에게서 어머니로, 선생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과 양피지 몇 장에 남아있는 기록들만으로 세례자 요한의 역할과 같은 글을 써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기꺼이 따른, 또 한명의 요한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세상은 무엇 하나라도 더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이상하게 본다. 예전과는 달리 남들이 다 가는 길 밖,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애벌레의 탑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직은 그 길이 요원해 보인다. 대세의 삶도, 그 밖의 삶 역시 어떤 선택이건 이 땅에선 쉽지 않아 보인다.

당시 누구나 꿈꾸었을 그 이름들에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고 자신을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말한다. 소리는 흩어진다. 생성되면서 끝이 난다. 그분은 그렇게 자신의 삶과 소명을 순간의 찰나로 정의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세례자 요한이 철저히 ‘누군가’를 위한 존재로 본인의 소명을 인식하기까지의 삶은 어땠을까? 그는 그렇게 자신을 ‘어느 한 순간’으로 정의했지만 억겁의 시간이 흘러 지금 이 순간까지도 세례자 요한은 본연의 임무를 다 하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예수라는 사람, 그리스도의 존재를 위한 본인의 소명에 가장 충실했다. 조연인 듯 조연 아닌, 그러나 주연 같은 삶을 살고 떠난 사람.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고, 철저히 아래를 자처했지만. 땅을 보며 고개 숙이며 살던 사람들의 고개를 꼿꼿이 쳐들게 하고 하늘을 보게 한 사람. 높은 곳에 떠 있는 것만 빛일까?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분명 빛나는 삶을 살았다. 빛을 떠오르게 하는 삶을 사는 것, 참 멋지다. 그렇지만 힘들다. 그 옛날 세례자 요한이 그랬고, 빛이었던 그리스도의 삶이 그러했다. 올 한해 일어났던 숱한 고통스런 시간들 속에서 사람들은 분연히 일어섰고, 그 움직임들은 분명 더 큰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깊은 어둠뿐인 이 시대에 빛은 반짝! 하는 그 순간으로도 주위를 밝힌다. 나는 그 순간 한 번이라도 반짝일 수 있었는지, 누군가를 빛나게 해주기라도 했는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세례자 요한의 삶 앞에 고스란히 비춰지는, 초라한 나를 본다.

“너는 누구냐?”, “너는 무엇이냐?”, “너를 무엇이라 말하느냐?” 라는 문제의 답을 채우는 시간은 내 삶 전체일 터, 언젠가 이 답안지를 다 채우고 제출하러 갔을 때 세례자 요한을 꼭 만나서 인사를 드리고 싶다. 내 인생 어느 때, 숨이 가빠오고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던 그 순간 당신의 이야기에서 많은 용기를 얻었노라고. 그건 내게 정말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인사드리고 싶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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