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갈등의 중재자로서 소도의 역할-2호, 비평, 시대의 소리

사회 갈등의 중재자로서 소도의 역할

 

이도흠 (한양대 교수)

2호 이도흠1

  1. 또다시 섬이 된 한상균 위원장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로 피신하였다. 불교는 피신한 중생을 내치지 않는다. 유마경에서는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고 했다. 불교 교리의 핵심은 연기와 자비다. 나와 타인이 깊이 연관되어 서로 조건과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임을 깨닫고 고통받는 중생에 대하여 동체대비의 자비심을 발하지 않는다면, 이미 불자가 아니다. 한상균과 민주노총은 이를 믿고 조계사 관음전에 몸을 맡겼다. 이를 두고 보수언론과 보수진영은 무자비한 언어폭력을 행하면서 한 위원장과 조계종단을 압박하였다. 이에 종단이 흔들리고 일부 신도들이 한 위원장을 내쫓으려 하였다. 보호하며 중재에 나서던 화쟁위원회와 도법 스님마저 이에 가담하여 한 위원장에게 자진출두할 것을 종용하였다. 필자를 비롯하여 몇몇 불교 시민단체의 대표와 회원들이 한상균 위원장을 내치지 말라는 성명서를 내고 기자회견을 하고 법회를 열고 직접 몸으로도 막아 보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경찰이 13년 만에 조계사를 침탈하였고, 이에 자승 총무원장은 대외적으로는 중재자인 척하면서 실은 한 위원장을 재차 압박하였다. 결국, 한 위원장은 쫓기다시피 조계사를 나와 경찰에 체포되었다.

조계사는 소도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한상균 위원장과 민주노총은 또다시 섬이 되었다. 2013년 2월 11일의 시점에서 코오롱은 2,912일, 영남대 의료원은 2,438일, 콜트콜택은 2,202일, 재능교육은 1,878일, 쓰리엠은 1,358일, 대우자동차판매는 749일, 유성기업은 632일, PSMC(구 풍산마이크로텍)는 462일, 골든브릿지증권은 292일, JW생명과학은 239일째 농성 중이었다. 이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비타협적이고 전투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본이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국가가 일방적으로 자본의 편에 서서 노동자를 탄압하고, 보수 정당과 자유주의 야당이 노동 배제적 정치에는 야합을 하였고 시민사회도 이에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목숨을 걸고 수백 일을 고공농성을 하고 수십 일을 단식을 하여도 해결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지독한 노동배제’ 속에서 늘 섬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마지막 피신처로 택한 조계사마저 이 배제에 가담하였다. 박근혜 정권과 보수언론은 물론, 종단과 화쟁위원회 또한 홍수를 피해 온 난민을 홍수 속으로 밀어버린 업(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 지금 국가는 갈등의 조정자가 아니라 조장자

인간은 선과 악, 이기와 이타가 공존하는 유전적 키메라(genetic chimera)다. 리차드 도킨스의 지적대로, 인간 또한 지구상의 생명체 가운데 하나로서 자신의 유전자를 확대하는 목적만을 수행하는 이기적 유전자로 이루어진 생존기계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타적 협력을 해 왔고 거울신경체제(mirror neuron system)를 통해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선한 일을 할 때 뇌가 보상시스템을 작동하도록 진화해 온 존재다. (한 원시인이 홀로 사냥을 나가서 한 달에 평균 3마리를 잡았는데, 10명이 짝을 지어서 나갔을 때 평균 40마리를 잡았다면, 이 경우 이기와 이타가 공존할 수 있다.) 인간은 이어서 언어로 소통하고 의미를 따라 실천하고 죽음을 인식하면서 유한성과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하여 추론하거나 상상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 앞의 세계와 현실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하고 실천한다. 인간은 다양한 가치를 향유하며, 자신의 신념과 조건에 따라 그 가치 가운데 한, 두 가지를 우선적으로 지향한다.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이해관계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자 사회적 존재, 실존적 존재, 심미적 존재, 초월적 존재이기에, 한 개인 안에서도 본능에 따라 움직이려는 자아, 타인을 의식하고 사회적으로 협력하려는 자아, 언제인가 죽는다는 유한성에 대해 인식하여 ‘지금 여기에서’ 의미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 결단하며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려는 자아, 더욱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려는 자아,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여 더 거룩한 것을 향하여 거듭나려는 자아가 충돌한다. 그러기에 인간사회에서 갈등은 필연이다. 언론을 비롯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갈등을 사회 혼란이나 국가혼란으로 동일시하며 불안해 하지만, 갈등의 표출과 대립이 곧 사회불안은 아니다. 유신 정권 초기에 국민 대다수가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를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국가에 기꺼이 동원되었을 때, 독재수호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에 갈등이 없었다. 그처럼 닫힌 사회에서 갈등은 잠재된다. 짐멜의 말대로 갈등은 그 자체가 사회적 얽힘의 한 형식이며, 이의 표출은 열린 사회의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기에 대립과 갈등은 나쁘거나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통합과 발전의 원동력이다.

공동선을 구현하는 최고의 통치체제로서 국가는 다양한 집단의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는 위상을 갖는다. 하지만, 이제 국가는 이 의무를 방기하면서 스스로 정당성을 상실하였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와서 국가는 자본과 유착관계를 맺었고 이에 보수언론, 친미 · 친정부 종교집단, 어용지식인이 동맹을 맺었다. 국가-자본-보수 언론-친미・친정부 종교집단-어용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카르텔은 국가 권력기관, 언론, 야당, 시민사회를 통제하거나 포섭하여 이들의 견제를 무력화하면서 ‘괴물’이 되었다. 이 카르텔은 시민과 노동자에게 여러 종류의 폭력을 가하였다. 기업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아니라 극단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노동자를 해고하고 이에 저항하면 용역깡패를 동원하여 폭력을 휘두르고 수십억 원의 손배소 · 가압류를 청구하여 이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고 희망마저 꺾어버린다. 신자유주의 제도와 비정규직법은 이들이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봉쇄하고 ‘피할 수 있는 모독’을 가하고, 사법부는 자본과 국가의 편에 서서 판결을 내린다.(구조적 폭력) 사회와 언론은 이들을 ‘빨갱이’나 ‘과격폭력분자’, ‘경제혼란자’로 매도하는 데 주력한다.(문화적 폭력)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들어진 것도, 현 정권이 노동개악을 단행하는 것도 실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만인 사이의 투쟁이 된 핵심 요인은 이윤 때문이다. 자본가가 산업재해를 남발하면서까지 노동자를 극단적으로 착취하고 억압하고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때로는 전쟁까지 불사하는 것은 오로지 이윤 때문이다. 이 이윤을 늘리는 방법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는 것이다. 주지하듯, 유기적 구성이란 생산수단을 구입하는 데 지출하는 불변자본과 노동력을 구입하는 데 지출하는 가변자본을 기술적으로 구성하여 가치의 구성에 반영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기계와 기술을 도입하여 이의 구입비를 늘리고 대신 노동력을 구입하는 데 드는 가변자본을 줄이면, 전체 자본 중에서 가변자본의 비율이 낮아진다. 자본가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며, 그럴수록 산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구조가 바뀐다. 이때 전체 이윤의 양은 늘어난다. 기계에 많은 비용을 투자한다 하더라도 자본가는 고용을 줄이고 임금을 낮추면서 반대로 노동 강도를 높여 잉여가치를 더욱 많이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윤율은 저하하는 추세에 이른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이윤율의 하락은 노동자가 적게 착취되기 때문이 아니라 사용되는 자본에 비해 사용되는 노동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일어난다.”

1869년에 40%가 넘던 이윤율은 전쟁 등의 시기에 일시적으로 반등이 있기는 했지만 점진적으로 저하하였으며, 이제는 한 자리 수까지 하락하였다. 현재 이윤율은 1930년대 대공황 때보다 낮다. 게다가 세계의 정부 부채는 59조 달러에 달한다. 이는 세계총생산(GWP) 71조 달러의 80%가 넘는다.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2030년대나 2040년대에 이윤율이 0%에 이르고 자본주의는 작동을 멈출 수도 있다. 이에 자본은 가장 손쉽게 이윤을 올리는 방식인 구조조정에 혈안이 되었다. 쉽게 해고하고 그 자리를 기계나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절반의 임금만 주어도 되는 비정규직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국가는 일방적으로 자본의 편에 서서 노동자를 탄압하고, 구조조정을 더욱 손쉽게 하는 제도적 뒷받침을 행하고 있다. 노동개악도 그 일환이다. 정도 차이만 있을 뿐, 국가는 앞으로도 갈등의 조정자가 아니라 조장자로 기능을 할 것이다.

2호 이도흠2

  1. 종교의 소도적 기능의 상실과 대안

아득한 옛날부터 인류는 소도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곳은 한없이 부족하고 미천한 인간이 중개자의 매개를 통하여 신과 만나는 신성스런 곳이다. 실존적 불안에 더하여 세계의 부조리로 불행을 겪는 인간이 초월적 존재의 힘을 빌려 다시 삶의 평안을 찾으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신께 자신을 맡기는 곳이다. 세속에서 천박하게 살던 인간이 이를 초월하여 더 거룩한 의미를 찾고 실천하는 초월의 영역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존재의 완성을 지향하는 곳이다. 유한한 인간이 언제인가 죽는다는 인식을 하고 영원성을 좇아 안식하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어떤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서 탐욕과 이기심에 불타던 인간이 이를 승화하여 거듭나는 곳이다. 그러기에 왕들도 이를 침범하지 못하였다. 아니,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는 능력을 가지고 갈등을 해결하고 사회통합을 행하였기에 왕들도 이를 치외법권으로 인정하여 주었다.

소도는 일종의 빈틈이다. 무위(無爲), 이와 같은 자연(自然)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빈틈[虛]를 만들어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냇물에 오폐수가 1톤이 버려지는데, 그 냇물이 흐르면서 이온작용, 미생물의 물질대사, 식물의 흡수 등으로 자연정화하는 양이 1톤보다 몇 리터라도 넘는다면, 그 몇 리터의 빈틈에 의해 냇물은 늘 맑게 유지가 되어 버들치와 같은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친다. 하지만, 이 빈틈이 사라져버리면 냇물은 급속도로 오염된다. 아무리 건전한 집단이라도 극소수의 타락하거나 죄를 짓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다 하더라도 소도가 제 기능을 하는 곳에서는 이런 일들은 집단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해프닝으로 그치고 만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성황당을 중심으로 의례를 행하는 마을에서는 범죄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화와 자본주의화 이후 종교는 점점 소도로서 기능을 상실하였다. 독재정권과 신자유주의 체제를 거치면서 남은 빈틈이 아예 증발해버렸다. 근대화는 이성과 과학의 이름으로 신을 미신과 주술로 전락시켰다. 자본주의 체제는 대중들이 신 대신 돈을 더 섬기게 하였고, 성직자와 수행자들도 시나브로 신과 돈이 마주쳤을 때 후자를 택하게 되었다. 독재정권은 종교를 이데올로기적 선전과 선동, 득표와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종교지도자들은 권력과 돈, 때로는 헤게모니 유지를 위하여 정권과 야합하였다. 제국은 제3세계를 더 욱 저항 없이 수탈하고 자본주의 시장체제를 효과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전통 신앙을 기독교로 대체하고 타락한 권력과 유착관계를 맺고 이에 저항하면 학살과 다양한 폭력을 가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기독교를 이데올로기로 삼아 현대판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고 있다.

항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불교는 일제 강점기에 천황을 떠받드는 황도불교(皇道佛敎)를 표방하고 유신시대엔 ‘호국승군단’을 창설하였으며, 기독교도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독재정권과 야합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제국 지배와 자본주의 시장 확대의 첨병 구실을 하였다. 명동성당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나름대로 소도 구실을 하다가 정진석 추기경 이후 이마저 포기하였고, 이후 조계사가 이 역할을 떠맡게 되어 필자가 노동자쪽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조계사쪽에 몇 차례 보호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유성기업, 철도노조 등의 피신에서는 내치지 않았지만, 이번에 조계종단은 처음부터 보호보다 ‘관리’에 치중하여 사실상 감금하였고 한 위원장에게 자진출두를 압박하였다.

이제 한국 사회에 마지막으로 남은 소도가 없어졌다. 이는 빈틈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 전체를 자체 정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사라진 것이다. 피신자라는 거울을 통하여 피신자와 반대편에 서 있던 정권, 보수언론, 친미・친정부 종교 지도자, 어용지식인들도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장을 상실하였다. 정권은 부패와 타락을 막아 권력을 더욱 증대할 기회를 잃었다.

우주는 137억 2천만 년 전에, 플랑크 스케일(Planck scale)이라는 10⁻³⁵미터의 공간에서 플랑크 시간(Planck time)이라는 10⁻⁴³초 동안의 짧은 시간에 양자요동에 의하여 대폭발과 팽창이 일어나서 만들어졌다. 35억 년 동안 이루어진 생명의 탄생과 진화에 신이 간섭한 흔적은 없다. 우주의 창조와 생명의 창조와 진화는 성경과 불경에 묘사된 것과 다르다. 과학적으로 보면, 신은 ‘만들어진 허구’다. 그럼에도 신은 없어서 계신다. 죽어야 할 것은 인간의 실존이나 초월, 완성과 별 관련이 없는 실체로서, 최고의 존재자로서, 우주와 생명의 창조자로서 신이다. 내 안에 없음에도 우리가 세속을 초월하여 완성을 지향하고자 할 때, 저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우러나는 영적인 울림, 거룩한 것을 만나는 순간의 존재의 떨림, 타자를 구원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환희심이다.

이제 우리는 신의 개념부터 과학과 주변 사회에 맞게 바꾸고 성경과 불경도 재해석해야 한다. ‘우주와 생명의 창조자로서 신이 사라진 시대의 없이 계신 신’의 개념을 정립하고, 교리가 제국과 정권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제국 및 정권과 창조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 틀에서 명동성당과 조계사만이 아니라 각 지역마다 대표적인 종교시설이 소도로서 제 구실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종교 지도자들이 정권과 가까이 할수록 권력을 상실하는 역설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정권과 야합할수록 종교의 권위와 국민의 자발적 지지로부터 얻어진 권력을 상실하며 정권도 가벼이 알고 함부로 대하게 된다. 우선 권력지향적인 종교지도자들이 스스로 참회하고, 그러지 않는다면 이들을 신도들이 연대하여 내처야 한다. 피신자들이 소도로 알고 찾아올 수 있도록 늘 대중의 고통과 함께 하고, 일단 피신해 오면 성직자와 수행자들이 신의 이름으로 피신자와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각오로 침탈하려는 권력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 그럴 때 종교는 피신자를 보호하면서 국민의 지지로부터 생긴 권력을 되찾고 정권을 견제하며 종교의 권위를 회복하고 안으로는 자신을 정화할 수 있다. 소도는 피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호자를 위한 마당이다. 사회는 소도를 통해 갈등을 중재하고 자체정화할 수 있다. 권력과 자본은 거울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소도가 있을 때 없이 계신 신은 우리의 영혼에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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