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난한 이들은 보수 우파에 투표하는가? – 2호 특집원고

왜 가난한 이들은 보수 우파에 투표하는가?

 

 

김항섭 (한신대 교수)

 

남미 좌파 정권의 붕괴

몇몇 라틴아메리카 연구자들과 함께 남미의 좌파 관련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남미는 한때 콜롬비아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나라에 좌파 정부가 들어섰던 터라 세계 많은 연구자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번역 작업이 순탄치만은 않다. 몇 년 전에 시작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작업이 늦어지고 있는데, 최근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미의 좌파 전선에 균열 조짐을 보인다는, 번역자로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소식까지 들린다. 지난 11월 아르헨티나 대선, 12월 베네수엘라 총선에서 좌파가 잇달아 패배하고, 오는 4월로 예정된 페루 대선에서도 신자유주의적 독재와 부패로 현재 수감 중인 후지모리 전(前) 대통령의 딸인 게이코 후지모리가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성급한 신문의 기사 제목처럼 “남미 좌파 몰락 가속화”는 아닐지라도, 남미의 정치 지형에 뭔가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2호 김항섭 원고용-남미좌파몰락1

그런데 더욱더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자들이 시장의 논리를 노골적으로 또는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기업인 출신, 또는 기업인 집안 인물이라는 점이다. 프란시스코 교종을 배출한 아르헨티나에선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12년 동안 지속된 좌파 정권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등에서 건설과 부동산업, 자동차산업, 우편과 운송업, 광업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동하는 마크리 그룹의 재벌 2세이다. 대학 졸업 후 자신의 아버지가 세운 그룹 산하 주요 기업들의 임원을 거쳤고, 1995년에 ‘아르헨티나 인구의 절반보다 1명이 더 많은 팬’을 갖고 있다는 ‘보카 주니어스’ 축구클럽의 구단주로 취임하면서 이름을 알리다가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다. 국제무대에서 미국과 당당하게 맞장을 뜨던 우고 차베스의 새로운 사회주의적 실험으로 널리 알려진 베네수엘라의 총선에서는 우파 연대 ‘민주연합회의’(MUD)가 전체 국회의원 의석의 2/3가 넘는 113석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지도자인 엔리케 카프릴레스도 부유한 유대계 기업인 가문 출신으로 그의 외가 쪽은 베네수엘라 최대 영화산업을 갖고 있다.

이들이 좌파 정권을 무너뜨리고 득세하는 데는 각기 독특한 또는 다양한 요인이나 사정이 있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남미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가난한 이들이 그들에게 표를 던졌다는 점이다. 군사독재도 아니고 민주화된 세상에서, 그것도 좌파 나름의 혁신적인 정치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에게, 보수 우파에게 표를 몰아주는 것일까? 진정 그들이 자신들의 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주도면밀하고 현란한 정치공학이 거둔 쾌거일까? 그도 아니면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적인 속성상 불가피한 일일까?

계급배반투표는 왜 일어나는가?

가난한 이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계급의 전망이나 이해관계와 어긋나는 보수 우파 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흔히 ‘계급배반투표’ 또는 ‘빈곤보수현상’이라고 한다. 계급배반투표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부자들은 자기 집단이나 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 보수 우파 정당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반면, 가난한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 자기 집단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와 배치되는 보수 우파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된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지향이나 행태를 보이는 것을 빈곤보수현상이라고 한다.

우루과이의 언론인 모랄레스(Víctor Hugo Morales)는 아르헨티나에서 재벌 2세가 가난한 이들의 표를 모아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논평하면서, 빈곤보수 현상의 원인으로 이데올로기 문제를 든다. “가난한 이들이 가난한 것은 자신의 영혼 안에 부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이 당신을 지배하는 것은 돈을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으로서 당신의 생각이 부자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이고, 이 때문에 가난한 이들은 부자에게 투표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으로서 먹고, 자고, 일하고, 산책하고, 옷을 입고, 증오하지만 부자로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점이다.” 가난한 이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서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따라서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계급의 전망에서 사고하거나 투표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진정한 해방을 가로막는,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허위의식의 한 형태로서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판했고, 관념론과 싸웠다. 그리고 《자본론》 서두에서 물신숭배를 다루면서, 이러한 허위의식이 일회적이거나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에 내재적인, 달리 말하면 구조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가난한 이들이 이러한 물신숭배, 또는 지배계급이 만들어내는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무엇이 진짜 참인지 또는 현실인지, 누가 자신들의 편에 선 정당이나 정파인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집단에 거스르는 투표를 하게 된다. 그런데도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난한 이들이 이러한 허위의식을 극복하고 역사의 주체가 되는 혁명의 가능성을 믿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고 낙관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와 달리 자본주의는 쉬이 무너지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장애와 어려움 속에서도 그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면서 점차 안정적인 궤도를 달렸다. 마르크스주의자들로서는 다소 난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카치나 그람시는 자본주의의 이런 지속가능성 또는 안정성의 원인에 대해 따져 묻기 시작했다.

특히 루카치는 마르크스의 물신숭배비판을 계승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物化) 현상에 주목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물신숭배 때문에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이 보장, 또는 최소한 연장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물건 본질에 숨겨진 자본과 노동의 과정을 무시해버리는 왜곡된 의식과정이 생겨나고, 물신화로 인해 사람들은 마치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허위의식에 빠지면서 현실을 왜곡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허위의식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가난한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계급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가질 수도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계급배반투표가 일어난다.

가난한 이들이 처한 현실에서 비롯된 보수성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단세포 생물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은 기본적으로 계산하는 존재(computo)라고 주장한다. 모든 생물은 계산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조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산은 반드시 이기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 먼저이고, 이를 위해 이기적일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 이타적인 행동이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유지ㆍ보호할 수 있다. 어찌 됐던 모랭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가난한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 또는 계급의 전망 또는 이해관계에 상응하여 사고하고 행동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사고하고 행동하기에는 현실 속에서 적지 않은 변수나 장애물들이 존재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마르크스와 루카치는 그 주된 변수나 장애물을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적인 물신숭배, 물신화에서 찾았다면, 미국의 경제학자 베블런은 가난한 이들의 삶의 조건 자체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가난한 이들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급급해서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모랭의 주장처럼 인간이 계산적 존재라면 가난한 이들의 경우 기존 체제와 질서 속에서 고통받고 있고 심지어 소외・배제당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그 체제나 질서를 뒤집거나 개선하는 변화를 원할 것이고, 그렇게 변화를 원한다면 당연히 진보적이어야 할 텐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블런에 따르면 가난한 이들이 처한 현실은 그런 합리적인 사고나 판단을 할 여건 자체가 안 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벌어 먹고살기도 힘든 처지에서 기존의 체제나 질서의 시비를 가리고 그 개혁을 위해 비판의 날을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그 체제나 질서를 따라잡는 데도 버겁다는 것이다. 그 체제나 질서를 따라잡아야 그나마 생존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한 이들은 진보나 변혁의 관점을 갖기보다는 기존의 체제나 질서에 철저히 순응하고 순종하면서 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 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해 지극히 비관적인 베블런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극히 낙관적이었던 마르크스주의가 놓친 주요한 한 측면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낙관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허위의식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적 전망이나 이해관계에 따른 판단이나 행동을 할 것이고,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베블런은 가난한 이들이 열악한 삶의 조건 때문에 이러한 판단이나 행동 자체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급배반투표 현상을 낳는 요인들

과연 가난한 이들의 열악한 삶만이 계급배반투표의 원인일까? 몇 년 전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책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토마스 프랭크가 미국에 보수반동의 물결이 몰아친 2000년 대선에서 부시가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캔자스주를 중심으로 가난한 이들의 투표 성향을 분석한 책이다. 그에 따르면 캔자스는 한때 미국에서 진보의 산실이었으나 이 대선을 전후해서 완전히 보수 우파의 텃밭이 되었다. 당시 미국 서민들의 삶은 레이건에서 부시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이를 고려한다면, 가난한 이들의 선택은 공화당보다는 민주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그 반대였다. 물론 민주당 클린턴 정부의 집권 8년 동안에도 서민들의 삶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실망감도 있고, 민주당이 어설프게 중도층을 아우르려는 정책을 채택하는 오류도 범했지만, 무엇보다도 결정적이었던 것은 보수 우파의 치밀한 음모와 기만전술이었다. ‘네오콘’이라 불리는 기독교 우파를 중심으로 갈 곳을 잃은 대중들의 분노를 낙태 등 문화 영역으로 돌리며 자신들이야말로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당이라면서 이미지를 조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수우파가 낙태 문제로 대중들의 분노를 모으지만, 결코 그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낙태 문제가 아니라 자유 시장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낙태 문제는 하나의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수반동의 지도자들이 말로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기업을 위해 행동할 뿐이다. 낙태 반대로 가난한 이들의 표를 모아서, 부자들에게 유리한 자본이득세를 폐지한다. 테러분자와 맞서 싸우자고 외치면서, 집권하면 사회보장제도를 사영화(私營化)한다고 프랭크는 보수 우파의 음모와 기만전술을 폭로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허위의식이나 물신숭배, 가난한 이들의 열악한 삶, 부자들의 치밀한 정치 공학 외에도, 계급배반투표 현상을 낳는 많은 요인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유럽의 노동자들은 제3세계에서 오는 이주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판단하면서, 이주노동자나 외국인을 혐오하거나 차별하는 극우 정당을 지지하기도 한다. 이는 프랑스 파리 노동자들의 투표 성향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파리는 크게 나눠보면, 북부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남부는 부자들이 많다. 북부 지역에서 거주하는 노동자들은 주로 제조업 노동자들과 육체노동자들이고, 전통적으로 노조에 가입되어 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집단이고 주로 좌파에 투표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민자들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일자리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하는 북부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이민을 반대하는 극우 정당의 주장에서 그 해결책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계급배반투표 현상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러한 계급배반투표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한귀영의 연구에 따르면 가난한 서민들의 계급배반투표는 한국 선거에서 오래전부터 있었던 현상이 아니라 특히 2007년 17대 대선을 기점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1997년 15대 대선 당시만 해도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는 전 연령대에서 고른 지지를 받았고, 저소득층, 자영업자 등 서민층의 지지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민주진보계열의 이러한 정치 지지 기반은 16대 대선부터 균열 조짐을 보이다가 17대 대선에서 명백한 계급배반투표의 경향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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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선, 2007년 대선, 2012년 대선의 계층별 투표 경향을 보면, 대체로 민주진보계열의 정당들은 중산층에서 더 많은 표를 얻고, 가난한 이들은 오히려 보수적인 투표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2002년 16대 대선의 경우 이회창 후보가 저소득층에서 51.8%를 얻었지만, 노무현 후보는 46.1%에 그친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그 격차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 2007년 17대 대선에서 이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데, 이명박 후보가 42.3%을 얻은 반면 정동영 후보는 고작 24.2%에 불과했다. 2012년 18대 대선에서도 박근혜 후보가 저소득층에서 60.5%를 얻었지만, 문재인 후보는 39.5%에 그친다. 이와 달리 중간소득층과 고소득층에서는 민주진보계열의 정당들이 더 높은 득표율을 보인다. 2002년에는 5.7%였으나, 2012년에는 21%에 이른다.

물론 우리나라의 모든 선거에서 이러한 계급배반투표 성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계층투표’, 달리 말하면 가난한 이들은 비(非)보수 후보를 선택하고 부유한 이들은 보수 후보를 선택하는 경향도 보인다. 예를 들어, 2000년 총선에서 강남과 울산, 2004년 총선에서 울산과 창원과 강남은 이러한 계층투표를 했다. 그리고 2011년 무상급식투표도 이와 비슷한 투표성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 보수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계급배반투표 현상도 전 연령층에 해당하기보다는, 주로 50대 이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계급배반투표 현상은 앞에서 설명한 여러 원인 외에도 우리나라 특유의 정치 현실과 관련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정치 개혁 차원에서 지구당을 해체하면서 민주진보정당계열의 지역 기반은 대체로 궤멸했지만, 보수 정당은 새마을부녀회 등 기존의 보수적인 지역 조직을 활용하여 서민층에 파고들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50대 이상의 가난한 이들은 정치적 결정에 있어 수동적이다. 이는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와 같은 외부 요인의 영향에 쉽게 노출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 조작에 이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종편 등 언론환경의 변화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의 경험이 부정적으로 인지되면서, 누가 해도 마찬가지고 자신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실망감도 작용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도 이러한 빈곤보수 현상에 크게 도움을 줬다. 기독교는 70〜80년대 성장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가난한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파고들었고, 따라서 지역에서 서민층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형교회들의 보수성이 심화되면서 가난한 신자들은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다른 보수적 가치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게 된다. 이는 미국의 상황과 비슷하다. 미국 공화당을 지지하는 가난한 이들도 대개 경건하고 신앙심이 두터우며 교회에 열심인 기독교 신자들이다.

가난한 이들의 의식화는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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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기독교는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도 해당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마르크스가 당대의 기독교를 보면서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지적했을 때 이미 예기되었던 점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는 사회적 저항이나 비판에 영감을 불어넣기도 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보면 권력을 정당화하면서 그 반대급부로 제도로서의 종교의 생존을 모색하거나 그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한다. 라틴아메리카를 식민화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가톨릭교회가 그 전형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해방신학을 비롯한 해방그리스도교는 이러한 교회 모델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가난한 이들을 더는 시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가난한 이들의 해방 투쟁에 적극 연대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러한 맥락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연대하는 것이 ‘복음의 중심’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식으로 해방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이들을 역사적 주체로 들어 올려 그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난 1989년 브라질 대선 직후, 특히 해방신학 진영 내에서 가난한 이들의 의식화나 조직화가 어디까지 가능한가라는 논쟁이 인 적이 있다. 이 대선에서 노동자당의 룰라 후보는 예상 밖의 선전으로 결선 투표에 진출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결선 투표에서 상대 우파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 사람들이 다름 아닌 해방그리스도교, 민중운동 그리고 노동자당이 그렇게 공들여(?) 왔던 가난한 이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레오나르도 보프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보프는 이러한 빈곤보수 현상 앞에서, 가난한 이들의 의식화라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좌파가 약속하는 혁명이라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너무나 먼 이야기이고 따라서 우파 후보들이 당장 지금 던져주는 신발 한 켤레나 막걸리 한 잔에 쉬이 유혹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해방신학 이후 가난한 이들을 역사적 주체로 인정하고 복음의 중심으로 삼는 것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러한 믿음 또는 원칙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기에는 수많은 변수와 난관이 있으므로 이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범했던 지나친 또는 도식적인 낙관주의는 그 자체로도 오류일 뿐 아니라, 이러한 변수와 난관들에 대한 고민과 분석을 게으르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으므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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