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마실 – 오늘날 우리에게 쉼이란 무엇인가

이승원(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안식일의 기원

안식일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탈출기(20,8-11)와 신명기(5,12-15)에 언급된다. 사람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무조건 쉬라는 일종의 명령이다.

안식일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당시 고대의 중동지역에서는 농경민족이든 유목민족이든 노동일과 휴식일을 분리하는 것은 일반적인 형태여서, 어떤 경우에는 절기로, 또 어떤 경우에는 특정한 날로 분리하여 그 휴식일이 안식일의 의미로 쓰였다. 우리가 보통 영어로 사용하는 안식일(Sabbath)은 히브리어 ‘Shabbat’의 ‘중지하다, 멈추다’라는 표현에서 파생되었다.

유다교에서 안식일은 6일 동안 하느님께서 창조 행위를 하시고 그걸 보고 기뻐하며 하루를 쉬셨던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창조 이후에 가장 먼저 행하신 ‘쉼’의 행위를 우리에게도 하라는 것으로 쉰다는 것은 그만큼 거룩한 행위다.

율법, 일상의 폭력

초기 바리사이파들, 즉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생활화를 위해 규율화된 율법으로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유다인들의 정통성 방향에서 나름 긍정적인 운동을 했고, 반 헬레니즘의 측면에서 서민들도 함께 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자신들의 정책적인 법질서를 고수하기 위해 민중의 감시자 입장에 서게 되었고 안식일 관련 규율을 39개나 만들었다.

이 규제들은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과 직업을 요구했다.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 그날 벌어 그날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나마도 못 벌어 삶을 위협 받는 계층들, 목동, 뱃사공, 떠돌이, 창기들에게 하루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특정한 질병에 걸린 환자를 죄인으로 규정하던 정결법도 마찬가지로, 바리사이파들이 정결법을 일반화하면서 아프고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은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자괴감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이처럼 율법의 강조는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는 일상의 폭력이 되었다.

예수와 안식일 논쟁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했던 사건이 있었으니 안식일과 관련한 ‘도전’이었다. 마르 2장 23-28절과 3장 1-6절에서의 예수와 바리사이의 안식일 논쟁은,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안식일 논의를 해체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예수는 당시 율법주의에 대해 첫 번째로 깨야하는 것이 ‘사람들의 죄의식,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는 자책감’이라 보고, 가장 유명한 안식일 문제에 도전하셨던 것 같다. 제자들이 밀이삭을 따서 먹으려고 했을 때 바리사이파들이 예수께 질문한 것은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엄벌의 여부였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조상이고 왕인 다윗의 일화를 들며, 다윗도 율법을 깼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말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또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치료행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만 예수는 단호하게 이미 답이 전제된 질문을 던진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게 좋은지, 악한 일을 하는 게 좋은지. 병을 고치고 나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먼저 묻고 착한 일을 했다. 말문이 막힌 바리사이들과 윗사람들이 저 사람이 누구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면서 예수를 죽이거나 가둘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이렇게 예수와 기존 질서 사이에 적대적인 관계가 시작된다.

이런 과정들은 안식일에 대한 기존 바리사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적 전통을 해체, 안식일에 대한 무게중심을 다시 회복했다. 생명 중심에서 율법 중심으로 갔다가, 다시 사람과 생명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에 대해 안병무는 “이것은 가장 구체적인 인권 선언이다.”라고 평가했다. 어쨌거나 이제 안식일은 더 이상 유다교 혹은 기독교적인 담론이 아니라, 일반적인 윤리적 담론으로 확대될 수 있게 되었다.

구원과 해방의 복음으로서의 안식일

안식일의 본질적인 특징을 살펴보았을 때 쉬라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쉬기 위해서 쉬지 못하게 만드는 기존의 틀을 깨고 인간의 세계나 윤리를 넘어서서 더 적극적으로 신의 명령을 따르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됐을 때만이 진짜 우리가 신처럼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것을 깨자는 성경 표현에 대해 생각했을 때, 특히 이사야서 58장 6-8절을 기억하게 된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더러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인위적이고 상징적인 모든 계약관계와 권력관계를 깨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고 우리 뒤를 받쳐주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복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관계된다. 마태 25,31-41에 보면 구원을 받은 자가 누구인지, 누가 하늘나라에 갈 것인지가 나온다. 이웃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가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며, 병들었을 때 돌봐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준 이가 구원을 받는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치유 받은 자와 돌봐준 사람 둘 다 같이 구원의 길에 들어서서, 내가 쉬는 그 공간인 하늘나라에서 너도 같이 쉬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본다면 안식일은 곧 이웃을 사랑하고, 적을 용서하고, 갇힌 자를 해방시키면서 하느님 나라로 다가가는 구원적 행위다. 나만의 쉼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 그리고 그들 이름 없는 자들이 다 같이 쉴 수 있을 때 사실은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안식일이 완성되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종교적 전통의 해체

안식일에 쉰다는 것은 내가 속세에서 살았던 방식을 잠시 뒤로 놓는 것이다. 교회 또는 성당에 가서 신께 경배를 드리는 규칙을 뛰어넘는 자연스러운 행위다. 어떤 교회가 사람들의 위계질서 혹은 사회적 신분, 자존심, 옷 입는 것, 사는 곳 등 이런 것이 여전히 교회 내에서 주류 담론으로 형성되어 온갖 눈치를 봐야 한다면, 이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 인위적인 질서에 갇힌, 좀 더 안식이 필요한 교회인 것이다.

안식일은 모든 창조물들을 인위적인 것에서 해방시켜 스트레스 받지 않게 하는 날이다. 갈릴래아나 예루살렘 거리에서 쭈그리고 있던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더럽고 죄를 지었다고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것이 스트레스였고, 저들이 나를 언제 여기서 쫓아내버릴까, 오늘 끼니나 때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들을 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산과 물,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하느님의 창조물이므로 인위적인 것으로 그것들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 산이 골프장이라는 인위적인 프레임에 들어올 수 없고, 물이 공업용수라는 어떤 곳에 갇혀서는 안 된다.

통증이 관리되는 쉼

하루살이와 인간은 큰 차이가 있다. 하루살이는 입이 없어서 하루 동안만 살고, 노동도 안 한다. 모기처럼 피를 빨아먹든 벌처럼 꿀을 빨아먹든 외적 자원을 공급하는 행위를 안 하고 자기의 내적 에너지만 소비하고 죽는다. 그러나 인간은 입이 있다. 입이 있다는 건 외적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해서 내 입에 넣지 않으면 필멸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노동이라는 것은 필요한 외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공급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외적자원에 접근하려고 하는가? 어떤 통증을 느낄 때이다. 배고픈 통증을 느끼면 무언가 먹기 위해 일한다. 필요한 자원에 얼마든지 접근 가능하면 통증을 느끼더라도 행복하다. 감기에 걸려도 약 먹고 푹 쉬면 나으니까 그 통증이 관리가 된다. 그러나 고액질환에 걸린 이들이 치료해야 할 약에 접근하지 못하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음식에 접근할 수 없으면 공황상태가 되어 버린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자원에 접근하는 것이 자유로운 관계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나에게 필요한 자원에 바람직하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절차를 요청하는 것이다.

통증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통증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노동을 하라는 이야기다. 동시에 그것이 잘 관리가 된다는 것이 쉰다는 것이다. 내가 아픈 것, 친구의 어려움을 그때그때 제대로만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관리가 잘 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이 외적자원을 통해서 해결되고, 그러면서 생명이 유지되는 이 관계야말로 쉼이다.

소비되는 쉼의 전환

오늘의 사회는 부채사회이다. 신용카드를 많이 쓴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미래의 노동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부채가 많을수록 나는 이 사회의 특정한 질서, 소비 질서, 노동 질서에 강요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또한 오늘날은 소비가 강요되는 사회이기도 하다. 노동계가 주5일 노동제를 내걸고 투쟁해서 지금 대부분 시행되고 있는데, 주5일 일하고 이틀 동안 쉬면서 자유롭게 정치활동도 하고 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데 이 쉼이 소비적으로 전환되면서, 쉬기 위한 이틀이 소비하기 위한 이틀이 되어버렸다. TV에 소개된 맛집 음식을 먹기 위해 2~3시간 걸려 찾아가려면 자동차도 있어야 되고,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블로그에 올려줘야 되고, 또 길찾기 위해 실시간 네비게이션 기능이 있는 스마트폰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소비가 강요되고 있고, 또 많은 것들이 민영화되고 있다. 통신, 물, 전기 등 기본 수단이 민영화되면서 이제는 소비 능력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예전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첨단 기술은 몰랐지만, 최소한의 사는 법, 생존능력은 있었다. 예전 사람들은 굶어는 죽었지만 자살은 안했다. 기본적인 생존능력이 있으면 또 다른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텐데, 살 수 있는 방법이 유일하게 돈인 세상에서 돈이 없고 부채가 급증하게 되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살밖에 없다. 지금 우리 시대는 이렇게 자본이 노동을 이겨 모든 것이 상품화(commodification)되었다.

소비능력자와 소비무능력자로 구분되는 사회에서 비정규직이나 사회적 약자는 소비 무능력자들이다. 이들을 소비능력자로 만들자고 하면 일단은 그들이 사는 것이니까 일부 의미가 있긴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노동과 소비 프레임에 중독될 수밖에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들을 소비 주체가 아니라 쉴 수 있는 주체로 만드는 것이다.

이웃과의 연대로서의 안식

2005년에 동남아시아 지역에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와 수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 인도의 한 마을도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런데 구조대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구조대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불가촉천민들 지역인 그 곳에 파견된 구조대원들이 카스트 제2, 제3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카스트 제도 밖에 있는 불가촉천민을 건드리면 죄가 된다는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결과였다. 온갖 과학과 합리가 판을 치는 현대사회의 율법은 이렇게 우리 곁에서 맹렬히 살아 숨 쉬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무조건 쉬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의 의미란 아픈 이를 고치고 배를 채워주면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구원과 해방의 의미로 정리하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돌아갔을 때, 안식이란 결국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인 ‘연대’이다. 치유하고, 다가가고, 이름을 부르고, 안고, 만지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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