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운동의 영성을 찾아서 – 레지오 마리애 운동

이미영 우리신학연구소 연구 실장

한국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표본 레지오 마리애 운동

고등학교 시절 2년간 소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던 시간은 내 삶에서 가장 ‘신자답게’ 기도하고 활동하던 때였다. 소위 범생이던 나는 매일 기도하고 주 1회 2시간 이상 활동하는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 정해진 기도는 물론 틈틈이 묵주기도를 하였고, 주말이면 본당 전례봉사, 청소봉사 외 평일에도 청년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연도봉사나 환자방문 등을 다녔다. 어느 순간 기도에 마음을 담기보다 습관처럼 기도하고, 봉사활동 중에도 순수한 마음에서 하는 건지 회합 때 활동보고를 위해 하는 건지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기도와 활동을 통해 내 신심의 기초가 다져질 것이라 믿으며 지속했다. 그런 중에서도 가끔은 진지하게 기도했고, 봉사활동 후 떡볶이 집으로 달려가던 즐거움이 더 크기는 했어도 질병과 죽음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만나며 어린 마음에도 나름 진지하게 삶과 신앙의 의미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지금도 레지오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을 보면, 그 성실과 깊은 신앙심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올해 한국 진출 60주년을 맞은 레지오 마리애는 한국 평신도 사도직 운동 중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이 크며, 활동단원 수도 가장 많은 그야말로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 운동의 대표주자요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레지오 없이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한국 레지오의 역사는 눈부시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레지오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의견들이 조금씩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소공동체 운동의 확대와 관련한 부딪힘이 있었고, 그와 관련하여 레지오 마리애 운동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쇄신되지 못하였다는 안팎의 문제 제기가 있다. 또한 레지오가 교회 내 활동에 적극적인 것과 달리 사회적인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레지오 활동단원들이 점점 고령화되고 활동도 예전 같지 않다며 레지오 운동의 쇠퇴가 우려되기도 한다. 이런 레지오 마리애 정신과 역사 안에서 평신도 운동의 영성과 관련하여 몇 가지 주목할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군대, 충성스러우나 자율적이기 어려운 곳

이번 글을 쓰기 위해 몇 달간 거리 미사 참여 신자들이나 일명 ‘진보적’이라는 단체 회원으로 활동하는 분들 중 현재 활동하는 레지오 단원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과거엔 활동했더라도 현재 활동하는 신자는 없는 것이라는 대답과 함께 “그런 신자는 없을 걸? 레지오 단원들은 교회에만 충실한 보수주의자들이잖아.”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레지오 단원들이 ‘교회에 충실하다’는 평가에는 동의하지만, 그들을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는 데는 조심스럽다. 정치적 이념 지향을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구분은 ‘정치참여 금지’ 원칙을 표방하는 레지오에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 평가다. 그럼에도 흔히 레지오를 보수적이라 인식하는 것은 레지오의 명칭과 운영체계의 근간이 되는 ‘군대’라는 틀과 창설 배경이 되었던 ‘반공주의’가 한국 사회 보수주의를 형성해 온 역사적 경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레지오 마리애는 ‘성모님의 군대’라는 의미의 명칭과 로마 군단의 조직체계를 따르면서, 철저한 위계질서와 순명을 강조한다.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체계적인 조직, 교회에 대한 순명, 충실한 신심생활’이다. 최근 세례를 받은 베로니카 씨는 예비신자 교리교사였던 단원의 권유로 레지오에 가입했다. 이후 몸에 익지 않은 천주교의 기도나 전례 등 낯선 신앙생활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단원들과 회합과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본당의 일원으로 소속감이 높아진다는 점을 레지오의 장점으로 꼽았다.

반면, 최근 이사로 교적을 옮긴 노엘라 씨는 거주 지역에 소공동체 모임이 없어 대신 레지오 가입 권유를 받고 한두 차례 참석하였으나, 형식에 맞춰 진행하는 회합 방식이 답답하게 느껴져 이내 그만두었다. 특히 기도와 활동 내용을 보고하는 것이 너무나 외형적인 성과를 강조하는 느낌이라 거부감이 컸고, 회합시간에 읽는 교본의 내용도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내용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이처럼 ‘군대’라는 조직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내적 결합력은 강력하지만, 위계질서보다는 수평적인 관계맺음과 열린 대화와 소통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불편한 구조로 다가간 것이다.

2차 바티칸공의회와 레지오

레지오 마리애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새롭게 조명한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공의회보다 40여 년 전에 이미 시작하였고, 그 때문에 성직자의 고유 영역에 감히 도전한다는 불필요한 오해와 반대로 운동 초창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레지오는 평신도들의 성화를 위해 성체신심과 성모신심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공부와 독서를 강조하였다. 또한 레지오에서는 ‘영적 지도자’를 두는데, 이 ‘영적 지도자’ 역할을 사제나 수도자뿐 아니라 평신도 ‘트리뷴’들이 담당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제들이 여러 사목활동에 바빠 개별 레지오 쁘레시디움을 충분히 돌볼 수 없는 현실에서, 신심 깊은 평신도가 충분히 그 역할을 대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단원들을 해외에 파견하여 레지오를 확장시키면서, 평신도들이 해외 선교 사도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밖에도 레지오는 체계적인 단원교육을 통해 평신도 사도를 양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 운동의 창설자 프랭크 더프는 여러모로 시대와 교회의 인식을 뛰어넘는 혁신가였다. 자선활동을 주로 하는 빈첸시오회의 열성 회원이었던 프랭크는 남성들만 회원이던 빈첸시오회에 처음으로 여성 회원을 받아들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레지오 모임을 이루게 하였다. 이들은 빈곤구제를 위한 물질적 자선활동뿐 아니라, 인간 내면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 영적인 구제활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빈첸시오회와는 다른 활동을 전개했다. 일례로 당시 지역사회에 대규모 매춘이 성행하자 윤락여성들을 설득해 2박 3일의 봉쇄피정에 초대하였고, 그 일을 계기로 윤락행위를 그만둔 여성들을 위한 숙박소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빈첸시오회의 고유성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영혼의 구제라는 부분을 특화시킨 레지오의 정신이, 공의회 이전의 ‘성속이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그리고 레지오는 에큐메니컬 활동이나 이웃 종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활동을 강조하면서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하는 상호존중의 대화 자세보다는 개종을 목적으로 한 배타적인 태도에 가깝다. 또한, 초창기 교도권의 의혹과 반대에 대해 결코 교도권에 맞서지 않는다며 절대적으로 순명하고 협력하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평신도 사도직을 성직을 돕는 부수적인 직무로 이해하게 하였고 사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의존적인 모습이 되도록 만들었다.

한국 천주교회와 레지오

평신도 레지오 선교사들의 해외 파견 활동을 통해 여러 나라에 레지오가 소개된 것과 달리, 한국의 레지오 운동은 교도권이 앞장서서 도입하고 전폭 지지하며 확장된 점이 특이하다. 1953년, 광주교구장 서리였던 해롤드 헨리 현 신부는 사제가 부족하고 선교활동이 시급한 한국 교회 현실에 도움을 얻고자 레지오를 조직하였다. 당시 문맹자가 많은 현실에서 레지오 단원들은 예비신자 찰고에 필요한 12개 기도문과 320개 교리문답을 익히도록 저녁마다 소리 내어 30분 이상 낭송하며 예비신자들이 세례를 무사히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덕분에 입교자가 급속도로 늘어났고, 개인 접촉을 요구하는 사도직의 모든 활동에 레지오 단원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교회를 활성화시켰다.

특히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선교 200주년을 맞아 200만 신자를 목표로 전개한 민족의 복음화 운동은 한국 교회 역사상 최초의 전국 규모 평신도 사도직 운동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1990년까지 300만 신자를 목표로 한 복음화 운동이 뒤를 이으며 한국 천주교회 교세 성장에 견인차 구실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과정에서 신자 수 증가나 기도 봉헌의 횟수를 강조하면서, 교회의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부분이 상대적으로 더 주목받는 문제를 낳기도 했다.

한편, 한국 레지오 운동 중에는 일반적인 레지오 활동과 다른 독특한 부분이 몇 가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레지오의 장례문화이다. 수많은 동료 단원들의 기도와 연도, 특별한 장례미사 등으로 진행되는 레지오장(葬)은 레지오 단원들에게 큰 축복처럼 여겨진다. 활동단원만 레지오장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원칙 때문에, 노인 단원들도 활동단원을 고수할 정도로 레지오장은 중시된다. 또한 한국의 남성 레지오 단원들이 ‘2차 주회(酒會)’라 하는 친교의 술자리를 즐기는 것도 한국 레지오의 독특한 문화이다.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가 금주단체에 가입하여 술을 절제하고 레지오 안에도 ‘예수 성심 단주회’라는 조직을 설립하도록 권고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레지오 운동은 성체신심이나 성모신심 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도록 요청하나, 한국 레지오 운동 안에서는 그러한 지성적 장치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레지오에서 운영하도록 하는 종교학습과 토론모임 ‘빠뜨리치안회’도, 한국에서는 초창기 토론대회의 형식으로 잠시 진행되다가 1969년 이후로 거의 중단된 상태다.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의 특성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신자들이 종교적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기초적인 신학훈련도 부족하고 그러한 배움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레지오는 창설자가 기도나 피정 등 신심활동 뿐 아니라 영적독서와 토론 등을 통해 성모신심을 더 깊고 풍요롭게 했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통합적 영성을 위한 과제

레지오의 핵심 기도문인 까떼나는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을 찬미하며 부른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루카 1,46-55)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세상의 구원과 해방을 선포하는 마리아의 노래는 오늘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 운동에서 어떻게 살아 숨 쉬고 있는가?

2003년 한국 레지오 진출 50주년을 기념하며 출간한 <한국 레지오 마리애 오십년사>에서는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가 너무나 ‘영성’이나 ‘영혼’ 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과 사회 현실도 추상적으로 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게 된 것은 아닌지” 라는 성찰을 담아냈다. “정치 활동을 금하는 규정을 협소하게 해석하여 전체 공동체를 위한 정당한 사회 참여의 길마저 막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내적 성장을 위해서 불행한 일”이라며, 개인의 성화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성화를 위해서도 그 발걸음을 넓혀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교회는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죄를 뜻하는 말로 ‘칠죄종(七罪宗)’ 즉 일곱 가지 대죄라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과거 오랫동안 이 칠죄종은 교만, 인색, 음욕, 탐욕, 분노, 질투, 나태 등 개인의 죄악을 문제시했으나, 2008년 3월 교황청은 ⑴ 환경파괴, ⑵ 윤리적 논란의 소지가 있는 과학실험, ⑶ DNA 조작과 배아줄기세포연구, ⑷ 마약 거래, ⑸ 소수의 과도한 축재(蓄財), ⑹ 낙태, ⑺ 소아성애라는 ‘세계화 시대의 신(新) 칠죄종’을 새롭게 제시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질서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사회악에 대한 문제제기다. 레지오 마리애야 말로 이러한 칠죄종을 세상에 알리고 타파하는데 앞장설 수 있는 평신도 운동이다.

레지오 마리애 운동은 조직의 일치와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규율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기본 원칙 이외의 다양한 현실에는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허용하기도 한다. 레지오 운동은 완성된 결정체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개정되고 쇄신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발전의 역사를 지닌 한국 레지오 운동은 그 위상에 걸맞게 레지오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마리아에 대한 신심보다는 성모 마리아께서 지녔던 그 신심으로, 개인의 성화뿐만 아니라 세상을 성화시키는 레지오 마리애 운동의 쇄신을 기대해 본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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