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전 – 힐링 경찰서장, 채수창

김옥자

2010년 6월 28일, 서울관내 한 경찰서장이 당시 경찰총장의 실적주의를 강력하게 비판, 동반사퇴를 주장하며 사직서를 던졌다. 이에 경찰청 중앙징계위는 사직서를 수리하는 대신 ‘파면’ 처분을 내렸고, 경찰대학 1기로 경찰조직에 30년간 청춘을 바쳤던 경찰서장은 완벽한 야인으로 돌아가 식당 서빙에 포장박스 접이, 반 노점 옷장사, 스피치 강사를 하며 절박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로부터 2년, 명예회복을 위해 제기한 행정소송은 승소했고, 다시 경찰직에 복귀했다. 대한민국 경찰 역사상 유래 없는 항명 사건, 경찰에 대한 상식을 팍팍 깨버린 전무후무한 경찰! 오늘 생수전의 주인공 ‘채수창 총경’이다.

특이한 경찰

방송과 언론을 도배하다시피했던 사건의 주인공, 경찰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딱딱하고 과묵할 것이라 상상했던 채수창 총경. 하지만 인터뷰 자료 검색 중 만난 그의 블로그에서 그런 선입관은 여지없이 깨졌다.

‘경찰’이 운영하는 블로그라기보다 작가나 예술가의 정취가 느껴지는 정감있는 글들과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 성찰에 놀라웠다. 그 중 ‘경찰을 감시하는 엔지오가 필요하다’는 글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세상, 아니 적어도 우리나라 경찰에게 ‘엔지오(자신들의 사적 이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일하는 정상적 엔지오)는 뭔가 수상한 냄새를 풍기는 종북좌빨 단체로 여겨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경찰 스스로 자신들을 감시할 엔지오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다니 정말 특이한 경찰이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특이한 경찰은 아니었단다. 실적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뛰쳐나간 후 일반 시민이 되어 보니 경찰들의 문제점들이 보이더란다. 국가나 사회 등 어느 조직이든 ‘감시와 견제의 외부조직’이 필요한 것처럼 경찰 역시 그런 차원에서 들었던 생각이란다.

“실제 경찰의 역할은 단순히 범죄자들을 검거하고 처벌하는 것만이 아닌 국민의 안전을 담당하는 한 기관이에요. 하지만 현실은 안전에 대해 많은 역할을 못하고 있어서 요즘은 좀 더 나은 시민의 안전, 국민의 안전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채 총경의 글과 행보에 일정하게 계속되는 흐름은, ‘단속보다는 예방’이다. 이 또한 생소한 경찰의 모습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경찰은 ‘꼬투리 잡아 처벌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는 그런 생각을 언제부터 한 걸까?

“옛날에는 엄하게 처벌하면 범죄가 줄고 사회를 보호할 수 있다고 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하지만 처벌만으로는 범죄가 줄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 증명이 되기도 했구요. 경찰의 예방과 검거 기능 중 당장은 검거 쪽으로 관심이 더 가게 되어있죠. 효과가 빠르니까요. 당장 열 명 잡고 구속시켰다고 하면 그만큼 범죄가 줄어든 것 같아 말하기는 좋지만 예방의 효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잖아요. 하지만 처벌 위주로 가다보면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하는 게 제복 입은 경찰은 예방위주로 가고, 사복 입은 사람은 검거위주로 가야한다는 거죠. 인내력과 일에 대한 자긍심 없이 급한 마음, 빨리 승진하고 싶으면 할 수 없는 일이죠.”

특이한 경찰, 채 총경의 경찰로서의 가치관과 철학은 무엇일까?

“제가 나이 들면서 보니까 경찰이 초등학생한테는 인기 있고 선망의 대상이지만 성인이 될수록 경찰을 싫어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검찰도 마찬가지고요. 권력기관이라는 게 국민에게 봉사하고 서비스한다기보다, 자꾸 규제하고 간섭하고 통제하니까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런데 역으로 사건해결이나 치안활동에는 국민들의 신뢰와 협조가 절대적이에요. 왜냐하면 그런 사건도 다 국민들이 제보해서 되는 것이지 경찰 혼자 잡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실은 국민들이 경찰을 싫어하는 마음을 불식시킬 수 있도록 더 다가가고 봉사하고 친절한 활동을 많이 하는 게 좋은 치안을 확보하는데 꼭 필요한 부분이지요.

자칫 경찰기관장이 되었다고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 협력단체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다 보면 경찰에 협조적이지 않은 이야기, 경찰에 대한 쓴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경찰활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 만나고, 일반 시민들과도 먼저 다가가 가까이 하는 게 중요해요.”

식당에서 예술을 만나다

경찰대학 졸업 후 첫 발령지 김제 경찰서장으로 가기 전까지 채 총경은 경찰청 안에서 내근 행정직만 했다. 그래서 서장이 되고 사람들과 만나면서부터 서서히 경찰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채 총경의 생각의 전환을 가져온 결정적 전환의 계기가 생겼다.

“김제경찰서장 할 때 어느 분에게 ‘시민과 같이하는 예술행사’를 해보자는 제안을 듣고 그 예술행사를 같이 하면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고 스킨쉽하는 좋은 기회가 되겠구나 라는 생각했었지요. 아는 예술인이 없어 고민하는 참에 어느 분이 예술인과 교류가 많으신 ‘소야 스님’을 소개해주셨어요. 그래서 스님과 식당에서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스님이 유성운이란 가수를 부르셨어요. 작곡, 작사를 다 하는 싱어송라이터였는데 그 분이 차에서 기타를 가져오는 거예요. 그리곤 함께 앉아 밥을 먹던 식당에서 노래를 하는데, 그때 그 노래를 들으면서 전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와~ 이런 세상도 있구나. 예술이 이런 거구나, 난 이 세상을 몰랐구나’ 싶었죠.

사실 김제에 가서 처음에는 지역에 아는 사람이 없다 보니 주로 협력단체 인사들과 어울리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식사도 좋은 곳에서 하게되구요. 그런데 그 분들과 이뤄지는 이야기는 매번 똑같아요. 부동산 이야기, 골프 친 일, 누구 만났다하는 은근한 자랑들뿐이죠. 그러다 스님하고 가수를 만나면서 이렇게도 사는구나 싶고, 그 다음부터는 예술인들과 점점 더 어울리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예술세계로 빠져들었고, 밥을 먹어도 늘 오픈된 곳에서 김치찌개 삼겹살 먹었어요. 그러다 절 알아보는 동네분들이 오시면 자연스레 합석하고 그래서 늘 3-4명이 시작해도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10명 정도가 되곤 했어요.”

이후, 예술은 그의 인생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 예술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있고, 공익적인 삶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순탄하게 경찰대학 나와서 경찰서장 하고, 이런 내가 바로 기득권으로 살았구나 비행기만 타고 다녔구나 생각하게 된 거죠. 비행기 타면 아래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입니까. 하지만 밑에 내려와 보면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지 않습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경찰직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예술이 채 총경에게는 경찰로서의 직무를 더 공고히 해 준 셈이다. 이후 예술인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알게 된 채 총경은 그들을 경제적 어려움을 다소나마 덜어주기 위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곤 유지들에게 예술가들을 소개했다. ‘메세나’ 메신저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이후 서울로 발령이 나고 복잡한 서울시내에서 실적주의에 시달리면서는 지방에서 느꼈던 예술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 서울에서도 문화예술을 통해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면 좋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삭막한 서울에도 문화예술의 따뜻한 바람을 불어 넣을까 고민하게 되었단다.

예술에 풍덩! 풍덩예술학교의 시작

채 총경은 한국자살예방시민연대 청소년자살예방위원회 위원장, U-city 평가단 부단장, 지구촌청소년연맹 회장, 한국범죄방지사, 힐링 스피치 강사 등 많은 직함을 갖고 있다. 그 중 ‘풍덩예술학교’의 후원회장이란 직함도 있다. 자료를 검색해보니 풍덩예술학교는 한마디로 ‘전통시장 문화센터’다. 올해로 4년째인 풍덩예술학교는 채 총경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김제 경찰서장을 마치고 서울로 오니, 전라도에 있는 예술인들이 이미 다 연락을 해 논 상태라 자연스레 서울에 계신 예술인과 많이 어울렸어요. 그러다보니 서로 좀 모일 수 있는 아지트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작은 공간을 알아보다 아예 조금 큰 곳을 빌려서 낮에는 교육장으로도 쓰고, 수업 없을 때 모임장소로 쓸 수 있는 곳을 찾았어요. 일이 되려고 했는지 마침 숭인시장 내 빈 공간을 싸게 임대할 수 있었죠.”

전통시장 활성화와 문화나눔을 위한다는 취지를 결합해 설립한 풍덩예술학교는 교육 내용도 알차 성북교육청으로부터 허가받은 평생교육원으로 한 달 수강료가 2-3만원이고 저소득층과 외국인에겐 무료다. 전통시장에 수준 높은 강사진을 갖춘 문화센터가 있다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 25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주부, 학생, 노인, 외국인 등 수강생이 100여명 정도 된다. 처음엔 번잡하다며 싫어하던 상인들도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고 교장인 권상호 교수를 비롯해 선뜻 강의에 나선 20여명의 교수진은 현직 교수, 전통매듭 전수자 등 문화예술 전문가들이다. 시설은 백화점에 비할 수 없지만 선생님들의 실력이나 선생님과 제자들간의 사이는 가히 대한민국 최고다. 강북지역 독자가 있다면 한번 도전해보셔도 좋겠다.


ㅋㅋㅋ

경찰, 채수창

경찰서장에서 하루아침에 민간인이 되었던 2년은 그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부모님께 가장 죄송했어요. 맏아들로 그동안 많은 기대가 있으셨고 별 탈 없이 차근차근 승진하는 모습을 보며 자랑스러워하셨는데 하루아침에 상황이 반전되었으니까요. 아마 주위분들에게 걱정되는 말씀도 많이 들으셨겠죠.”

파면 이후 처음엔 지인의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하지만 손님들이 와서는 자신을 알아보고 벌떡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는 통에 식당 영업에 피해를 주는 것 같아 그만 두고, 옷장사를 시작했다, 숭인시장 앞 반 노점에서 여성의류를 팔았는데 당시 강북경찰서 여경들이 와서 한 벌씩은 다 사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임대료가 너무 비싸 오래 할 수 없었다. 그 후에 알아본 게 마을버스 운전사였고 자격증도 땄지만 경력이 없다고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혹자는 직업체험경험 아니였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당시 그는 ‘절박’했다. 흔히 징계를 받은 사람은 소송에만 전념하지만 그는 경찰직을 완전히 그만 둘 생각이었고, 당장 생활을 해야 했기에 직장을 구해야만 했고, 소송은 명예회복 차원으로 진행했다. 그러다 시작한 게 김제경찰서장 시절 우연히 배워두었던 스피치 강사였고, 꼬박 2년간 7기생까지 배출하는 강의를 진행했다. 다행히 적성에 맞아 스피치 강의에 전념하였고, 복직하여 직원 및 관련단체 교육에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다. 그간의 노하우로 ‘힐링 스피치’란 책도 집필, 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채 총경은 작년 12월에 세례 받은 명칭도 어여쁜 ‘새 신자’이기도 하다.

“파면되고 이런 저런 일을 하던 중에 하루는 주진우 기자에게 연락이 왔어요. 캐나다에 계신 한 교포분이 제 소식을 듣고 함세웅 신부님께 저한테 전해달라고 후원금을 좀 보내셨다고요. 그래서 청구 성당에 가서 함 신부님을 처음 뵈었는데, 솔직하고 소탈하신 신부님이 참 존경스럽고 좋아서 청구성당에 다니게 되었어요.”

채 총경의 세례명은 콘스탄티누스다. 오랜 기간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공인해준 황제라 택했다는데, 가히 혁명적인 개벽의 세상을 열었다는 차원에서 둘은 참 닮았다.

전남경찰청에서 교통경비과장을 맡고 있는 채 총경이 요즘 주력하고 있는 것은 노인교통안전을 위한 체험교육, ‘함께 튼튼’이다. 2012년 전라남도 지역에서만 205명의 노인 교통사망사고가 있었다. 이에 채 총경은 시설개선 등 시간이 필요한 일은 그대로 진행을 하더라도 당장 할 수 있는 노인 교육을 생각했다. 채 총경이 직접 노인 대상 교육을 개발해 곡성, 순천, 흑산도, 목포 등 노인정을 직접 찾아갔다. ‘함께 튼튼’은 30분짜리 프로그램으로 민첩성이 떨어지는 노인들의 몸을 체조로 풀어드리기도 하고 신호등 건너는 체험, 차 피하는 방법 등으로 직접 시범을 보이기 때문에 한번 할 때마다 땀에 옷이 흥건해진다. 보통 총경급이면 마이크에 단상 갖다놓고 무게를 잡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채 총경은 노인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수시로 무릎을 꿇고 교육을 진행한다. 노인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채 총경이 ‘하나 둘’ 하면 ‘셋넷’ 하고, ‘오리’ 하면 ‘꽥꽥’ 하신다. 그래서일까,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전남지역 교통사망사고가 10% 정도 감소했다. 채 총경은 교육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없다고 했지만 아니라고 볼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겸직으로 면허행정처분 이의심사위원장도 맡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서류로만이 아닌 대면방식으로 구제심사를 한다는 점이다. 생계형 운전자인 경우 서류만으로는 심사하니 딱한 사정을 호소할 길이 없어 구제율이 10%에 불과했다. 그래서 한 달에 한번 대면심사의 날을 만들었다. 덕분에 3개월여 지난 지금은 구제율이 30%를 넘었다. 이번 4월에는 아예 심사대상자들을 직접 찾아갈 예정이다. 여수나 광양에 있는 분들이 차도 없이 무안까지 오려면 대중교통으로 하루가 꼬박 걸리니 자신이 직접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음주운전은 엄단해야 한다. 구제하면 나가서 또 위반할 거라고 말하기도 하세요. 하지만 법이란 건 눈물이 있어야 해요. 용서를 빌면 구제해주는 게 법이기도 하구요. 아예 술을 마시고 자포자기 한 게 아니고, 잠깐 차 빼러 가다 단속된 경우, 말도 안 들어보고 면허를 취소해버리면 그 사람은 당장 먹고 살길이 막히거든요. 그러니 직접 이야기도 듣고 그 자리에서 다시는 음주운전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주의도 주죠. 이렇게 해야지, 서류로만 심사해서 그게 무슨 계도가 되겠어요.”

인생의 가장 큰 풍파를 겪은 사람답지 않게 밝은 표정의 채 총경은, 지난 2년간을 ‘팔자’였다며 웃는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인생의 굴곡도 그렇지만 다시 복직한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특이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 사표가 수리되었다면 다시 복직할 수 없었을 텐데, 가장 치명적인 ‘파면’이란 징계도 지금은 그에게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팔자는 팔자다. 이제 대한민국 경찰청에 ‘경찰서 등급제’는 없다. 실제 실적에 대한 압박이 얼마나 줄었는지 내부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공식적으로 압박하는 시스템이 사라진 것은 확실하다. 한 사람의 용기와 결단이 수많은 이에게 (직업의) 자유를 되돌려주었다면 과언일까? 가톨릭에서는 세례명 성인을 닮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채수창 콘스탄티누스와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참 많이 닮았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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