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희년,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 곁으로 / 강우일 주교 인터뷰(2호)

자비의 희년,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 곁으로

–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상처 받은 이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상처에 위로의 기름을 부어 아픔을 덜어 주고 자비로 감싸 주며 연대와 세심한 배려로 치유해 주라”(『자비의 얼굴』 15항)는 부르심의 시간인 ‘자비의 희년’이 시작되었다. 한국 사회에 첨예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글과 강론으로 신학적 성찰을 내놓는 교회 장상 강우일 주교를 만나, 한국천주교회가 하느님의 자비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물었다. (편집부)

2호 강우일인터뷰3

한국 사회와 교회가 이 ‘자비의 특별 희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동안 교회에서 많이 가르쳐온 것이 ‘자비’이지만,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이렇게 ‘자비의 희년’으로 선포하신 데에는 그냥 추상적이고 단순한 ‘자비’를 말씀하시려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교종께서는 현시대가 너무 안 좋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종을 의문을 느끼면서, <복음의 기쁨>부터 시작해서 계속 굉장히 구체적인 지적을 많이 하세요. <찬미받으소서>에서도 환경문제를 비롯한 세계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시죠.

그 연장 선상에서 ‘자비의 특별 희년’이라는 것은 정말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그 기쁨과 충만, 조화를 다시 회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문제 제기가 들어있다고 봅니다. 성서에서 희년이란 모든 빚을 탕감하고 원초적인 하느님의 창조를 회복시킨다는 겁니다. 역사상 이루어진 적은 없지만, 그런 복음의 이상을 향해 우리가 현실 안에서 조금 더 노력해보자는 제안을 전 세계적으로 하신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자비의 희년을 그저 성지순례나 고해성사만 보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짐을 벗겨주는 일을 하자는 초대를 하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기사를 보니, 세계의 가장 부유한 62명의 슈퍼 부자들이 세계 인구 하위 50%가 가진 재산과 맞먹는 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요. 상위 1%의 부자가 나머지 99%가 가진 부보다 더 많다고 하구요. 작년 말 우리나라 통계에서도 상위 10%의 부자들이 전체소득의 66%를 가지고 있고, 하위 50%의 사람들은 1.9%의 재화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더라고요. 이는 세계의 구조가 뭔가 크게 잘못 작동하고 있고, 대한민국은 그 구조의 폐단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거 같아요. 이걸 어떻게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암담한 부분이 있는데, 그래도 교회가 그러한 현실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느끼고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비정규직이 계속 급증하고, 정부는 끊임없이 노동법 개혁이라고 하면서 결국 비정규직을 더 늘려서 기업이 자유롭게 고용을 유연하게 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어요. 이는 결국 기업이 살 수 있도록 노동자들을 희생시키겠다는 거죠.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정치・경제 지도층의 사고가 근본적으로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 그래야 국가 경제도 산다.’라는 대원칙 하에 정책을 세워 왔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게 지금 현실 속에서 증명되는 것은 이런 통계로도 나타나는 거죠. 국민들이 실제로 체감하는 것은 하위 50%의 삶을 사는 것은 갈수록 힘들고 여러 가지 면에서 고통스러워지는데, 그런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교회가 본격적으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죠.

경제는 경제학자들이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하고 바꿔야 하겠지만,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 젊은이들의 좌절감과 같은 것을 우리 교회가 같은 눈높이에서 느낄 수 있는가가 우리에게 숙제인 거 같아요. 제가 비록 경제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경제라는 게 그냥 화폐로써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관여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되죠. 제가 요즘 19세기 말 사상가인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생명의 경제학》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최고의 부(富)는 ‘사람’이라는 것이에요. 숫자만의, 화폐만의 경제를 가지고서는 이 세상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어요. 결국, 가장 바람직한 경제학이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도록 설계하는 게 올바른 시스템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벌어도 그 화폐를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돈을 벌어야 제대로 부를 늘려가는 거라는 이야기를 이 책은 하고 있어요.

교회라도 나서서 우리 국민과 신자들을 향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나라와 경제를 바르게 키워가는 것인지 성찰을 하도록 돕고,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아오는 식의 경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느끼고 알아야 하도록 도와야지요. 교종께서도 <복음의 기쁨>에서 경제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교종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우리 모든 교회 공동체 사람들이 제대로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복음을 살기 위해서, 지금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지배하는 경제에 관해 좀 더 공부하고 성찰하며 우리 삶의 자세를 바꿔가는 그런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보다 자본이 우선이 되는 현시대의 문제점에 대해 여러 지적을 하셨는데, 제주교구는 그 현상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구장으로서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계시는지요?

지금 제주도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제2공항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12월 13일 ‘자비의 문’ 개문 미사를 하면서 제2공항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외부 자본을 끌어들여서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고 투자하게 되면 잘살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렇게 해왔지요. 그 일환으로 현재 공항이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제2공항을 건설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제주도민 중에서도 상당수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행정가들도 당연히 그렇게 추진하며 제2공항을 발표했지요. 그런데 우선 당장 해당 지역에 있는 주민들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밭일 하고 살던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준다고 한들 어디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역 주민들의 그런 상황이나 의견 등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행정에서 후보지 선정하여 발표해 버리면, 제주도민 과반수 이상인 70%가 찬성을 한다 해도 소수인 그곳 지역 사람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가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죠.

지금 제주도는 중국 사람뿐 아니라 서울 등 육지 사람들이 다 여기에 투자를 해서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예전에 제주도민들이 1억 정도면 살 수 있던 집이 2~3억을 줘야 하는 상황이 되니, 육지에서 재개발 때문에 원래 살던 주민들이 쫓겨나고 이사 다니고, 또 그곳이 재개발되면 쫓겨나는 그런 악순환이 지금 제주도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지금 집 없는 제주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리고 제주에 사방에서 관광객이 몰려오는데, 이들이 쓰레기를 잔뜩 버리는 통에 전국에서 1인당 쓰레기 배출량 1위인 지역이 바로 제주도에요. 이런 걸 좋아해야 하나요? 우리가 제주의 현황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며칠 후 도지사가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도지사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더군요. 저는 도지사께 이렇게 말했어요. 제주도의 고유한 문화 가치를 지킬 때 사람들이 제주도를 오고 싶은 거지, 이곳에다 아름다운 바닷가의 풍경을 망치면서 리조트나 고층 호텔을 만들고 그러면 제주도의 가치가 떨어진다고요. 지금도 제주도에 1년에 1,200만 명이 들어오는데, 제2공항이 생겨서 2,400만 명이 들어오게 되면 어떤 상황이 될지 그런 것을 좀 생각하면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하게 말하기는 했는데, 과연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겠어요. 도지사가 최대한 제주의 고유한 자연유산을 지키기 위해서 무작정 고층으로 건축하는 건 억제하겠다는 이야기는 하더라고요.

사실 제주도민들부터 막연하게 외부에서 돈을 끌어와서 발전시키면 제주가 발전하고 우리가 잘살게 될 것이라는 착각, 환상, 신화에서 깨어나도록 좀 정신을 차려야겠죠.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중심가에 집을 많이 짓고 하니, 이제 와서 도민들도 긴장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여론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불행 중 다행이에요. 그런데 자본이 쳐들어오면 정부가 그걸 근본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게 되겠죠. 결국, 지역을 지키는 것은 도민들이 자각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런 인식을 바꿔나가기 위해서 교회가 힘써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2호 강우일인터뷰2

한일 양국의 주교님들이 두 나라 사이의 올바른 역사 인식과 평화적 관계를 만들기 위해 한일주교교류모임을 시작하신 지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그 모임에 참석해 온 주교님 중 한 분으로서, 최근 이뤄진 ‘위안부’ 합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고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일 양쪽 정부가 외교적으로 너무 막혀 있으므로 여러 가지로 답답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걸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있었다는 건 인정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관계설정을 ‘위안부’ 문제로 엮어서 당사자인 할머니들을 제외하고 그저 정치・외교적인 차원에서 해결해 버렸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국민들이 못 받아들이면 정치인이나 행정가들이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해결되는 게 아니겠죠.

일본 사람들의 입장과 우리가 느끼는 입장의 차이점은 우리는 피해자이고 그쪽은 가해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땅에서는 당시의 그 아픔을 직접 겪고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 있고, 또 그것을 전해 받은 국민들이 있으니까 그걸 피부로 느끼고 울분을 토하고 고통이 가슴 속에 가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은 대부분 그 현실을 몰라요. 그런 일들은 대부분 동남아시아나 중국, 우리나라 등 일본 밖에서 일어났고, 일본 국민들은 이에 대해 정확한 지식이 없어요. 그걸 사회가 교육이나 언론 등을 통해서 전달해야 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전달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이는 일본문화의 특색과도 상관이 있어요.

일본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아름다움[美]을 상당히 좋아해요. 그게 무사(武士)문화와 연결이 되면서, 무사문화에서 가장 치명적인 악으로 느끼는 게 아름다움이 깨지는 것으로 여기죠.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으로 드러나는 것, 자기의 위신과 체면이 부정한 존재나 망가진 모습이 드러나게 되면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죠. 일본 전통 문화 속에서 그런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이 일을 윤리적으로 옳은가 그른가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깨지고 망가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거예요. 일본 사람들은 회사든 학교든 어디를 가나 제일 먼저 청소부터 시작해요. 청소가 모든 일의 근본이에요. 지저분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 문화적 맥락에서 볼 때, 일본 관료들은 과거 일본이 패전하기 전에 해외에서 저지른 그런 일들이 드러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 그런 걸 교과서 같은 데서 가르치는 건 도저히 안 되는 일인 거죠. 그래서 끊임없이 교과서가 문제가 되었어요. 그래도 일본 지식인들 안에서는 그런 잘못을 그렇게 미화하고 그냥 덮어버리는 것은 안 된다고 해서, 교과서 문제제기를 한 와다 하루키 같은 학자들도 있어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요.

그런 걸 우리가 볼 때, 그리스도교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도 참 문제인 거죠. 잘못했으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또 기억하고, 그것을 다시금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해야 하는데, 그걸 없던 것으로 색칠해버린다는 건 그야말로 역사가 발전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칠 수 있고, 과거의 죄악이 반복될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요즘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기네가 타국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밝히고 사죄하고 올바로 알아야 한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옛날에 비해서 많아졌기 때문에 저는 꼭 절망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과거를 기억하고, ‘위안부’ 할머니들뿐만이 아니라 강제징용되었던 분들도 아주 힘들게 사신 분들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런 분들도 기억해야지요. 복수하거나 앙갚음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 역사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고 우리 부모님이나 선조들이 어떤 고난의 삶을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우리 스스로의 몸가짐을 바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울분이나 일본 정부에 대한 성토만 하는 건 잠깐 흥분하다가 사그라지고 마니까, 선조들이 겪은 아픔과 눈물의 역사를 조금 더 정확하게 살펴보고 공부하는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 좋을 거 같네요.

4.13 총선이 다가오는데, 한국 사회가 하느님의 자비를 실현하는 정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교회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도 그것이 고민인데요. 평소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경제, 노동, 환경 등 사회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런 것에 비추어 이번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 왔는지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료들을 우리가 좀 신자들에게 알려드리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각 후보의 공약이 교회가 제시하는 세계관에 비추어 경제정의, 정치정의, 환경정의 등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비교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일을 좀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전부터 생각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그런 일을 좀 하면 좋겠네요.

2호 강우일인터뷰5

한국천주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은데, 사실 신자들이 체감하는 가난한 교회는 본당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제들이 가난하게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교황님은 교구장 시절에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셨고, 지금도 방한 기간 선물 받은 소형차를 애용하신다고 합니다. 주교님께서도 요즘은 교황님이 타셨던 소형차를 타신다고 들었는데,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청빈한 사제 운동 같은 걸 제안해보실 순 없을까요?

저도 결국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말을 못하기 때문에, 참 그 부분에 있어 예수님 앞에서 죄송한 마음이에요. 교회가 중산화된다는 이야기가 거론되는 건, 성직자들만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지난번에 교종께서 오셨을 때도 한국교회가 커다란 교회라는 표현을 하셨고 그 ‘웰빙’을 조심하라 하셨지요. ‘웰빙’이라는 표현이 영어로나 한국에서는 건강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뉘앙스로 많이 사용을 하지만, 사실 교종께서 표현하신 이탈리아어는 ‘benessere’라는 말이었어요. 영어로 번역을 하면 ‘well-being’이 맞긴 하지만 이태리어에서 ‘benessere’라는 말은 안락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걸 안 좋은 뉘앙스로 하는 단어에요.

한국 성직자들은 현실적으로 그런 삶에 젖어들게 구조적으로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성당을 지을 때 교회는 기본적인 지침은 있지만, 나머지는 설계사와 건축가들이 일반 사회 건축에서 추구하는 기본적인 기준을 따라요. 그러니 거기에 정말 특별한 의식을 가지고 내가 살 집은 검소하게, 가난한 삶을 살 수 있는 소박한 양식으로 지어달라고 아주 강조에 강조를 하지 않는 한, 일반 건축가들은 이 세상 평균 이상을 만들어 놓아요. 그러니 참 세상 흐름이라는 게 무섭다는 걸 느끼는데, 그걸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정말 우리 성직자들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선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끊임없이 접촉하는 것, 그런 부분에서 가정방문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봐요. 사목자들이 가정방문을 안하고 본당에 가만히 있으면 백성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사제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 대게 지도층에 있거나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 사람들과만 교류하면 사제생활도 점점 더 수준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깨어 있으려면 사제들이 자꾸 사제관에 가만히 있지 말고, 본당의 가장 작은 사람들 집을 찾아 나서는 사목을 하면 자신들의 중산층화를 좀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쉽지만은 않죠. 저부터도 제가 단호하게 표방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소형 자동차는 제가 타던 차가 10년 째여서 바꾸라고 하길래 그 김에 바꾼 건데, 그걸 보고 다른 사제들이 자동차를 바꾸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새로 자동차를 바꾸게 될 때 조금 생각은 하겠죠.

2호 강우일인터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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