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공의회, 아직 시작의 시작도 못했다 – 마산교구 이제민 신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지 50년, 반세기가 흘렀다. 한국천주교회가 공의회 정신을 살고 있지 못하다고, 공의회의 ‘사목’ 정신으로 쇄신되어야 한다고 늘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인 마산교구 이제민 신부를 밀양 명례성지에서 만났다. 이제민 신부가 생각하는 공의회 정신이란 무엇인지, 그 정신을 산다는 건 어떤 것인지 물었다. (편집부)
한국천주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살아야 한다고 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사목의 의미를 계속 강조하시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었던 요한 23세 교황도 이 공의회 자체를 ‘사목 공의회’라고 부르셨어요. 이전의 공의회는 대부분 도그마, 즉 교의를 논의하였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그런 식으로 교리를 확정짓고 반대자를 단죄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인류에게 어떻게 봉사할지, 어떻게 섬길지를 고민했어요.
우리는 보통 ‘사목’이라는 말을 본당신부가 신자들을 관리하는 일로 오해하지만, 현재 교회 안에서 사회사목이라는 말이 쓰이는 현장을 보면 대부분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잖아요? 이처럼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세상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 모두 사목이지요. 본당에서 신자 대표를 ‘평신도회장’이라고 하지 않고 ‘사목회장’이라고 부르는데, 만약 사목이 사제 고유의 영역이라면 평신도에게 그런 호칭을 쓸 수가 없죠. 이런 ‘사목’이라는 개념만 제대로 소화할 수 있어도, 공의회의 정신이 많이 스며들 거예요.
제대로 된 사목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다 보면 성직자 중심주의나 권위주의가 불편하지 않을 수 없어요. 사제들 스스로 바뀌어야 할 부분이지만, 사실 쉽지 않은 일이죠. 하지만 잘 안 바뀐다고 그 이야기를 중단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칼 라너라는 신학자는 공의회가 끝나자마자 ‘시작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아직 시작의 시작도 못했는데, 공의회가 끝난 지 50년이 지났다고 마치 공의회를 다 소화시킨 것처럼 여기고 있어요.
현재 한국천주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사실 성직자 중심주의나 권위주의 등은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하였고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평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 아주 사소하고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잘 보아야 해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제일 먼저 내놓은 문헌은 <전례헌장>이었어요. 이 문헌이 사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전례란 그리스도인의 삶이 드러나는 것이에요. 우리 일상의 삶이 전례가 되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드리는 전례, 미사가 과연 우리의 삶을 표현해 주고 있나요? 예를 들면, 요즘은 본당마다 <매일미사> 책으로 미사를 드리게 되면서 기도, 독서와 전례 모두 획일적으로 읽고 있어요.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독서와 복음도 다 눈으로 읽는 데 급급하고, 공동체가 자신들의 삶이 담긴 기도를 드려야 할 때도 책에 나온 그대로 읽고, 특별한 성인의 축일이 되어도 그 성인의 삶과 정신을 묵상할 기도나 독서를 소개하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 책이 일회용이라는 거예요. 쓰고 다음 달에는 다 버려요. 최근 나온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에 비춰봤을 때 <매일미사>를 이대로 쓰는 게 좋을까요? 이런 것부터 바꾼다면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부터 달라질 거예요. 전례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자는 건, 전례를 예전 형태로 돌이키자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의미를 되새겨야 마음가짐도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신부님의 한국천주교회 비판 중 인상 깊었던 것으로 ‘소공동체 운동’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는데요.
어디 소공동체 운동만 문제인가요? 모든 신심운동도 다 마찬가지죠. 레지오 마리애는 안 그런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크게 활약했던 수에넨스 추기경은 당시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던 성령운동이나 레지오 마리애 운동을 보고 크게 감명받아 이것이야말로 교회 쇄신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때 수에넨스 추기경이 감탄했던 성령운동과 레지오의 모습이 지금 우리 한국천주교회에서 전개되는 성령운동, 레지오 운동과 같은 형태일까 라는 질문이 생겨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하느님의 백성’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에 평신도 사도직 운동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레지오는 원래 평신도 사도직 운동인데, 이에 대해 깊이 묵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저 사제들이 본당에서 행사할 때 인원 동원하기 제일 좋은 조직처럼 여기는 것이지요. 레지오라는 단어 자체도 군단이라는 뜻이고 마리아를 군대의 사령관처럼 얘기하는데, 그런 건 문제라고 쇄신하자고 이야기하면 비판으로만 듣고 안 변해요. 그런 것들이 쇄신되면, 사실 교회도 새로워지는 거죠.
소공동체도 마찬가지죠. 제가 문제로 여긴 핵심은 소공동체가 운동이면 상관없지만, 하나의 신심단체나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성경을 읽는 운동, 복음화 운동으로 나가는 건 좋아요. 하지만 운동이 되어야 할 걸 조직화하면 결국 사제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사제가 이 구역은 왜 이렇게 안 모이고 잘 안되느냐고 하는데, 그건 이미 소공동체를 조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에요.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소공동체 운동은 구역・반으로 조직화 되어 있어서, 본당에서 레지오와 소공동체가 없으면 제대로 운영이 안 돼요. 특히 레지오 단원들에게 본당 청소나 일을 맡기면 아주 열심히 잘하는데, 군대식으로 시켜버리니까 그래요. 소공동체도 그런 모습이 되어 버리는 거죠.
현실적으로 본당에서 자발적인 소공동체 운동은 대부분 잘 안되는 게 사실이에요.
그렇죠. 소공동체 운동은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조직이에요. 행정가들이 보면 소공동체가 아주 이상적으로 보이죠.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니 얼마나 좋아요. 하지만 그 자율화라는 건 신부들이 명령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소공동체가 자율적이지 못한 것은 교회에서 구역・반으로 나눠놓고, 모이라니 모이고, 성경을 읽으라니 읽고, 이런 식으로 지시대로 하기 때문이죠. 노인과 젊은이의 관심사와 생활이 다르고, 요즘은 아파트 평수만 달라도 서로 대화가 잘 안 되는데 무슨 공감대를 가지고 생활 안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어요? 젊은이들이 우리 한 번 모여보자고 한다면, 그건 자기들의 뜻으로 모인 것이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죠. 하지만 억지로 모인 곳에서는 자발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없어요. 서로 관심사도 다르고 할 말도 없는데 무슨 대화를 나눌 수 있겠어요?
저는 되지도 않는 소공동체를 억지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걸 억지로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소공동체 운동은 평신도들이 자율적으로 한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소공동체를 만든 사람, 자리를 깔아준 사람은 결국 성직자예요. 내가 깔아준 멍석 위에서 마음껏 놀라는 것인데 이게 잘 될까 모르겠어요. 저는 형식적인 모임을 하면서 소공동체 운동이라고 하느니, 차라리 뚜렷하게 구역・반모임을 하는 게 낫다는 거예요.
요즘 한국 천주교회에서 소공동체 운동이 잘 안 되고 레지오도 점점 활동단원이 줄어든다고 걱정하는데, 그렇게 줄어드는 걸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어요. 현대인에게 맞는 새로운 무언가가 있을 것이에요. 얼마든지 우리가 할 이야기가 많아요. 그런 뜻있는 사람들, 관심이 같은 사람들끼리 할 이야기를 나누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운동이 자발적으로 생겨나려면 평신도들이 양성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식으로 양성하게 되면, 결국 이끌어나가는 사람의 생각에 많이 좌우되어 버려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래로부터의 신학, 신앙감각이죠. 제가 신학을 공부했으니 남들보다 더 하느님을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저는 그 글자가 무엇인지 알뿐이에요. 오히려 그 내용을 표현으로는 몰라도 마음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더 많은 거 같아요. 저희 어머니는 제가 말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못 알아듣지만, 그래도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그분 삶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나요. 자기 언어로 표현을 못 했을 뿐이지요. 그걸 보고 이것은 이런 것이라고 주입시키려 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오히려 다른 길로 이끌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교회쇄신을 보면 위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전부 평신도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단순하게 시작된 것이에요. 그것부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죠. 수에넨스 추기경도 평신도들이 레지오하는 걸 보고 마리아가 무슨 군대 사령관이냐고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선교 정신으로 살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을 먼저 읽은 것이에요. 근원적인 밑바닥에서부터 영성을 읽는 것을 교회의 과제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교회도 신자를 양성한다고 이것저것 가르치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시작의 시작도 못 한 경우가 많아요. 글자로만 보고 들은 것을 말로 전달하는 것과 자기 몸, 삶으로 전달하는 것은 달라요. 소공동체 모임하면서 교회에서 써 준 묵상을 그대로 읽는 것이랑 자기가 정말 묵상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르지 않겠어요? 사실 요즘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사회교리 교육을 생각해 보면, 이것도 교리처럼 가르치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요. 자칫 잘못하면 공의회 정신을 가르쳐야 한다면서, 옛날 공의회 이전 방법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자세로 자신도 모르게 돌아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태도는 바뀌지 않고 똑같은 거죠.
그러려면 교회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제3차 바티칸공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사실 한스 큉과 같은 신학자들은 2차 공의회가 끝나자마자 3차 공의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2차 공의회에서 마땅치 않았던 것도 많고, 다루지 못한 문제도 상당히 많았죠. 하지만 3차 공의회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2차 공의회의 근본인 사목, 개방, 대화, 쇄신 등의 바탕 위에서 하지 않겠어요? 이외에 교회가 무엇을 더 제시할 수 있겠어요? 2차 공의회에서는 교회를 사목, 하느님의 백성, 신비로 이해하기도 했는데, 이런 근원적인 개념을 먼저 제대로 소화시키고 나서 말을 꺼내는 게 맞죠. 3차 공의회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결국 출발점은 사목이고, 교회에 관한 본래 정신에 관한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복음의 기쁨>을 발표하셨는데, 이는 복음을 새롭게 생각하게 해 주는 것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3차 공의회는 선포만 안 했을 뿐이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죠. 복음을 재발견하니 이혼 문제도 나오고, 동성애 문제도 나오고, 많은 사목적 문제점이 나오는 것이에요. 사실 성직자가 말로만 3차 공의회를 얘기하고 여전히 성직자 중심주의, 권위주의에 젖어있다고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사람들이 왜 3차 공의회를 꿈꾸고 있는지, 무엇이 목마른지 그것부터 질문해야겠지요.
한국천주교회에 공의회 정신을 더 많이 알리셔야 할텐데, 명례성지로 오신 것이 뜻밖이에요.
사실 본당에서 있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제가 자청해서 온 것이에요. 본당에서는 소공동체도 살리고, 레지오도 살리고, 꾸르실료도 살리고, 모든 시도를 다 살려야 해요.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다 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소공동체를 하니 레지오 안 해도 된다고 하면 레지오 하지 말라고 했다고 난리가 나고, 레지오만 하고 소공동체는 안 해도 된다고 하면 교구에서 소공동체는 모두가 해야 하는 거라고 공문이 날아 와요. 저는 주일미사 한 가지만 하면 되고, 다른 것은 자신이 좋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평상시에 말하는 것하고 본당에서 사는 삶 하고 너무도 다르니, 그냥 은퇴하고 성지로 나가겠다고 청했어요. 어찌 보면 미안해요. 제가 관철시켜야 하는데 안 된 것이죠.
사실 명례성지로 오면 쉬기도 하고, 본당사목 하면서 든 생각을 글로 적기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하지만 막상 여기 와서 보니 땅도 사고 성당도 지어야 하고 할 일이 너무 많은데 교구 도움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명례성지의 신석복 순교자가 소금장수였으니까 소금 좀 팔아서 돈을 모아봐야겠다 싶어서 ‘녹는 소금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녹는 소금 운동’은 우리가 소금처럼, 예수님의 성체처럼 몸에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것,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녹아야 하는 것인데, 소금 팔아 성전을 지으면 우리는 언제 녹을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땅 다 사고 성당 다 짓고 그다음에 녹자고 하면 절대로 못 녹아요. 이게 우리 현실이지 않은가요? 그래서 이 운동의 수익금 전액은 성지 사업이 아니라 지역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 이 일대에 외국인 노동자가 많으니 그들을 위한 사업에 지원하기로 했어요. 성전 다 짓고 여유가 생겨 남는 것을 주자고 하면, 남는 것밖에 못 주어요. 우리가 평상시에 남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나요? 저는 지금 여기에서 그것부터 실천하려고 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