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 –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이현주

Q&A’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품는 실제적인 고민들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뤄지는 코너. 흔히 질문하기 어려운 신학과 영성, 삶의 근원적 질문 등 그 어떤 질문이라도 OK. 내 안에 풀리지 않았던 질문, 누구도 답해주지 못했던 질문이 있다면 과감히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자판을 두드려라. 시대의 스승, 관옥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에 자신을 활짝 열어둔 채 사랑을 배우며 사랑 그 자체이길 희망하며 살아가고 있다. 목사, 동화 작가, 번역 문학가이자, 동서양을 아우르는 글을 쓰며 대학과 교회 등에서 향기 가득 좋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몸과 마음에 좋은 생각들을 담아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

Q : 묵인할 수밖에 없는, 묵인하게 되는 것들에 대한 고뇌.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중소기업을 하는 지인이 세금을 제대로 내면 바보라고 말한다. 세금포탈을 무슨 영웅담처럼 늘어놓는 것을 보고 마음이 씁쓸했지만 나는 묵묵히 있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면서 버젓이 남을 속이는 이들을 보는 것이 마음이 불편한데도 괜한 분란 일으키기 싫어 입 다물고 있기도 하였다, 나만 바르면 된다는 생각,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함부로 말하다가 인간관계까지 끊어져버릴 것 같아 침묵으로 일관한다.

일상에서 흔히 체험하고 쉽게 볼 수 있는 장면들, 때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로 개인의 양심을 덮기도 하는 고뇌들. 나는 과연 잘 사는 것인가?’

A

우리는 살면서 무엇인가를 묵인합니다. 분명히 보고 들었는데 그 보고 들은 것을 못 보고 못 들은 셈치고 덮어두는 거지요. 왜 그러는 걸까요?

질문하신 분의 경우, 세금을 제대로 내는 사람은 바보라고 하면서 세금포탈을 무슨 영웅담처럼 늘어놓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 보고 들은 바를 묵인한 겁니다. 뭐 그럴 수 있지요. 그에게 왜 그러느냐고 그건 법을 어기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묻는 대신에 못들은 척 가만히 있었다는 건데,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 아닌가요? 문제는 그렇게 묵인한 자기 행동이 맘에 걸린다는 점이올시다. 그러니까 묵인하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 세금 가지고 옳다 그르다 따지기보다는 그나마 인간관계에 흠을 내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서 묵인했는데 그게 본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 아닙니까?

자, 그러니 이제 문제가 세금 안 내는 기업경영자한테서 질문하신 분에게로 넘어온 셈이군요. 참 잘 되었어요.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내 문제’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네 문제’ 또는 ‘사회의 문제’로 보고 접근할 때에는 근사한 명분과 엄정한 논리와 대단한 열정이 소모되지만 얻을 수 있는 해답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지요.

그럼 이제부터 한번 같이 생각해봅시다. 무엇이 질문하신 분의 문제입니까?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지인의 행실을 묵인한 게 문제일까요? 그게 문제라면 친구 사이의 관계를 상하면서까지 옳고 그름을 따졌어야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묵인하지 않고 따졌을 경우 상대방이 순순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이른바 회개라는 걸 했을까? 상상해보면 그럴 리 만무라는 너무나 빤한 결과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래서 질문하신 분도 못들은 척했을 거예요. 그러니 무엇을 보고서 보지 않은 척 묵인한 사실 자체를 문제로 삼을 건 없다고 봅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요? 묵인할 이유가 있고 묵인할 수도 있고 그래서 묵인한 거예요. 따라서 묵인한 사실 자체를 문제 삼을 건 없는데 그런데 왜 질문하신 분의 마음이 시방 불편한 걸까요?

무엇이 자기 마음에 들어서 그래서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질문하신 분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까?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서 오히려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중소기업 경영인의 태도? 그게 지금 본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겁니까? 그렇다면 참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질문하신 분은 앞으로도 계속 불편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겁니다. 왜냐고요? 그런 (세금 포탈을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들로 차고 넘치는 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니까요.

그래요, 세상은 어디를 가나 거기 사는 인간들이 만든 온갖 불의와 부정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그러니 그 많은 불의와 부정과 폭력에 마음이 상해야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이른바 ‘편한 마음으로 삶을 즐긴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과연 그렇다면 내 인생은 어디 있는 겁니까? 누가? 무엇이? 내 인생의 내용을 채우고 결정하는 겁니까?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지요. 아니, 뭐,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고 그리 산다면 안 될 것도 없겠습니다만…….

자, 이제 과연 질문에 답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제 생각을 말씀드릴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은 온갖 사람들이 온갖 문제를 일으키고 또 그 문제를 풀면서 한 단계씩 ‘의식의 수준’을 높여가는 그런 곳이다. 따라서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좋은 일을 많이 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는 동안 겪게 되는 다양한 경험들을 통하여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다.

  1. 그러기에 내가 여기서 할 일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어차피 불의와 부정이 저질러지는 현실에서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더욱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인간으로 성숙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를 배우고 그렇게 배운 바를 살아내는 것이다.
  2. 따라서 누가 무슨 옳지 못한 짓을 했을 때 나는 스스로 생각하여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결정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때 나는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어진 상황에 창조적으로 책임지는 것일까를 염두에 두고 판단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내 삶의 방식을 스스로 찾고 그렇게 하여 자기 삶에 책임지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 안 그러면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보고 들은 것을 묵인하든지 아니면 따져서 묻는지 간에 그 결정은 스스로 내리고 그렇게 내린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얘기올시다. 여기서 말하는 “책임진다.”는 것은 스스로 내린 결정과 그래서 한 행동에 대하여 불편한 마음으로 공연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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