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Cool – 미사는 시위 수단이 될 수 있는가? – 김유정

김유정

 

거리 미사 논란 미사는 시위 수단이 될 수 있는가?

  6월이 돌아왔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매년 6월은 민주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로 분주하다. 가톨릭 역시 이맘때면 민주화운동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기념하는 추모 미사 등이 포함된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물론 꼭 6월이 아니어도 수년간 4대강사업 반대 현장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 현장, 대한문, 밀양, 평택 등 정부 혹은 기업들과의 갈등 현장에서는 미사 형식을 빌려 교회의 입장을 밝혀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와 신자들의 반응은 제각각.

한편에선 규격에 짜인 본당 미사의 답답함을 탈피할 수 있고, 가두선교의 의미도 있으며, 가장 가톨릭 적이고 비폭력적인 항의 표시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한편에선 성스러운 의식을 거리에서 하는 것에 대한 문제, 굳이 사회 이슈를 교회 예식 안으로 가져오는 것에 대한 거부감, 시위 현장에서의 이웃 종교인들에 대한 미 배려 등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논란에 대한 적정선은 어디까지일까? 거리 미사는 교회의 사회 참여 방식에 꼭 필요한 것일까? 거리 미사는 교회의 사회 참여일까 미사의 시위 수단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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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 서품식은 운동 경기가 아니다

김유정 대전 가톨릭신학대학 교수

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마태 25,35)

그가 나다

몇 해 전, 이주 노동자를 위한 미사를 부탁 받고 강론을 준비하기 위해 펼친 복음 구절,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다. 장례미사 때마다 자주 접해 ‘다행히도’ 강론하기에 그리 어려운 말씀이 아니었다. ‘내 주위의 소외된 이웃을 예수님의 형제로 대하자’는 주제로 강론을 쓰려다, 감실 앞에서 ‘저를 통해 어떤 말씀을 하시기를 원하시기에 이 미사를 제게 맡기십니까?’라고 여쭙고 다시 찬찬히 복음을 읽었다. 마치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듣는 듯한 말씀이 씌어 있었다.

‘내가 굶주렸을 때’ ‘내가 목말랐을 때’ ‘내가 나그네였을 때’ ‘내가 헐벗었을 때’ … ‘내가’, ‘내가’, ‘내가’, ‘내가’라는 말씀.

“내가 굶주리고 있다, 내가 목말라하고 있다. 나그네 된 사람이 나다. 헐벗은 사람이 바로 나다!”라며 큰 소리로 외치고 계셨다.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반복해서 읽었고, 전혀 새로운 강론을 써서 ‘또 다른 그리스도들’인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현대의 사제 양성>은 ‘영성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공의회의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을 언급하며 세 가지를 제시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묵상하는 것’, ‘교회의 거룩한 신비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그리고 ‘작은이들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46항)이다.

말씀과 성사,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세 가지 현존 방식이라는 것이며 이는 각각 예언직과 사제직, 사목직에 부합한다. 이 세 가지 현존 양식 중 어느 한 가지만을 배타적으로 고집할 때 그리스도를 그곳에만 가두어 놓을 수 있다(사도 17,24 참조). 그리스도는 ‘말씀에만, 성사에만, 사람들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온 세상 어디에나, 그리고 말씀과 성사와 사람들 안에 특별한 방식으로 현존하시는 분’이시며 그렇기에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말씀과 성사와 사람들의 참된 결합인 성체성사를 당신 친히 거행한다.

아시아의 초원을 탐사하다가 제병과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에,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은 빵 대신 모든 피조물의 노동을, 포도주 대신 모든 피조물의 고난을 담아 봉헌했다.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를 읽은 후 나도 그렇게 봉헌하려 노력한다. 특별히 억압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과 생태계의 노고와 고난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봉헌되고 있는 거리에서의 미사는, 지금 봉헌되고 있는 제물이 바로 그리스도 당신이심을 가르쳐 준다.

예수는 거리에서 처형당했다

성전은 미사 봉헌을 위한 거룩한 장소다. 성전에 대한 경외심이 배타적으로 강조되어 성전과 세상을 성과 속의 이분법의 도식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님 시대 유행했던 ‘성전신학’의 잘못과 다르지 않다. 성전에 율법이 정한 제물을 바침으로써만 죄를 용서받는다고 주장했던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눈에는, 세속의 장소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음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설파한 세례자 요한의 주장은 위험한 것이었다. 그 ‘길거리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활을 시작한 예수님이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를 때 그들의 ‘신학’은 그분과의 공존(共存)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예수님은 성전 밖 ‘거리’에서 처형됨으로써 인류를 위한 궁극적이고도 결정적인 희생 제사를 봉헌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콘클라베가 개최되기 전, 추기경단의 회의에서 두 가지 교회의 모습을 말했다. 자신 안에서, 자신에 의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세속적 교회(la Iglesia mundana que vive en sí, de sí, para sí)와 자기로부터 나오는 [세상을 향하는] 복음적인 교회(la Iglesia evangelizadora que sale de sí)가 그것이다.

“성령께서는 복음의 생생한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하여 세상 안에 울려 퍼지도록” 한다(계시헌장 8항). 복음은 교회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세상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선포되어야 하고, 미사는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는, 비길 데 없이 가장 강력한 복음이다.

미사는 시위의 도구가 될 수 없다. 미사는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로지 그 자체로 가장 숭고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리미사는 시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고와 수난이 생생하게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봉헌하며, 나누어 모시는 잔치로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번째 희생 제사를 어디에서 봉헌했는지를 상기시키는 거룩한 참여의 장(場)이다.

체육관에서 서품식을 거행한다고 운동 경기가 아니듯, 거리에서 미사를 봉헌한다고 시위는 아니다.

성체성사의 거룩함은 언제나 보존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서가 왜 수난 전 날 주님의 성체성사 제정에 대한 말씀을 굳이 생략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장면만을 전하는가. 성체성사의 참된 정신은 제의적(祭儀的)인 것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물론 요한복음은 성체성사 제정에 대한 말씀을 6장에서 간접적으로 전한다. 그러나 역시 성전이 아닌 ‘산 위’에서 베푸신 기적을 통해서다.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 대의 미사를!

예수님이 그들이라고 말씀하신 ‘지금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나그네 된’ 이들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거리에서 봉헌하는 미사는 성전 미사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고도 교회의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예수님이 ‘너희와 믿는 이들을 위하여’가 아니라 ‘너희와 모든 이들을 위하여’ 당신의 첫 미사를 봉헌하셨고, 세상 끝 날까지 그 미사를 봉헌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지상을 순례하는 ‘나그네’(전례헌장 2항)인 까닭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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