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Cool – 미사는 시위 수단이 될 수 있는가? – 안나

안나 교회 내 노동자

 

‘거리미사’, 신자 만들기 수훈 갑!

2005년 5월 어느 날, 길을 걷다가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쓰면 ‘풋!’ 하며 웃을 사람이 많을 것도 같지만 그래도 그때는 분명 그랬다. 그 소리는 “네가 어찌 살아왔든 다 괜찮다. 이제 너를 그만 괴롭히렴.” 하는 위로의 속삭임이었다. 길 가다 주저앉아 엉엉 울고는 다음날부터 거의 1년 동안 새벽 미사를 다녔다. 그렇게 나의 회심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8년……. 사실상 나는 가톨릭 신자이기를 거부한다. 그때 그 목소리가 하느님일 것이라는 것과 그렇게 말을 걸던 존재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믿는 신이 이 교회 안에서 기거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확신의 지경에 이른 탓이다. 어쩜 그건 내가 교회 내 노동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08년 촛불 정국 이후 가톨릭교회는 많은 시민의 호응을 받아왔다. 비폭력저항을 내세운 거리 미사는 그때부터 용산, 밀양, 강정, 쌍용차 등 우리 사회에서 죽음으로 내몰리고 소외당하는 이웃들의 곁 어느 자리에서나 수시로 열린다. 차마 경찰들은 미사마저 방해할 수 없어 주춤했고, 그렇게 거리 미사가 싸움의 공간을 마련해주는 역할도 했다. 물론 요즘은 많이 달라져서 제주 강정에서는 미사를 하는 와중에 제대를 옮겨 다니는 지경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는 이런 사제들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한다. 종교에 회의적이던 사람들마저 종교를 갖는다면 가톨릭신자가 되겠다고 한다.

사장님과 어르신의 교회

그러나 실상 가톨릭교회도 가난한 이들의 교회만은 아니다. 이미 ‘중산층의 교회’, ‘사장님과 어르신들의 교회’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힘겨워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자 거리 미사를 하는 사제들이 있으니 각 현장을 지키는 노동자들과 단체 활동가들에게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 역시 거리 미사를 적극 지지한다.

그럼에도 나는 거리 미사의 사제들을 볼 때, 더 많은 성당의 사제들과 같은 동료 ‘신부’란 사실에 묘한 이질감을 느낀다. 돌아보아야 할 것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이다.

교회 관련 일자리는 많다. 언론사, 병원, 출판사, 유치원, 어린이집, 교구청, 사무장, 사무원, 관리인, 식복사, 등. 각 교구가 직접 운영하는 곳도 있고, 수도회가 운영하기도 하며 신자를 자처하는 개인이 운영하기도 한다. 나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각 기관과 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노동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봉사자로 인식하면서 교회 기관에서 일하면서 무슨 대가를 바라느냐는 식의 순종과 감사의 마음을 강요한다. 또 ‘내가 낸 돈으로 월급을 받는 사람이…….’ 하는 사용자 의식(흔히 공무원들에게 시민을 고객으로 서비스 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도 내 돈으로 고용한 사람이라는 생각, 자신은 해당 공무원을 고용한 사용자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런 의식을 사용자 의식이라고 흔히 얘기한다)에 사로잡힌 신자, 수도자, 성직자 등의 이용자들에 대한 감정노동까지 기꺼이 감수하고 있다.

교회 내 노동자와 교회 밖 노동자는 다른 사람들인가?

간혹 교회 내 노동자들 중 자신을 스스로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2002년 가톨릭 중앙의료원(CMC) 파업으로 해고된 5명은 아직 싸우고 있고, 노동조합을 만들기에는 너무 작은 규모의 사업장들과 사제와 수도자, 사목회의 권위에 눌려 말 한마디 못해보고 일만 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사제들이 생명, 평화와 노동, 그리고 모두의 인권을 위해 일갈하는 동안 그 옆에서 그들을 보필하는 노동자들이 감정노동을 비롯한 막중한 업무에 짓눌려 자신들의 인권을 포기하는 때도 있을 것이라는 염려와 배려가 필요하다. 가족 같은 마음으로 대하다 보니 가족처럼 막 대하지는 않는지, 공공연하게 교회 내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고, 교회 내 고용주의 처지에 놓인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노동인권교육과 노동에 대한 교회의 사회교리 문헌 공부도 필요하다. 물론 이는 교회 차원에서 시행할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노동이 자본에 우선한다고, 가난한 이들을 우선하여 선택하는 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이라고 진심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교회 내 노동자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동반되어야 한다. 물론 고통당하는 노동자들에게 마음을 쓰느라 애쓰는 몇 안 되는 사제들에게 교회 내 노동문제까지 고민하라는 건 중복된 짐을 지우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나와 내 동료와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 없이는, 그래서 교회 내 노동자들이 소리 모아 함께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노래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노동요나 구호도 그 빛을 잃을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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