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중매 –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이연수

학기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둘째 주에 강의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삶의 의미와 해석’이라는 제목의 내용이다. 이번 달 ‘도서중매’에 선을 보이려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2005)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을 어떻게 사서 읽게 되었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그 당시 내 삶을 비추어보건대, 손이, 아니 마음이 먼저 알아본 듯하다.

2000년 들어서면서 내 삶은 그야말로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2년 사이 부모님이 약속이나 한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거다. 홀로 남았다는 두려움과 이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막막함과 적막함. 살아생전 잘 못해 드렸다는 자책감에 그리움까지 더해 내 심장은 언제라도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무력감과 우울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가던 그 시절. 처음 내 스스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자살한 이들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던 것도 바로 그때였다.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이 이 책에서 인용한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은 그 당시 내게 해당되지 않았다.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가 내게는 없었으니까.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부모님과 아리따운 아내, 형제 대부분을 잃고, 그곳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logotherapy, 의미치료)라는 이론을 창시했다. 프로이트가 성적 욕구불만에 초점을 맞추어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했다면, 프랭클은 환자 스스로 미래에 이루어야 할 과제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도록 했다. 내가 암흑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박사논문을 끝내야 한다는 내 삶의 절박한 과제 때문이었으리라. 박사논문을 마쳐야 한다는 당위성이 내 삶을 지탱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사람의 생김새가 다 다르듯, 살아온 인생 역정도, 삶의 의미도 제각각이다. 더러는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며 지난날을 흡족해 하지만, 어떤 이는 과거에 경험했던 사건으로 인해 평생 가슴앓이를 하기도 한다. 과거가 늘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어, 오늘이라는 현재를 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우리네 삶은 조각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조각이 모여 하나의 삶을, 자신의 이야기를 만든다. 어떤 조각은 밝고 화려하지만, 어떤 조각은 암울해서 버리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과거가 내게 생채기를 내고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고, 내 맘대로 버릴 수가 없다. 버려지지도 않거니와 없어지지도 않아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해석’이다. 여기서 말하는 해석은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번역’(translation)이 아니다. 문학이나 철학에서 말하는 ‘해석학’(Hermeneutics)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헤르메스(Hermes)라는 사자(使者)가 등장하는데, 신의 결정 사항이나 계획을 인간에게 대신 전해 주는 역할을 한다. 헤르메스가 신의 이야기를 인간에게 대신 전해 주는 중간자 역할을 하기에, 여기에서 해석학이라는 말이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네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나만 이런 불행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도대체 내게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이런 ‘궁극적 질문’으로 내게 말 걸어오는 삶의 내용에 내 스스로 해석자가 되어 답을 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지난 날 이해할 수 없었던 내 삶의 모습은 내게 선물이 되어 내 가슴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선사할 것이다. 그동안 나와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셨던,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도 나와 함께 웃고 계시리라.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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