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비의 희년에 생각하는 여성과 낙태 –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시다”
2015년 9월 1일에 발표된 ‘낙태죄’와 면죄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한을 두고 사람들은 사회・종교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 서한은 희년으로 선포된 자비의 해(2015년 12월 8일~2016년 11월 20일)의 사목지침으로서 희년축제 준비를 맡은 리노 피시켈라(Rino Fisichella) 대주교에게 보낸 것으로, 교황은 희년 동안 회개하는 사람들의 ‘낙태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전 세계 사제들에게 주겠다고 밝혔다.
이런 조치가 “낙태‘죄’의 엄중함을 축소시킬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많은 우려를 표했지만, 다른 편에서는 교황의 서한이 “크고도 무한한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교회법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고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 반복하는 것처럼, 낙태를 주선하는 이들을 자동파문으로 처벌하고 오직 주교만이 이 처벌을 면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비춰 볼 때 이러한 반응들은 의미심장하다. 이런 반응들이 아시아의 사회・문화와 경제 현실이라는 상황과 보편교회의 구조에 비춰 여성의 문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여성신학의 관점에서 이 서한과 관련한 논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낙태죄’와 관련한 여성들의 경험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만약 여성들이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다 얘기하면, 세상이 끝장날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여성들이 낙태와 관련해 겪는 경험과 그것에서 생기는 많은 질문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왜 여성이 낙태를 택하게 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이 결정을 내리는 데 여성들이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가?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처럼 가부장제가 팽배한 문화에서, 부부의 성관계, 가족계획, 임신과 낙태에 관한 최종 결정을 과연 누가 하는가? 가난에 짓눌려 사는 대다수 아시아 여성들은 반복되는 임신에 처한 자신들의 상황에 가난이 어떤 영향을 준다고 보는가? 낙태만이 유일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여성들을 몰아가는 또 다른 사회, 문화, 종교, 경제적 요소는 무엇인가?
여성신학은 여성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비록 교황의 서한이 낙태라는 질문에 앞서 여성들이 겪는 ‘시련’에 연민을 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가톨릭교회는 그 복잡성, 특히 그 아래 깔린 성 평등의 문제를 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낙태죄’를 젠더 문제와 관련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그 아래 감춰진 문제를 드러나게 하고 담론을 전개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문제를 좀 더 숙고하기 위해 나는 여러 아시아 국가 중 대표적으로 인도 여성의 경험을 통해, 여성이 몸과 성(性)에 관련해 겪게 되는 고통을 설명하고자 한다. 인도의 많은 여성의 경우, 신분이나 계급, 종교와 상관없이 기혼 여성들이 지닌 가치는 주로 사내아이를 낳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인도에서는 (남성 1,000명당 여성이 914명이라는 최근의 통계가 보여주듯) 성비가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는데, 지난 몇 년 동안 국가에서 출산 전 성별 진단 금지 등 법적 조치를 취하고 의식개선 프로그램들을 도입했지만 남아선호의 위험성을 인식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는 여자가 결혼할 때 가져가야 하는 지참금이 소름끼치게 부담되기 때문에 여자 아이들을 경제적인 빚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또한, 부유한 가정에서도 가족의 이름과 재산을 물려줄 남성 후계자가 필요하므로 남아를 선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 특히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종속된 이들은 아주 취약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고 자신의 임신 문제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수조차 없다.
가부장제가 팽배한 사회에서 몸과 성에 관한 문제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내가 인도 케랄라 주의 동방가톨릭 전례교회인 시로-말라바르 교회와 시로-말란카라 교회 신자를 대상으로 실시했던 조사에서, 응답자의 74.2%가 남편의 잠자리 요구를 매번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응답하였다. 여성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종교의 가르침은 어떤 상황이라도 남편의 성적 요구를 받아들이게 하는 지배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알코올 중독에 빠진 남편이나 애인이 그런 상황에서 폭력으로 위협할 때처럼 여성이 아주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남편이나 애인에게 성적으로 응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임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신앙인으로 살고자 하는 여성에게 더 큰 부담을 준다. 경제적인 압박 가운데 임신을 거듭하면서, 여성들은 종종 자신의 의지를 거슬러, 엄청난 심리적 트라우마와 건강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낙태를 하도록 내몰리게 된다.
성과 가부장적 성별 규범의 상호 작용은 강간 문제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인도와 같은 다종교 국가에서, 배우자의 강간이 범죄로 간주될 수 있는지 여부는 결혼에 성스러운 지위를 부여하는 대다수 모든 종교에서 여전히 논쟁거리다. 결혼 외에도, 카스트 제도가 공동체 간의 관계들을 규정하는 힘이 되는 상황에서, 또 종족 분쟁의 상황에서 강간은 심지어 복수나 타 공동체에 본때를 보이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밖에도 2012년 12월 델리의 강도 강간 사건처럼, 극심한 빈곤과 만연한 실업이 여성을 강간하는 폭력을 일으키기도 한다. 모든 상황에서, 여성의 몸은 이런 폭력과 그 결과를 감내해야 하고, 게다가 만약 낙태를 하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면 영락없는 죄인으로 비난받는다.
낙태와 면죄,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들
낙태 문제와 관련된 사안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서 의아한 것은 교회가 이를 주로 여성의 문제로 보고,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더 큰 책임이 있는 남성을 잊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교황의 서한도 자비를 필요로 하는 여성을 언급하며 교회의 이런 태도를 드러낸다. 간음한 여인이 광신도 무리에게 잡혀 와 비난받았던 성서이야기처럼, 낙태의 경우에도 “그 남자는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왜 가톨릭교회는 낙태와 그 결과를 사목적으로 다룰 때조차 관련된 남자나 남편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가? 이들이 낙태를 ‘주선’하였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중에 포함되어서인가?
더군다나, 9월 1일에 발표된 교황의 서한은 현재 신자의 남녀비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뤄지고 있는 교회의 비합리적인 정책 결정과 그 결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교황은 선한 뜻으로 전 세계 사제들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낙태죄를 사면하도록 하였지만, 역설적이게도 하느님 자비의 중재자는 모두 남성이고 그것을 받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여성이 남성이 가르치고 정책 결정을 하는 교도권에 전적으로 좌지우지되고, 또 이들이 원하는 때에 이들이 바라는 방식으로 중재되는 자비를 받아야 한다는 매우 부끄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게다가 그 서한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낙태 같은 단계까지 가게 된 상황에서 모든 ‘압력’을 견뎌내는 여성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교회가 여성들에게 생색내는 듯한 표현처럼 읽히기도 한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죄인들에게 주는 특별한 권리”처럼 이 서한을 보고 있지만, 서한은 이런 태도와는 상반된다.
많은 이들이 이 서한을 두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게이, 레즈비언, 이혼한 신자들처럼 교회에서 주변인으로 내몰렸던 이들에게 자애로운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교황의 서한에 대한 이 같은 평가가 이런 문제들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교회법 1398조는 낙태를 알선하는 이들에게 자동파문을 명시하고 있고, <가톨릭교회교리서> 2272조는 이를 승인하고 있다. 교황이 서한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비의 예식은 피임이나 낙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달라지게 할 것인가? 사제들은 희년 동안 낙태한 이들에게 용서를 베푼다고 하지만, 희년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느님의 자비를 인간의 계산이나 결정으로 조건 짓거나 제한할 수 있는가?
낙태와 관련된 문제를 교회 밖에서 논의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서로 나뉘어 다투고 있음이 분명하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은 세계 여기저기에서 피임이나 낙태 반대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반면, 여성운동 단체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몸과 성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선택’을 외친다. 다양한 견해를 더 잘 들을 수 있고 또 결과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주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공론의 장에서 논의하면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갖게 하는 첨예한 쟁점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낙태는 생명의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거나 가톨릭만의 문제로 다뤄져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다양한 생명과 관련된 여러 층위의 논의와 함께 다뤄져야 한다.
다뤄야 할 주요 논점은 태아의 생명을 모든 것에 우선하여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생명권 옹호론(pro-life)’ 활동가들이 심각한 곤경에 처한 수백만의 다른 생명에는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태아뿐만 아니라 난민, 이주노동자, 인신매매의 피해자, 여러 형태의 폭력을 겪고 있는 사람들, 소수자, 극도의 빈곤과 박탈에 내몰린 사람들의 생명도 신성한 것이다. 지구와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생명인 물, 공기, 식물, 동물이나 소위 생명이 없는 물질도 마찬가지로 신성하다. 이런 생명의 문제에 무관심하면서 ‘생명권 옹호론’ 입장을 고집하는 것은 부당하다. 또한 ‘생명권 옹호론’이나 낙태 반대 운동은 전쟁과 사형제, LGBTQIA 그룹과 같은 성적 소수자들을 소외시키는 일을 지지하는 편과는 함께할 수 없다.
여성에게 자기 몸에 대해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이들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여성을 자기 권리를 지닌 인간으로 인정하는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여성이 자기결정권에서 소외되지 않는 것, 또 이들이 주장하는 ‘선택’을 생명의 그물망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일부 여성운동가들이 주장하듯, 낙태는 특정한 도덕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관계적 정의’라는 정치적 이슈로 볼 필요가 있다.(데니스와 엘리스 쿠쳐, <세계해방신학포럼>, 2013년 튀니스) 관계적 정의는 생명을 연결성과 상호관계성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어떤 형태이든 한 생명에 피해를 주면 다른 생명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부분이 온전히 건강하면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과 같다. 관계적 정의는 문제를 별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지만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을 고려하면서 해결점을 찾는 것으로, 이는 문제와 개선방법 모두를 그런 관심으로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진리의 실현은 생명의 온전함을 지속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 시대는 낙태의 문제를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희년을 맞아 더 큰 자비를 전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한은 임신 초기 단계부터 생명을 없애버리는 범죄행위에 이르는 단계까지 남성의 역할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기존의 가톨릭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또한, 여성을 자비의 중재자가 아니라 단순히 자비를 받는 사람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것, 그리고 ‘죄’를 별개로 보고 ‘자비’를 특정한 시기에만 특정인만이 부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게 하는 위험에 대해서도 주위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이 서한은 교회가 남녀를 동등한 협력자로 인식하는 공동체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가톨릭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교회의 위계 구조를 넘어서는 사목 계획과 정책을 신학화해야 할 과제가 있다. 평신도, 특히 여성들을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대화에 참여시켜서 이들이 더 넓은 관점으로 인류와 하느님, 세상을 보도록 촉진해야 한다. 이는 <찬미받으소서>에서 올바로 제시한 것처럼 그리고 희년의 시기를 넘어서서 자비가 흘러넘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내적 관계성을 지닌 생명의 거룩함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코추라니 아브라함 (인도 여성신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