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마실 – 오늘 우리에게 신이란 – 범재신론 이해하기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오늘 강의는 ‘신은 오로지 한 분’이라는 것과 ‘신의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강의 자료는 제가 강남대의 연구지원비를 받아 최근에 쓴 [성경적 범재신론의 가능성]이라는 미발표 논문입니다. 범재신론에 대한 연구가 별로 없는데, 현대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신관이 범재신론이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정리해 본 자료입니다.

I. 신 이해의 역사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의 기초에는 유일신 사상이 놓여있습니다. 그리스도교권에서 유일신에게 붙여진 대표적인 이름이 ‘야훼’입니다. 신명기 6장 4절을 보면,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라고 합니다. 야훼 한 분 뿐이라고 하면서 유일신론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성서와 그 배경을 두루 살펴보면 고대 이스라엘에서 신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아주 다양했고 신에게 붙여진 이름도 마찬가지로 다양했습니다. 하나의 예로 탈출기 6,2-3에서 야훼가 모세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장면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야훼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의 신(엘 샤다이)으로 나를 드러낸 일은 있지만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를 알린 일은 없었다.” 이 두 구절은 신의 이름에 대한, 혹은 신의 속성에 대한 역사적 변화를 굉장히 함축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신의 이름을 씨족장의 이름을 따서 “아브라함의 신”, “이사악의 신”, “야곱의 신” 등으로 부르다가, 점차 이들을 하나로 묶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기원전 10세기 이전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고 나서는 가나안의 최고신인 ‘엘’을 차용하여 자신들의 신을 전능한 신 ‘엘 샤다이’(전능의 신) 등으로 부르다가, 모세에게 자기를 ‘야훼’라고 소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신의 호칭이 달라져갔다는 것은 신에 대한 이해에 변화가 있었을 뿐 아니라, 신 개념이 시대에 따라 바뀌어갔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이 야훼 신앙을 유일신 사상의 원천이자 전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신을 야훼라고 부르던 시절도 다신교적 세계관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민간신앙은 전형적으로 다신교적이었는데, 이에 대한 연구를 보면 ‘야훼’만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사마리아의 야훼”, “테만의 야훼”, “헤브론의 야훼” 등 지역별로 다양하게 불렸다고 합니다. 고대에 야훼라고 불린 신 자체가 여럿이었다는 셈이지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초기의 야훼는 여러 신들의 모임에 속한 ‘신성한 자들’ 또는 ‘엘의 아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 신들 가운데 야훼 신앙인들에게는 야훼가 유력한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결국 야훼도 다신교적 세계관을 전제 배경으로 하면서 사용되는 언어라고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 야훼 한 분 뿐, 택일신론

초기의 야훼는 여러 신들 가운데 유력한 신일뿐이었는데, 점차 야훼만을 섬기는 이들이 등장하면서 유일신 사상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 있는 남의 나라 신들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신 야훼께 마음을 바치시오.”(여호 24,23)라며 여러 신들 가운데 야훼를 선택해서 집중을 해야 한다는 요청들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런 결정적인 사례가 기원전 9세기 인물인 엘리야가 바알의 사제들과 대결하며 야훼의 능력을 보여주려는 장면(1열왕 18장)에서도 보이지만, 이스라엘이 기존 가나안의 세계관과 단절하고 자기들만의 길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기원전 8세기 말경 예언자인 이사야는 “인간의 힘, 외국과 맺은 동맹, 군사적 우세에 의존하지 말고 야훼에게 의존하라고 말한다. 오만하게 인간의 군대나 요새에만 의존하는 것이 우상 숭배”라는 관점을 보였습니다. 즉, 다른 신들도 자연스럽게 전제하며 다른 민족이야 무엇을 섬기든 우리의 신은 야훼이니 그 야훼에만 의지하라는 것이고, 그래서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신명 6,4)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야훼신앙은 엄밀하게 얘기하면 ‘유일신론’(唯一神論, monotheism)이라기보다는 ‘택일신론’(擇一神論, henotheism)에 가깝습니다. 택일신론은 다른 신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야훼만 섬기겠다는, 일종의 이스라엘에게 요청되는 실천적 일신론입니다. 다른 이는 어떻든 우리는 야훼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죽여야 한다”(탈출 22,19)고 할 때의 죽임의 대상도 야훼 공동체의 배반자를 의미하는 것이지 단순히 이민족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훼를 섬기는 자가 민족의 구심점을 훼방하고 야훼를 배반하는 경우, 민족적 집단의 통일을 위해서 처형해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가 되는 겁니다. “우리의 신은 야훼”라는 다짐 속에 담긴 택일신론은 다신교적 최고신의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이론적 차원에서 유일신론의 ‘흔적’을 지니는 신관 정도로 정리하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 택일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

그러면서 택일신론에서 어원적인 의미의 유일신론으로 전환하는 듯한 모습도 찾아 볼 수 있게 됩니다. 성서에서 “야훼 한 분 뿐”이라고 고백적으로 표현할 때는 신에 대한 수량적 이해보다는 질적 이해가 좀 더 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기원전 6세기 바빌론 포로기에 들어서면서 예레미야(기원전 627-580)나 제2이사야 같은 예언적 사상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이 자신만이 아니라 사실은 세계 전체를 다스린다는, 요새 말하는 유일신론의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사고방식이 등장합니다.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면서 그 포로들이 선택해야 될 것은 둘 중의 하나였는데, 야훼를 포기하고 다른 나라의 신에게 굴복해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도 야훼를 자신의 국가의 신으로 섬겨야하는가라는 선택에서 제2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하며 자신들이 믿는 신의 범주를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믿는 신이 기존에는 자기 민족에게만 관여한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다른 민족까지에도 포섭하는 더 넓은 분이라는 상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즉, 자민족 중심적 택일신론을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훼는 자신들의 존재의 기원부터 자신들의 흥망성쇠와 함께 해온 분이었음을 나라의 멸망이라는 고통스러운 사건을 통해 확인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질적으로 확장된 신관을 확보해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것은 다 신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훼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사 45,11-13 참조)라거나 “나 아닌 다른 구세주는 없다”(이사 43,11)는 구절은 그렇게 고백하는 이들의 존재론적 기원과 현재 처한 어려운 상황을 모두 설명하려는 가운데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만이 아니라 나쁜 일의 기원도 되고, 나만이 아니라 모두의 기원이 되는 이가 바로 야훼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일신론은 일종의 “기원에 대한 애착”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유일신론의 강화, 내면의 발견

기원에 대한 애착은 현재적 실존 혹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관심과 연결됩니다. 자기 삶의 근거를 자신의 ‘밖’이나 ‘높이’에서가 아니라 ‘현실’ 혹은 ‘내면’과 연결 짓는 세련된 신학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게 주권을 내어주게 된 민족적 위기 상황 속에서 외부의 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면의 회개로 눈을 돌렸습니다. 이 때 회개란 야훼의 마음을 회복하는 일, 즉 내면의 종교적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의 새로운 법은 돌판에 새겨진 문자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마음에 새겨진 살아있는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없어졌다고 하느님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나라가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신적 진리에 대한 상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게 예레미야 31장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1-34절은 제가 보기엔 구약성경 중에 신관의 확장론 내지는 심화와 관련해서 중요한 구절이 아닐까 합니다. 예레미야에게 진리는 사람의 외부에서 형식적 규칙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입니다. 신의 진리를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법을 모시고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니 인간 주체성의 발견인 셈입니다. 결국 이러한 신은 인간에게 율법적 행위를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신이라기보다는 내면에서 활동하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기원전 2,600년경에 등장한 이러한 신관을 통해, 이제 야훼는 유다인은 물론 이민족에도 관여하는 분이자 세상 전체에서도 유일한 신으로 등극합니다. 신이 인간 밖에 머물며 인간에게 율법적 행위를 요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내면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은 신 이해의 역사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발견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유일신론은 다소 일방적이고 여전히 전제군주적입니다. 모든 것에 관여하고 인간의 내면에 자신의 법을 심어주기는 하지만, 하늘 위 높은 곳에서 인간에게 내려오거나 밖에서 인간 안으로 들어오는 식입니다. 높은 곳 혹은 밖에 있는 신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에 대한 논리적 분석은 여전히 취약합니다.

신과 인간, 신과 만물의 근원적 관계성, 즉 신과 세상의 분리와 연결 간의 연결고리, 이왕이면 신이 내면적이면서도 동시에 나만의 내면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내면에 존재하는 생명의 근거라는 것을 좀 더 정확하게 새길 필요가 있겠는데, 그것을 ‘범재신론’이라는 말이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됩니다.

 

. 범재신론

범재신론(panentheism)은 일단 범신론(pantheism)과는 구분되는데, 범신론이 “모든 것이 신이라는 입장”이라면, 범재신론은 “모든 것(pan)이 신(theos) 안(en)에 있다는 사상(ism)”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신 안에 있으니 그 신은 모든 것의 존재론적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신이 모든 것에 내재고, 아울러 범주상 신은 모든 것 이상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해 초월적입니다. 범재신론(汎在神論)은 신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담아내려는 그런 신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피조물과 신의 관계, 범(all)과 신(God)의 관계는 자연물과 자연법칙의 관계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자연물들은 자연법칙으로부터 예외적이지 않습니다. 자연법칙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행위는 없습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조차도 자연법칙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과 자연법칙간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시시각각 구름의 이동 모습을 관찰하고서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따른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관찰하고 말하는 사람의 눈과 귀도 자연법칙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은 인간의 관찰 대상이기 이전에 그렇게 관찰하는 주체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범재신론에서의 신은 자연법칙과 구조적으로 유사합니다. 범재신론에서의 신은 인간적 경험 대상이자 동시에 경험의 주체이며, 인간이 경험한 것보다 언제나 더 큽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도 신의 경험은 말로 할 수 없다 하고, 노자의 <도덕경> 첫 구절에서는 “道可道 非常道(말할 수 있는 도(道)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고 하고,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신은 이름으로 불릴 수 없고, 오직 탄성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심층인 신은 그래서 ‘초월적’입니다. 특히 나의 인식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적이기도 합니다. 본회퍼(D. Bonhoeffer)가 말하듯이, 신은 “우리의 한 가운데 있는 너머”(beyond in our midst)이며, “바로 여기에”(right here) 계신 저 너머(the beyond)의 존재인 것입니다.

. 성서적 범재신론, all God

범재신론이라는 용어는 1828년에 처음 사용되었지만, 범재신론에 해당하는 내용은 신약성서에서도 발견됩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로마 11,36)와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사도 17,28)는 구절은 전형적인 범재신론에 해당하는 구절입니다.

이런 신과 만물의 관계를 도식화하면 “all(범)≤God(신)”이 됩니다. all=God이 만물에 대한 신의 내재성을 의미한다면, all<God은 만물에 대한 신의 초월성을 의미합니다. 신은 만물에 내재하면서 넘어선다. 본회퍼의 표현처럼, “우리 한 가운데 있는 너머”인 것입니다. 내재성과 초월성을 한 데 묶어 간단하게 표현하면, all≤God가 됩니다.

신은 모든 것 안에 있으면서 모든 것보다 더 큰 범주이기에 ‘전체’입니다. 전체를 그리스 기하학자들은 ‘모노’(하나)라는 말로 나타냈습니다. 기하학에서의 ‘하나’(monad)는 수학적 원형인데, 이 원형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는 단순히 셀 수 있는 수량적 하나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는 안전성, 완전성, 단일성, 순환 규칙성, 효율성 등을 의미하고, 기하학적으로 ‘하나’는 ‘원점’이자 ‘원’입니다. 모든 것의 시원이고 모든 것을 지지하는 전체입니다. 그 전체를 ‘하나’라는 수학적 상징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신이 ‘하나’라고 할 때도 신이 전체이며 모든 곳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는 전체입니다. 우리말도 비슷합니다. ‘하나’는 ‘’에서 나온 말이고, 그 ‘’에는 크다, 하나, 전체, 하늘, 빛, 규정할 수 없음 등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하느님’은 같은 어원, 즉 에서 나온 말입니다. 신이 하나라는 말은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전체라는 것입다. 그래서 하나(mono)인 신(theos)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즉 무소부재(無所不在)합니다. 그것이 ‘유일신’ 사상에서 정말 말하려는, 아니 말했어야 하는 핵심입니다.

범재신론에서의 ‘신’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성령도, 희망도, 주님도, 믿음도, 세례도 하느님도 하나’라고 할 때의 그 ‘하나’입니다.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라고 할 때의 ‘하나’는, 사람들이 신을 어떻게 부르고 표현하든, 그 다양한 신명의 상위 개념, 더 큰 범주입니다. 그래서 ‘하나’라고 표현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는 다양성을 포섭하는 근거이자 사실상 전체입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신다”는 구절은 “all(범)≤신(God)”의 구조를 잘 반영해줍니다.

. 다신론과 범재신론

유일신론을 믿는 사람들은 다신론을 대단히 죄악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건 유일신론의 ‘하나’에 대한 이해를 철저히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택일신론이 논리적으로는 다신론(polytheism)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체험적으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일반적인 의미의 유일신론이 다신론과 범신론(pantheism)을 모두 거절하는 경향이 있다면, 범재신론은 다신론과 범신론을 모두 포섭합니다.

현대인들 중 “나는 무신론자야”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그것이 인간적 성숙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 우주의 존재양식으로부터 도피해서 솔직하게 우주와 자연을 대면하지 못하고 어쨌든지 좁은 자기를 살리려는 안일한 현대인의 자만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고대에서는 무신론이라는 것이 없었거든요.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 속에서 생명을 교감하고 느꼈기 때문에, 신들의 존재 양식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고대인들은 태양에서, 달에서, 대지에서도 신적 기운을 느꼈습니다. 탄생이나 죽음 등 어떤 통과 의례 때마다, 중요한 것들마다, 생명을 주는 근원마다 신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무지에서가 아닌 자연과 교감을 해 온 증거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얼마나 많은 신이 나옵니까? 최고신 제우스는 아내이자 가정의 신인 헤라의 견제를 받습니다. 아폴론은 태양을 주관하고,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을, 하데스는 죽음을 관장합니다. 갈등과 긴장, 아름다움과 죽음, 태양과 달을 무시하고서 세계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세계의 긴장과 역동은 다양한 신들의 역할과 성격을 인정함으로써 설명됩니다. 인도에서도 브라흐마가 창조의 섭리를 나타내준다면, 시바는 파괴와 죽음의 원리를 나타내줍니다. 인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신의 이름을 붙였지만,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이 창조와 파괴가 순환한다고 보는 것이 인도인의 사고방식입니다.

이처럼 다신론은 우주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 표현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다신론은 우주적 전체성을 설명하는 한 양식이기도 했습니다. 다름 혹은 다양성을 거부하고서 전체를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신론은 이런 입장 위에 서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유일신 사상에 근거해 다신론을 폄하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신론과 유일신론은 사실상 신 혹은 세계에 대한 설명 양식의 차이입니다. 신의 역할과 범주상의 차이가 있고, 설명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지만, 결국 전체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구조적으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다만 다신론의 난점이라면 여러 신들의 관계와 그 여러 신들의 상위적 질서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다신론 체계에서 다(多)를 통일하는 근원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습니다. 온전한 통일성을 개개 신들의 총합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듭니다. 신들의 유기적 관계까지 말해야 하고, 그 신들을 신이 되게 해주는 근원까지 설명할 수 있을 때 신들의 존재 의의도 밝혀줍니다. <우파니샤드>가 다양한 인격적 신들의 배후에서 이들을 하나로 묶는 근원적이고 통일적인 실재, 즉 브라흐만을 설정했던 것도 범재신론과 통하는 사유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 포섭하며 살리려는 범재신론적 신관은 다양성의 원리와 다양한 것들의 관계를 적절히 해명해줍니다.

 

. 범신론과 범재신론

범신론(pantheism)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신론과 범재신론을 구분해야 하는데, 범신론(pantheism)은 단순하게 풀면 모든 것(pan)이 신(theos)이라는 뜻으로, 신이 모든 것에 철저히 내재하기에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신과 동일시됩니다. 신의 철저한 내재성을 강조하는 사고방식이어서, 모든 것들이 그대로 신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철저한 내재성만으로 신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다신론에서도 그렇듯이 범신론에서 문자적으로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할 때 그 신들 간의 관계와 신들을 신들 되게 해주는 근원이 설명되어야 합니다. 개체를 떠받치면서도 그 개체에 갇히지 않는 근원과 전체를 말하고서야 모든 것이 신이라는 논의에 설득력이 확보됩니다. 그런 문제의식을 지니고 개체들의 근원이면서 언제나 개체를 넘어서는 전체로서의 측면도 살려내려는 것이 범재신론입니다. 내재성만으로 신을 설명하는 것에 한계가 느껴져서 신의 초월성을 동시에 살려내려는 것이 범재신론입니다. 범재신론에서 신은 모든 개체들 안에 있으면서 개체들을 총합한 그 ‘이상’, “all=God” 혹은 “all<God”이라기보다는 “all≤God”인 것입니다.

그래서 범재신론은 무신론(atheism)도 포괄하고 넘어섭니다. 무신론이라는 것은 신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대이기 때문에 상대성의 영역 안에 있습니다. 만일 무신론이 신이 ‘있다’는 주장에 대한 상대적 ‘없음’의 차원에 머문다면, 범재신론에서의 ‘신’은 그 상대적 ‘없음’ 마저 안으로부터 뒷받침해주는 근원이자 전체입니다. 틸리히가 “소외와 절망의 상태도 영원한 신적 창조력의 지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듯이, 범재신론의 신은 상대적 ‘없음’도 포섭하며 넘어서는 전체이고 모든 의미를 지탱해주는 근원입니다. 이렇게 범재신론에서는 무신론을 넘고 포괄하면서 신의 절대성과 보편성도 확보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라는 예수의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자․타 혹은 선․악의 이분법을 벗어나 다양성을 살리도록 요청하는 근거가 됩니다. 모든 것이 신 안에 있다고 할 때의 그 신이 상대성과 대립성을 내포하면서도 초월하듯이, 예수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편협한 신관을 가진 사람들과 신을 율법이라는 정해진 문자에 가둬두는 사람들은 그런 예수를 용납 못하죠. 이런 예수는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못 살 거예요. 우리만 옳아야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를 감당할 수 있겠어요? 예수의 이런 식의 말은 그런 점에서 대단히 범재신론적 사유에 대한 구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우상숭배금지 조항도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추측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신은 모든 것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초월자이니까 전체인데, 어떤 물건이 신의 모든 것이라고 하면 곤란하죠. 우상에게 절한다는 의미는 이것이 신의 모든 것이라는 외적․행위적 표현이지 않겠어요? 그러는 순간 신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을 어리석은 형상으로 가두는 꼴이지요. 이 계명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신을 이런 형상에 가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이야 형상에 절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싶지만, 사실 더 극단적인 우상숭배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물질이라든지, 개인적 명예라든지, 집착이든지, 그런 행위에 초월적 신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메이니까 그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뜻밖에도 성상에 절을 그만 두게 하는 것이 안 나옵니다. 신약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우상숭배는 보편화하고 내면화해서 하느님보다도 더 어떤 것에 집착하고 그런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우상숭배라고 설명합니다.

. 나가는 말

오늘날 우리 신앙의 핵심인 신이 하나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범재신론적 사유로 이해를 하면 어떤 철학자와도 대화할 수도 있고. 어떤 다른 종교인과도 대화를 할 수 있고, 무신론자와도 대화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과도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의 근거도 찾을 수도 있고 삶의 의미와 목적도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논리적 근거를 충분히 제공해준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신이 하나라는 의미를 범재신론적 사유를 중심으로 자기의 철학으로 삼으신다면 바다에 항해하는 배에 아주 든든한 닻과 돛을 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범재신론의 눈에는 한국의 역사도 예수의 신과 어울리는 이야기가 됩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쓰게 된 것도 이런 안목에 따릅니다. 한국 역사도 이미 신 안에서 이루어져 온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의 하느님, 하나님, 천주, 상제는 야훼 혹은 엘과 전혀 다른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범재신론적 신의 다양한 표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天), 천지신명(天地神明), 도(道), 법(法), 리(理) 등도 범재신론적 사유로 보면, 범주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신의 반영입니다. 어떤 이름이 지시하는 실재든 범재신론적 신은 그 실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신은 충분히 내면적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어떤 이름이든 신을 온전히 담아내지도 못합니다. 신은 늘 초월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범재신론적 사유 체계가 ‘자비의 윤리’와 만날 때 그곳이 신이 결정적으로 활동하는 영역이 됩니다. 본회퍼가 “그리스도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수여자”라고 말했듯이, 진정한 종교(좁히면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 삶의 영역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제한된 문자의 영역에 갇혀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 속에서 자비의 삶을 사는 것이 타자를 살리고 신을 진정으로 신 되게 해주는 행위입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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