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복음 사이 – 마음이 산란해져도 겁내지 말라

김선실 

<삶과 복음 사이> 그리스도의 평화

요한 14,23절-29절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하고 말씀하신다.

몇 년 전부터 나는 편지나 이메일을 쓸 때마다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축복의 인사를 건네는 것인데, 오늘의 복음을 읽으며 새삼 그 구체적인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인사를 건넬 때 그 인사를 받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현재 우리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는 어떤 의미일까?

보통 ‘평화’라고 하면 전쟁이 없는 상태를 생각하게 된다. 이를 사회적 차원의 평화라고 한다면 개인적인 차원의 평화도 있다. 종교에 관한 조사 항목 중에는 언제나 종교인이 된 이유를 묻는 항목이 있고, 그 이유 중 꽤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도 예외는 아니다. 마음의 평화를 원해서 신자가 된 사람이 많다.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를 가지면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내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산란하지 않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의 상태! 그러나 이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는 신자가 된다고 해서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며 늘 지속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다. 사실 이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 그리고 계속 유지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도전이자 과제이다.

1980년대 후반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새로이 문헌정보학을 공부한 후 대학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결혼퇴직제’라는 성차별적인 관행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교사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직장에서 여성들은 결혼과 동시에 관례적으로 퇴직해야 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결혼퇴직제로 인한 결원 때문에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사서의 절반을 차지하는 20대 여성들이 곧 결혼과 함께 퇴직할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당하는 현실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을 때 내 안에서는 분노가 스멀스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성차별적인 관행을 바꾸어야 한다는 투지가 생겼을 때는 신앙인으로서 기쁘게 그리고 우아하게(?) 살고 싶은 내 염원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슬픔이 밀려왔다. 마음의 평화가 여지없이 깨져버렸던 것이다.

그 후 3년간 직장에서 성차별적 제도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분투하며 실제로 변화를 이루어냈지만, 한편으로는 잃어버린 마음의 평화로 인해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여성신학을 접하게 되었고 어느 여성신학자의 ‘분노는 정의를 실천하는 창조적인 에너지’라는 말에 커다란 위안을 받게 되었다. 분노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기존의 부정적인 고정관념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성차별이라는 부당한 구조에 대한 분노였음에도 불구하고 분노 그 자체는 나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힘들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오 10,34)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마치 평화를 잃어버린 내 마음의 상태를 알고 다독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가족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마태오 10장 35절-38절).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에 누리던 평화를 깨는 치열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우쳐주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평화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미 깨져있는 상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신앙인이라면 때로는 세상의 거짓 평화를 예수님께서 주신 칼로 과감하게 깨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호되게 마음의 평화를 잃고 힘들어했던 체험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내 신앙생활의 지표로 삼게 만들었다. 우리 각자가 유지하는 마음의 평화는 내적 충만함과 영적 성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개인의 평화가 충만해서 넘칠 때 이는 모든 활동의 원천이 되며 사회적 차원의 평화를 위해 투신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저 평화롭기만한 평화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고, 기존에 누리던 평화를 깨는 치열한 과정을 거친 참된 평화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인사를 건네는 순간,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살겠다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십자가와 참된 평화를 선택하는 결단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좋겠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로마 5장 1절)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되기를 바라며…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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