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수사? 그게 무엇이기에 – 2호, 비평, 시대의 소리

평수사? 그게 무엇이기에

 

양운기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수사)

2호 양운기 원고2

2015년 12월 14일 교황청 ‘축성생활회와 사도생활단성’(Congregation for Institutes of Consecrated Life and Societies of Apostolic Life, 이하 축성생활회성)이 <교회 안에서 (평)수사의 정체성과 사명>(Identity and mission of the religious brother in the Church)이라는 문헌(이하 평수사 문헌)을 발표하였다. 교황청 소식을 인용하는 외신에 의하면 ‘평수사의 정체성’과 그에 따른 ‘사명’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설명하려는 의도로 이 문헌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평수사의 수가 현저히 감소하고 있는 상황은 그동안 교회의 관심 부족이었고, 교회가 평수사 성소에 관심을 표현함으로써 평수사 성소의 증가를 촉진하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평수사로 살아가는 나에게 이와 관련된 글을 써 달라는 요구는 평수사에게 관심이 표현된 구체적 사실이니까 축성생활회성의 의도는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나는 수사에 관련된 학문을 전공한 학자도 아니고 수도생활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도 않았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 글을 쓴다고 한다. ‘수사(修士)’를 수행(修行)하는 사람이라고 본다면 할 말이 많다는 것은 수행이 모자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글은 할 말이 많은 비전문가가 쓰는 잡문 정도로 보면 타당할 것이다.

개인적 회상, 그리고 교회 내 평수사 현황과 사례

평수사와 나의 첫 인연은 중2 때였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늦은 오후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있는데 뒤통수에 뭔가 끈적끈적한 느낌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허겁지겁 밥 먹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어머니가 “운기야, 수사가 되어볼 생각 없어?”라고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시 “사람들이 신부는 하려는데 수사는 잘 하려고 하질 않아. 그러니 네가 수사가 되어볼 생각 없어?”라고 하셨다. 나는 “왜 사람들이 안 하려고 해?”라고 물었고, 어머니는 “수사니까”라고 대답했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 맺은 ‘수사’와의 인연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수사’에 대하여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수사’의 정체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어머니로부터 ‘수사’라는 말을 들은 후 내 머릿속에는 ‘수사’라는 단어가 맴돌고 언젠가는 풀어야 할 숙제처럼 박혀있었다. ‘어머니가 권했다면 좋은 것이겠지’하는 생각과 더불어 ‘수사’가 무엇인지 알아내서 가슴에서 지우든지 아니면 가슴에 계속 품든지 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10여 년 후 나는 ‘수사’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기 위해서 책을 보기 시작했고 급기야 수도원을 노크하기 시작했다. 몇몇 수도원에 “수사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수도생활을 동경하는 20대 청년입니다. 안내바랍니다.”라는 짧고 건조한 편지를 보냈고, 몇몇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설명하는 답장과 방문해 보라는 안내 유인물(와서 보시오!)이 왔다.

그렇게 나는 1986년 수도회에 입회했다. 당시 전체 회원 39명 중에 성직수사는 4명이었고 사제를 지망하여 양성 중에 있는 11명을 편의상 사제에 포함시키면 성직수사는 총 15명이었다. 반면 평수사는 20명이었고 평수사를 지망하여 양성 중인 이들 4명을 포함하면 총 24명이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현재, 회원 120명 중에 성직수사는 94명(양성자 44명 포함)이며 평수사는 26명(양성자 5명 포함)이다. 30년 동안 평수사는 단 2명이 증가했지만 성직수사는 79명이 증가했다. 엄청난 차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86년 당시 양성자 중에 성직수사 지망자는 11명이었고 평수사 지망자는 4명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1986년 이전에 성직수사 지망자(11명)가 평수사 지망자(4명)의 3배 가까웠다는 사실은, 그 이전부터 평수사 성소의 감소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수도회들의 상황도 큰 차이는 없다고 들었다. 어떤 수도회는 평수사 지망자가 아예 없다고 한다. 특히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수도원 중에는 평수사와 성직수사의 수가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수도회가 많다고 한다. 그나마 내가 소속된 수도회는 평수사 지망자가 가끔 있어서 다른 수도회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외신에 의하면 “오늘날 전 세계의 가톨릭에 약 55,000명의 수사가 있는데, 415,000명의 사제나 705,000명의 수녀보다 훨씬 적은 수이며, 42,000명의 종신부제들과는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55,000명의 수사는 사제 양성과정 중에 있는 수사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평수사의 숫자는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우리 수도원도 현재 44명이 사제를 지망하여 양성 과정 중에 있는데, 이를 그냥 수사라고 부르므로 통계상으로는 평수사의 숫자에 포함된다. 그러나 양성과정이 지나서 서품을 받으면 평수사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통계에 나타나는 수사의 수는 사제를 지망하는 사람 수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음을 구분해야 한다.

평수사, 그대는 누구인가?

수도원에 살아가는 수도자는 통상적으로 성직수사(수사신부)와 평수사로 구분되고 있다. 그런데 평수사는 ‘수사’, ‘비성직수사’, ‘평직수사’ 등으로 부르지만 그에 대하여 설명하려면 ‘남자 수녀’, ‘수녀의 남자 버전’ 등으로 부연 설명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그만큼 평수사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이 어렵다는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여러 말마디로 설명을 하고 부연설명을 해도 이해가 어려운, 매우 어색함이 있다.

나아가 평수사에 대한 정체성(신원)을 설명하고 이해되었다 해도 뒤따르는 질문들이 다양하다. ‘왜 신부가 되지 않았지?’, ‘신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은데?’, ‘신부가 되기에 무엇인가 모자라기 때문인가?’, ‘신부가 될 자격이 없어서?’ 등이다. 이 질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실제 평수사의 삶을 선택하려다가 ‘네가 무엇이 모자라서 수사가 되냐?’는 핀잔(?)을 듣고 끝내 사제(수도회 신부 또는 교구 신부)의 삶을 선택한 경우를 심심찮게 목격하기도 한다. 그래서 평수사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엇인가 취약한’, ‘기준에 못 미치는’, ‘모자란’, ‘갖춰지지 않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한편, 사람들은 내가 평수사인 줄 알면서도 자신들이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면서 입에 오르내리는 말 때문에 실수나 말버릇으로 나를 ‘신부’라고 부른다. 그 때마다 “저는 수사입니다”라고 교정하지만 그런 상황마다 교정하는 것은 지루하고 고단하고, 그래서 불가능한 일이다. 수사로 불리는 것, 수사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과정이다. 그래서 ‘수사’는 수사가 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

수사가 정체성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상황임에도 어떤 답변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은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다. 남성(수사)이 여성(수녀)의 정체성에 기대야만 설명된다는 것, 비제도적(非制度的) 신원이 제도적(制度的) 신원인 신부(제도적 성직)로 소개되는 것, 바로 이것이 평수사의 현재다. 이처럼 여러 함의(含意)가 있는 이 질문과 답변들은 현재 평수사의 정체성의 모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원(정체성)의 위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비제도적 측면의 신분을 제도화했다면 제도 안에서 그 정체성을 설명함이 타당하다. 이번 교황청의 평수사 문헌 발표가 그 일환이라고 본다.

한편, 이처럼 정체성의 모호함 중에도 수사의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한 평가 또는 해석의 말 중에 ‘한국 교회(사회)에서 평수사의 삶을 선택한 자체만 해도 큰 용기’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과연 평수사의 삶을 선택한 것은 용기일까? 평수사가 그 삶을 선택한 것을 영웅적 선택으로 오해되고 위장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말이 오가는 현실에서 우리는 평수사(수도자) 존재의 위기와 아울러 교회의 위기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교회 구성원이 각 신원의 고유한 정체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시급히 찾으라는 경고와 촉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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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야할 교황청의 평수사 문헌과 교회의 대응

그리스도교는 초기 교회부터 수도적(修道的) 삶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생활의 복음적 순수성을 갈망하던 소수의 신자 무리들로 시작된 수도적 삶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애석하게도 그 움직임은 세월과 함께 부침을 겪으며 오늘날의 수도회로 변천했고 제도화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평수사는 애초 수도회의 역사적 기반이었고 교회의 역사 안에 뚜렷한, 지울 수 없는 비제도(非制度)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볼 수 있는 수사들의 현존과 수도승들의 존재가 그것이다.

사도행전의 2장과 4장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른 형제적 공동체 생활을 재현하려는 초기 교회의 은수자들과 공주(共住) 생활에서 나타나는 ‘수도사’들의 존재와 역할이 오늘날 교회와 수도회의 뿌리가 된 것이며, 교회적이며 동시에 비제도적인 근거이기도 하다. 특히 유럽의 수호성인이며 서방교회 수도자들의 조상이라 불리는 성 베네딕도는 평수사로서 교회 안에서 그 공로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교회 안에는 역사적으로 평수사의 역사적 존재와 그 역할이 뚜렷했다.

그러기에 수사들이 감소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해를 돕는 핵심 요소도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수도회 없이 설명될 수 없고, 평수사 없이 설명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현재 평수사가 교회에서 잘 보이지 않은 집단이 된 ‘평수사 성소의 감소’ 현실이 교회로서는 무척 당황스럽고 심리적, 현실적 불안으로 작용하며 위기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번 교황청이 평수사 문헌을 발표하면서 이런 중요한 신원의 감소가 교회의 ‘관심부족이었다’라고까지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정말로 지금까지 평수사의 현실에 무관심했는가?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다른 분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주의를 덜 기울인 측면이 있을 뿐이다. 실제 교회 일부에서 평수사의 감소와 그 흐름을 주시하고 고심한 흔적이 분명히 있다. 1995년에 교황은 (성직 수도회 안에서) 평수사의 중요성과 수도회의 삶과 사도직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적절한 역할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특히 남자 수도회들은 평수사 성소의 감소에 깊은 우려를 하며 전전긍긍했고, 지금도 고심 중에 대응 방안을 찾고 있다. 그럼에도 평수사 성소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제 성소도 감소하고 있지만 사제 성소의 감소의 폭에 비하면 평수사 성소의 감소폭은 매우 크다. 또한 평수사 성소는 그 희소성으로 인해서 젊은이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교회 사목의 현장에서는 접근성의 불리함으로 인한 영향력도 적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우선, ‘평수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설명하고 그 신원을 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제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풍부하고 분명한 반면 평수사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평수사의 정체성을 조명하는 신학 작업이 선행되면 평수사에 대한 복음적, 신학적, 역사적, 시대적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젊은이가 평수사 성소로 접근할 수 있는 폭을 넓힐 수 있다. 이번에 발표된 교황청의 평수사 문헌은 이런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평수사 지위 문제

평수사 성소의 감소 문제는 남자 수도회의 노력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한계가 있고 그것은 교황(청)의 특별한 결단에 달려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교회 전체와 교황(청)의 결단, 즉 교회법의 개정이다. 현재 교회법 588조 2항은 수도회의 통치는 서품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즉 사제들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평수사는 수도회의 상급 장상(총장, 관구장, 지구장 등)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이다. 물론 평수사로만 구성된 평수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동안 남성 수도회들은 교회법 588조 2항의 규정에 대하여 교황청에 관면을 요청한 사례가 많다. 그러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일까? 신학적(교회론적, 교회법적) 이유, 그것인가? 1994년 10월, ‘세상 안에서의 축성생활과 역할’이라는 주제로 열렸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에서 교부들은 축성생활의 정체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의견을 모았다.

‘남성 수도자들의 경우, 회원 중 많은 수가 사제품을 받음으로써 그동안 지나치게 교계제도 안으로 들어와 성직화되어 왔다는 비판이 있다. 교구 사제와의 차이점이 모호해졌다. -이는 남성 수도자들의 신원의식과 수도자로서의 정체성에 불투명한 점을 초래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여성 수도자들은 자기회의 고유한 카리스마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온 반면, 남성 수도자들은 교회의 사목직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많아 그러한 노력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동시에 대부분의 남성 수도회에 있어 서품을 받은 이와 그렇지 못한 평수사간에 차별과 이질감이 항상 존재하여 왔고, 이는 비 성직수도자(평수사)들에 대한 성소를 급격히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비 성직 남성 수도자의 삶과 역할이 재평가되고 그들의 권리와 책임이 사제품을 받은 수도자들과 똑같이 보장되어야 한다. 사제직은 축성생활의 본질과는 본디 상관이 없다.’ 강우일, “1994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보고”, <주교회의 회보> 85호(1995, 1월) 40쪽.

뼈아픈 지적이다. 당시 시노드에 참여한 교부들은 남성 수도회에서 비 성직수사(평수사)의 지위가 평수사 정체성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평수사의 권리와 책임을 보장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시노드의 결과로 교황에게 건의한 것이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려면 구체적으로 교회법 588조 2항의 개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제안은 아직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수사들의 요청도 거부되고 있다.

그런데 1994년 세계주교시노드의 제안 이전에 평수사의 지위에 대하여 몇몇 수도회들의 관면 요청이 있었다.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 고난회 사이에서 표출되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7년에 작은형제회가 회원들 사이에 직무에 대한 적격성에 있어서 차이를 없애려고 총회에서 결정한 바를 최종 승인을 받기 위해서 수도회성에 제출되었으며 수도회성은 1969년 11월 27일 교령 「성직자회(Clericalia instituta)」를 발표했다. 이 교령에서 봉헌생활회의 성직자수도회에서 비 성직자 회원(평수사)은 관리직과 어떤 차원에서든지 간에 평의회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지만 특히 총장, 관구장, 지부장이나 이들의 대리 직무를 맡을 수 없다고 결정했다. 몇 년 뒤에 카푸친 수도회가 비 성직자 회원(평수사) 지부장의 대리로 근무하는 것을 허락해주도록 이 교령에 대한 예외를 요청하여 1974년 11월 12일 수도회성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그 후 수도회성은 비성직 수사가 성직자회에서 지부장이 될 수 있는 관면을 허락하였다” 이찬우, 《수도자와 봉헌생활》, 인천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3년, 62쪽

그러나 “2002년에는 미국 내 카푸친회 수사들에게 (평)수사를 관구장으로 선출할 수 없다고 말했고, 2009년에는 메리놀회가 평수사를 미국 내 장상으로 선출한 노력을 반대했다. 그것은 수사들이 엄밀히 말하자면 평신도(layman)이기 때문이다. 비록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지라도 교회법은 평신도(laity)가 장상이 되는 것을 금한다.” 장상은 봉사하는 자리라고 볼 때, 평수사가 장상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은 평수사(평신도)는 교회와 세상에 봉사할 자격과 능력이 없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신학적으로, 즉 ‘교회론적, 교회법적(수도회의 본성) 체계가 평수사에게 장상직을 허용할 수 없다’면, 1994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한 대의원 주교들은 신학적(교회론적, 교회법적) 소양이 없다는 말인가?

이처럼 여러 수도회들이 교황청에 관면을 요청한 이유는 비 성직자 회원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평수사의 어느 한 부분, 즉 지위는 제외하고 복음적으로나 영적으로만 해석해도 괜찮은 것이라면, 사실 그 지위가 하등의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 성직 수사의 정체성은 지위와 더불어 영적, 교회적, 신학적, 사회적, 공동체적, 시대적, 조직적 등을 통합적으로 아울러 답변해야 하는 본질적인 것이기에 여러 성직자회들이 관면을 요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교황청은 수도회들의 이런 노력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왜 교황청은 수도회들의 관면을 받아들지 않는가? 그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라서 여기서 더 깊게 논할 수가 없다.

지나친 성직중심주의와 평수사 성소 감소의 상관관계는?

평수사 성소의 감소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그를 해결할 방법이 수도회의 권한으로 불가능하지만 그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현재 가톨릭교회의 구조에서는 그렇다. 현재, 평수사는 자신의 신원을 설명하는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정체성의 모호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고 그 결과는 평수사 성소감소라는 위기 상황에 있다. 한편, 사제는 현실 안에서 차지하는 비본질적이며 과도한 사목적, 현실적, 세속적 영향력 강화로 인한 만성피로상태에 있다. 만약 이 영향력이 축소되는 변화가 온다면 사제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도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것 같다.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교회 전체의 측면을 염두에 두고 예를 들어본다면, 양쪽의 힘의 균형이 비슷할 때 그 기능이 유지되는 시소(seesaw)와도 같다. 그 힘의 균형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시소의 기능은 매우 제한되고 불안한 상태로 기우뚱거리는 위기를 맞는다. 최근 교황께서는 지나친 성직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수도회의 평수사 지위 개방의 문제도 광의(廣義)로 본다면 ‘성직중심주의’와 맞물려 설명되면 이해가 수월한 측면이 있다. 성직중심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정의도 필요하지만, 일반적으로 회자(膾炙)되는 성직중심주의에 대한 이해는 그 단어의 개념정의가 분명하지 않음에도 공식・비공식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 교황이 공공연히 성직중심주의에 대한 언급을 한 사실은 성직중심주의가 교회 안에 실재하고 있고, 또 그 안에는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 측면이 있다는 의미가 공식화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수사 성소와 지위 문제는 단순히 수도회 평수사의 지위 문제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의 ‘성직중심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며 교회가 시대적 징표와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지위란 무엇인가?

“지위란 무엇인가?” 공동체의 후배 성직수사에게 물었다. 대답은 이렇게 돌아왔다. “권력이고, 힘이고, 잘 쓰면 약이고 못쓰면 독이고, 남자들이 본능적으로 집착하는, 그 본능과 싸우는 수도자도 쉬이 떨치지 못하는 것.” 또 물었다. “평수사에게 상급 장상의 지위가 개방된다면 평수사 성소의 감소가 완화될까?” 돌아온 대답은 이렇다. “분명히 연관이 있다고 본다. 선배 평수사들 모범이나 롤모델이 얼마나 중요한데! 만약 권한이 주어진다면 분명 유의미한 변화가 있을 것이다.”

나는 평수사인 나의 신분을 수행자(修行者)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 내 생각으로는 수사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형제(Brother, 가톨릭교회의 축성생활자)와 동양의 수도(修道)적 전통의 혼합형인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수행(修行)자에게 지위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를 다방면으로 숙고한다. 나아가 지위의 높고 낮음이 수행에 영향을 미치고 장애가 되는가를 생각해본다. 그래서 후배에게 ‘지위란 무엇인가?’를 물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생활(靈性生活)의 영역에서, 수행(修行)의 영역에서 ‘차별과 이질감, 또는 권리와 책임’이란 말이 성립되는가? 완덕(完德, spiritual perfection)을 향한 삶에서 지위는 과연 어떤 영향이 있는가? 이 대답은 매우 주관적 판단이 필요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신학적이고 과학적이라야 하며,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주목해야 한다.

고대, 중세의 독수자(獨修者)는 비제도적(非制度的) 영역에서 홀로 수행을 했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자신만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갈고 닦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도생활은 교회라는 제도(시스템)의 분명한 영역 안에 있어서 수도자의 신분이 교회의 법과 제도의 해석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살아가고 그와 더불어 완덕을 추구한다. 그리고 한 인간이 지닌 조건은 그 법과 제도의 해석아래서 자신의 인격적, 존재적 의미를 찾아 나가기도 한다.

따라서 ‘지위’란 한 사람의 존재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결국은 완덕을 향한 길에서 정서적,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로 이런 측면을 교황청은 인정하면서 평수사 문헌을 발표한 것으로 생각한다. 축성생활에 대해 40여 년을 숙고한 교황청이 새로운 문헌을 발표한 이유는 바로 이런데 있을 것이다.

평수사, 세상과 시대의 불침번

2호 양운기 원고`

교황청이 이번에 발표한 평수사 문헌은 평수사의 실재를 인식하고 그 신원과 사명을 교회구성원들에게 인식시킬 수는 있지만, 수적 증가(수치상의 상대적 회복)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교회가 평수사 성소를 증가시키기 위해 교회법을 개정하여 평수사에게 ‘지위’를 개방 하더라도 평수사 성소는 급격히 증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오래 전 하락하기 시작하고 어느 경계를 넘어서버린 평수사 성소는 그냥 소수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결코 평수사 성소가 소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역사성이란 그런 것이며 역사적 실재(實在)이기 때문이다. 특히 본질(本質)을 추구하는 특성이 있는 집단이나 계급일수록 그 세력의 실재(實在)적 힘과 상관없이 생명력이 있다. 외적인 형식과 제도가 내면의 본질과 내용을 압도한 사회에서는 비제도적 실재(非制度的 實在)일수록 더욱 그렇다.

가끔 이른 새벽, 아직 세상이 눈뜨지 않은 시간, 어두컴컴한 성당 구석에서 십자가를 응시하고 있는 선배 수사를 발견한다. 소름이 돋는다. 왜 저 사람은 세상이 잠들어 있는 지금 깨어있는가? 세상의, 시대의 불침번인가? 불침번에 지위가 있던가? 나는 불침번에 지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지키는 것이다. 온 우주와 칠흑 같은 어둠과 고독과 싸우며 새벽을 열기위해 불침번을 선다. 불침번은 끝내 새벽을 열고 뒤안길을 돌아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이 올 때면 다시 불침번을 반복한다.

평수사에게 ‘지위’가 개방된다면 그것은 당연히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 개방은 불침번을 더 잘하기 위한, 더욱 열정적으로 봉사하기 위한 개방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 앞에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일이다. 세상에 혈혈단신(孑孑單身) 던져졌던 그분의 생애에서 ‘지위’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우린 지금의 교회에서 행정과, 조직, 제도, 시스템의 틀을 인정하고 살아간다. 이 틀이 견고할수록 시대는 불침번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평수사에게 ‘지위’가 개방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나 우리의 시선이 시스템과 틀을 향하기보다 스승 예수님의 생애에서 눈을 떼지 않은 불침번이라야 한다. 우리가 응시해야할 ‘틀’은 ‘불침번’을 도와주는 역할의 ‘틀’이라야 한다. ‘틀’은 ‘틀’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침번의 역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갈릴래아를 주목했고 주된 활동 무대였다. 제자들을 부른 곳이고 부활하여 달려간 곳이다. 그곳은 핍박받고 착취당하고 억울함이 있는 비루한 곳이다. 스승은 여기서 눈을 떼지 않았다. 평수사에게 장상의 지위가 개방된다 해도 스승의 눈을 떼지 않았던 곳, 그곳의 사람들, 그런 것을 응시하는 지위라야만 정당한 지위가 된다. 스승이 몸을 던져 지키려 했던 그곳과 그곳의 사람들을 향한 불침번의 임무를 잘 하기 위한 지위일 때라야 수행자에게 걸맞은 지위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후배의 답변처럼 ‘독’이다. 그래야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기교회 신자들의 복음적 순수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

2년 전, 집에 갔을 때 누워계신 어머니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 나에게 ‘수사’가 되라고 했어?”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가 다시 말했다. “어머니, 신부가 많다고 해도 아직도 더 필요해!” 그런데 어머니는 딱 한마디로 또렷하게 답했다. “수사는 더 적어.” 수도원 밥을 30년 먹었고 50대 중반에 들어선 나는 지금도 어머니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힘이 다 빠져 말소리가 적은 어머니는 90세이시다. 난 역시 수행자는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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