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 – 침략의 상흔에 고인 한 잔의 맥주

고상균

침략의 상흔에 고인 한 잔의 맥주

(아시아 지역의 맥주와 제국주의)

영화 ‘황해’를 볼 때였다. 영화 속 구남(하정우 역)이 벌컥대는 맥주를 보며, 진정으로 ‘한 잔’이 땡겼다. 사실 핫바, 컵라면 등 허기진 구남이 먹어대던 것들은 ‘백퍼’ 식욕을 자아냈지만 그 중에서도 느와르풍의 스크린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던 하얼빈 맥주는 관람 후의 나를 단박에 마트 주류 코너로 몰아붙였을 만큼 ‘먹음직도, 보암직도’ 했다.

그날 주류 선택의 기준은 당연스레 ‘아시아’였고, 발품을 통해 획득한 사랑스런 녀석들을 집에서 만나던 중 갑자기 하나의 궁금함이 일었다. ‘아시아에서는 대체 언제부터 맥주가, 그것도 이렇듯 꽤 근사한 맥주가 시작되었던 것일까?’ 이렇게 시작된 질문은 뜻하지 않게도 참 소중한 맥주의 지류와 만나는 시작이 되었다.

무지 오래 전부터 차지한 자리

아시아에서 맥주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정답은 ‘무지 오래 전 부터’이다. 맥스 연재의 처음에서 맥주의 기원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 이라면 이 ‘무지 오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계시리라! 다만 이 지역이 종교적 영향으로 인해 술을 멀리하게 됨에 따라 풍부했던 맥주의 발원지는 말라버렸고, 이에 따라 ‘아시아가 맥주의 처음이다’라는 말을 하기조차 머쓱해진 것은 너무나 아쉬운 현실이라 하겠다. 예수 활동의 주 무대는 분명 아시아의 한 구석인데, 그를 믿는 기독교의 문화는 온통 서구인들의 전유물인 상황과 유사하달까? 아무튼 아시아에서 발원된 맥주의 강은 유럽이라는 지류를 만나 다시금 왕성한 흐름을 이어갔으며, 이른바 ‘대항해 시대’라 불리는 유럽인들의 해외진출 시기를 통해 잊어졌던 발원지와 역사적인 만남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유럽인들의 해외진출은 ‘대항해 시대’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처럼 그리 낭만적이거나 평화롭지도 않았고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동양으로부터 전해진 나침반 등의 첨단 기술을 통해 원거리 항해가 가능해진 유럽은, 이를 통해 만난 아프리카, 아메리카 및 아시아의 무력(武力)이 자신들에 비해 매우 형편없음에 환호를 올렸다. 이렇게 침략의 야만성을 드러낸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 정책은 그 땅을 터전으로 살았던 이들과 그들의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고는 멋대로 ‘신대륙 발견’의 깃발을 들고 다른 대륙으로 몰려갔다. 국내 산업기반에 미비했던 당시의 유럽 제국들이 해적과도 같았던 이들에게 기꺼이 ‘애국’과 ‘선교’라는 명분을 하사해 주었음은 물론! 이때부터 ‘한탕’ 털어가던 식의 기존 방식은 ‘점령한 후, 모든 것을 오래도록 가져가는’ 쪽으로 발전(?)해갔다.

신의 이름으로, 혹은 자국 왕의 이름으로 점령한 땅에는 백인들의 도시가 건설되었고, 그들을 위한 기반시설들이 함께 자리하게 되었다. 그 중에는 먹는 것과 관련된 시설들도 당연히 포함되었는데, 양조장도 그 중 하나였다.

슬픔으로 버무려진 아시아 맥주

필리핀의 명주 ‘산미구엘’을 아는가? 그 쪽 여행을 다녀와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마셔보았음직한 이 맥주는 유럽발 식민통치의 서막을 열었던 스페인의 기술로 만들어졌다. ‘성(聖) 미구엘’ 혹은 ‘십자가의 길’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무척 기독교틱하고 고상해 보이는 이 맥주의 이름은 역설적이게도 선교를 명분으로 삶의 터전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제국주의의 악행을 반증하고 있다. 1890년부터 시작되었으니 벌써 120년을 넘길 만큼 긴 세월 동안 남국의 후텁지근한 기분을 단번에 날려 왔던 이 맥주는 이렇게 그 시원한 청량감의 이면에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이어졌던 필리핀 식민통치의 어두운 역사가 배어있다.

최근의 맥주 흐름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중국이다. 이 중에서도 세계맥주시장에서 괄목상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칭따오(청도)맥주’는 1903년 칭따오에서 처음 생산되었다. 오랜 시간동안 청 제국에게 있어 유럽은 그저 야만스러운 서역 오랑캐정도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던 것이 마테오릿치 등 선교사들에 의해 ‘쫌 괜찮은 나라들’로 인식이 전환될 뻔했던 즈음, 이른바 제사 논쟁으로 비화된 수도회 간의 싸움에서 교황청이 제사 금지를 내세웠던 도미니크회, 프란시스회의 편을 들면서 청 황실과 유럽간에 냉기류가 흐르게 된다. 이로 인해 발생한 교류단절은 청 제국을 ‘오만한 종이호랑이’로 전락시켰고, 이 무방비 상태의 요지(要地)는 서구 열강에 의해 조각조각 찢어졌다.

이 와중에 칭따오를 차지한 독일은 그곳의 중국인들을 몰아내곤 관공서, 생활시설들과 함께 양조장 등의 기반시설을 함께 건축했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본의 발흥으로 막을 내렸는데, 만주국을 거점으로 중국 침략을 시작한 일본에게 칭따오가 함락되었다. 도시를 점령한 일본은 없애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던 맥주 생산시설을 그대로 운영했고, 훗날 중국 공산당에 승계된다. 이후 국가의 몰락과 민중의 희생을 대가로 살아남은 칭따오의 맥주시설은 새로운 첨가물 ‘쌀’을 만나면서 특유의 청량감과 시원함을 낳게 되었다. 지금도 칭따오 맥주의 본사 지역에는 독일 관공서 건물 등이 있어 그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칭따오의 자랑 ‘24시간(효모가 살아있어 출시 후 24시간만 유통 가능) 생맥주’도 함께 맛볼 수 있다.

중국 남쪽에 칭따오가 있다면 북쪽에는 구남(영화 황해 주인공)이의 사랑 ‘하얼빈 맥주’가 있다. 이 역시 몰락하는 청 제국에게서 만주 철도 부설권을 강탈한 러시아가 1900년부터 자국 기술자들을 위해 생산한 것이다. 칭따오가 강한 첫 인상과 깔끔한 뒷맛이 특징이라면 하얼빈은 ‘발티카’스럽게 강한 보리맛을 특색으로 가진다. 현재 세계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중국맥주들의 시작은 모두 이렇게 슬픈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근현대 격변기 중 서구열강의 대열에 합류했던 일본의 맥주도 처음에는 함포외교로 대표되는 일본의 굴욕적 개항의 역사를 통해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개운한 뒷맛이 일품인 오키나와의 오리온은 그 탄생의 슬픔이 남다르다. 일찍이 류큐국이라는 독립국가로 존재했던 오키나와는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2차 대전 중에는 전쟁의 광기로 이성이 마비된 일본의 본토 방어기지로 전락한다. 결국 미국에 의해 허망한 패배를 맞이한 이후, 본토에 대한 내정간섭을 두려워했던 일본 정부가 미국의 직접통치 요구를 받아들임에 따라 오키나와는 미군정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사무라이들에 의해 향촌의 지도자들과 무속인들이 목 베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오키나와인들이 이제는 그들에 의해 미국에 팔려간 꼴이 되었다. 1970년 중반을 넘어 일본으로 반환(?)되기는 했지만, 섬의 상당한 면적이 미군기지이며, 미군 범죄가 끊이지 않는 오키나와는 여전히 패망국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1957년부터 시작된 오키나와의 오리온 맥주는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점령군을 위해 탄생되었다. 오리온의 깊은 맛에는 오키나와의 깊은 슬픔이 섞여있다.

아픔과 상처로 빚어진 맥주

동남아시아의 타이거, 싱하 등과 인도의 맥주들은 서구의 침략사에서 기인한다. 2008년을 넘으면서부터 세계 상위 10대 회사에 중국 등 아시아 계통의 맥주회사가 3~4개 이상 이름을 올리고 있고, 산 미구엘이 침략국이었던 스페인으로 역수출 되고 있으며, 하이네켄의 직접 생산 시설이 동남아시아에 있는 점을 모른다하더라도 아시아 지역은 맥주에 있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맛있는 맥주도 참 많다. 이후 여행을 하거나 여하간의 기회로 아시아 맥주를 마시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한 번쯤 자세히 들여다보기 바란다. 혹 그 청량감 넘치는 병과 맥주의 빛깔 너머에 남아있는 상처와 아픔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침략의 상흔에 고인 한 잔의 술, 아시아의 맥주는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곁에 남아 있다. 마치 부활의 영광과 함께 절대 잊을 수 없는 주님의 삶과 고난이 한데 어우러져 귀한 기독교 신앙이 잉태되었듯 말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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