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노동자, 그 곁으로 – 3호 특집원고

청년 노동자, 그 곁으로

– ‘21세기 유목민들’에 대한 교회의 자세 –

 

이영훈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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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노동 청년, ‘21세기 유목민’

십여 년 전, 어느 본당 보좌신부로 있을 때였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한 청년을 성당에서 만났다. 너무나 반가웠지만, 그동안 왜 성당에 나오지 않았는지 먼저 물어보았다. 그 친구의 대답은 이러했다. “신부님, 성당에 빠지고 싶지 않았지만, 일자리와 근무시간이 일정치 않아 많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기분 좋게도 시간이 되어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난, 오늘의 노동 청년들을 ‘21세기 유목민’으로 부르곤 한다. 적은 임금을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청년들! 하지만 사제 한 사람으로서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말벗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힘내라, 기도해라,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가져라,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거다”라고 말해 주지만 정말 도움이 될지, 오히려 현실도 모르는 사제의 공허한 말 때문에 더 힘들어하지는 않을지, 소주 한 잔에 답답함을 삼키는 것이 다반사였다. 사제로서 그들과 함께하는 모습은 무엇인지, 또한 교회는 그들과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 수많은 청년들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대면할 수밖에 없었던 이러한 질문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지금까지 청년문제에 대한 교회 내 고민은 대체로 ‘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 ‘어떻게 하면 그들이 다시 교회에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수준의 고민이 주를 이룬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교회 내 해답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결론과 ‘이런 걸 해 보니 많은 청년들이 함께했고, 이것이 어쩌면 교회 내 청년들을 위한 길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는 식의 이벤트성 프로그램을 알리는 수준의 글이 전부인 듯하다. 그런데 청년들의 문제를 단순히 신앙적 차원에서의 접근으로만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믿음이 약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을까? 살아갈 힘조차 없는 청년들에게 믿음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면서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그들에게 도움이 될까? 실업과 박봉(薄俸)의 임금, 그리고 밤과 휴일조차 반납하면서까지 노동해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의 현실이 단지 그들의 능력만의 문제로 단정할 수 있을까? 지금의 청년 노동문제와 빈곤이 불의한 구조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혹시 인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聖)과 속(俗)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교회의 역할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호-이영훈 3

  • 교회가 줄이지 못한 노동자와의 거리감

1891년 교황 레오 13세는 교회 역사상 획기적인 회칙을 발표한다. 사회문제 특히 노동문제에 대한 최초의 교회 가르침을 담은 바로 〈새로운 사태(Rerun Novarum)〉이다. 당시 유럽 사회의 산업화는 물질적 풍요를 주는 전환점이 되었지만, 동시에 인간존엄성과 노동의 가치를 급격하게 훼손시키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11세가 “교회는 19세기에 노동자 계급을 잃어버렸다”고 한 성찰과 후회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참혹한 노동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연대의 대상으로 교회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가 노동자들보다는 오히려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자신들에게 무관심한 교회, 자신들의 고통의 원인과 그 해결을 그저 ‘신앙과 근면’으로 답하는 교회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교회 입장에서 아무런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사학자 장 콩비의 말처럼, 당시 산업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에 대한 원인 분석을 할 능력을 교회는 가지지 못했다. 그저 덕스러운 생활을 실천하고 방탕한 생활을 멀리하라는 등 노동자 개인의 윤리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들은 교회에 실망한다. 노동자들에게 교회는, 예수님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안식일에도 일해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을 율법을 어기는 죄인으로 취급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교회는 노동자들에게 환상을 심어주어, 구조에 의한 부조리와 불평등을 인식하고 이겨내게 하기보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하느님의 뜻으로 수용케 하는 ‘아편’과도 같았다. 결국 노동자들은 교회를 떠났다. 아니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교회 내에서 작은 움직임이 움트고 있었다. 사회문제는 원조 단체를 조직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를 재편하고 국가가 직접 개입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하던 독일의 케틀러 주교, 이념적 공세를 당하던 노동조합인 ‘노동의 기사’가 노동자들을 기업주의 착취에 대변하는 단체임을 확인시키고 보호한 미국의 기본스 추기경, 런던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매닝 추기경, 가톨릭 신자들의 노동조합 가입을 적극적으로 권유한 시드니의 모란 추기경 등의 노력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새로운 사태’를 낳았다. 그리고 여기에 힘을 얻은 교회는 세계 곳곳에서 이를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교회와 노동자들의 간격을 줄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한국천주교회의 노동사목

한국교회가 노동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60년대이다.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은 자신의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노동자로서의 자기를 발견하고, 노동조합 설립 등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려 하였다. 교회 차원에서도 부족하지만 나름 그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80년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점점 노동현장과 멀어지게 되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민주노동조합이 설립된 이유도 있었겠지만,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쇠퇴와 함께 교회의 노동사목이 ‘현장’이 아니라 ‘센터’의 형식으로 전환되면서 노동자와의 삶과는 점점 괴리되고 단순한 ‘관리자’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평가가 너무 가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90년대를 거치면서 노동사목은 이주노동사목 중심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많았다. 즉 국내 비정규직 노동자, 특히 노동청년들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최근 국내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산교구 경우, 현재 아르바이트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청년 아르바이트생들의 삶을 공유하고자 노력 중이다. 그리고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부당대우를 받는 청년들에게 근로기준법에 관한 상담과 캠페인을 거리에서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지역의 노동자들과 연대를 확장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성이 부족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비참한 노동 현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현재 우리나라 청년들의 고용률은 40%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그뿐인가? 통합소득대상자 1,967만 명 중, 최저임금도 못 받는 사람이 전체의 3분의 1이나 되는 662만 명이다. 또한, 2013년 기준 전체 임금근로자 1,820만 명 중 약 3분의 2에 못 미치는 1,160만 명만 고용보험에 가입한 노동자들인데, 이중 절반 가까운 560만 명이 한 해 동안 퇴사했다고 한다(홍종학 의원 2015년 10월 5일 국정감사 자료). 고용보험에 가입한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괜찮은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도 2명 중 1명이 직장을 떠나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 외에 고용보험조차 가입할 수 없는 사람들(660만 명)의 고용불안은 이보다 더 할 것이다. 그뿐인가? 20~30대 가계소득은 최초로 마이너스로 돌아섰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최근에 있었다. 심지어 6·25 전쟁 이후 부모세대보다 더 못 살게 된 최초의 세대가 될 것이라는 암울한 미래가 계속 예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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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노동자들의 엄혹한 현실에 대한 절박함에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교회의 공감대와 연대 수준은 노동사목 신부로서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사회문제에 대해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입장을 교회가 보여주었음에도, 교회의 대응이 실제 큰 실효성을 거두었는지는 사실 의문이다. 교회 전체 차원에서의 대응은 사회교리를 중심으로 하는 ‘선언적 대응’이 주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노동현장에서의 연대는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콜트콜텍, 부산 생탁-택시 등의 ‘해고된 노동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한 교회의 모습은 그들에게 동력과 위로가 되어주고 있음은 확인되고 있다. 노동문제 현장에서 교회가 함께 연대하는 모습에 처음에는 의외로 받아들이거나 놀라워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특히 한진중공업 사태와 생탁-택시 문제에 함께했던 여러 유형의 연대와 미사는 많은 노동자와 활동가들에게 교회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이어졌고 실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어떤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교회 내에서 위로를 받음으로써 다시 활동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는 고백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문제가 불거져 표면화된 노동자들에 대한 도움일 뿐이었다.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더 많은 노동자에게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고통을 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을 함께 제거하기 위해 교회는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 이러한 수없이 쏟아지는 질문 앞에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러면서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더욱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청년 노동자들에게 교회는 무엇인가?

먼저, 교회 사명은 무엇일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설립하신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다. 그런데 구원이란 무엇일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죄와 죄의 구조’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 구원에 있어서 두 가지 차원, 즉 ‘인간의 윤리적 차원에서의 회개’와 함께, 인간의 죄가 구조화되고 다시 죄를 재생산하는 ‘부조리하고 불의한 세상 구조의 쇄신’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도 마찬가지이다. 가난과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인 정치·경제적 문제해결이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한다. 일자리가 없어서 지방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청년에게 주일미사의 의무를 말할 수 있을까? 밤낮 없이, 휴일도 없이 일해야만 살 수 있는 청년, 그 어느 세대보다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하면서 학비를 벌기위해 밤낮으로 알바를 해야 하는 청년 그러나 취업은커녕 졸업과 동시에 채무자가 되는 그들에게 개인적 열정과 노력의 부족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의 따뜻한 위로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더 힘든 노동청년들에게 그 위로가 와 닿기나 하겠는가? 과연 청년노동자들이 신앙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불의한 구조에 침묵하는 교회에게 청년노동자들은 관심을 주겠는가? 그들이 정작 필요할 때 함께 연대해 주지 않은 교회가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교회가 불의한 사회 구조에 대한 고발과 거기에 대한 개선의 노력, 더불어서 불의한 사회 구조 때문에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향한 우선적 관심과 실질적 행동의 필요성을 요구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A panoramic view shows bishops gathered in St. Peter's Basilica for the opening session of the Second Vatican Council in the fall of 1962. (CNS file photo) (Oct. 11, 2005) See VATICANII-OVERVIEW to come. (b/w only)

A panoramic view shows bishops gathered in St. Peter’s Basilica for the opening session of the Second Vatican Council in the fall of 1962. (CNS file photo) (Oct. 11, 2005) See VATICANII-OVERVIEW to come. (b/w only)

교회는 과연 청년 노동자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얼마 전 주교회의에서 ‘생태환경위원회’를 신설한 것은 현재 교회의 주된 관심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주요 문제점인 생태환경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진전은 매우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 아쉬운 점도 있다. 기존의 정의평화위원회 산하의 ‘환경소위원회’에서 독립 위원회로 격상된 이유 중 하나가 생태위기에 대한 교회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고 있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의 영향이라는 점이었는데, 이 회칙의 핵심은 생태위기를 단순히 ‘생태문제’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통합생태론’과 ‘생태적 회개’라는 주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환경위기와 사회위기는 별도의 위기가 아니라 포괄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문제임을 강조한다. 또한, 그 해결책이란 빈곤 퇴치와 소외된 이들의 존엄 회복과 동시에 자연보호를 위한 통합적 접근이다. 다시 말하면 이번 생태환경위원회 신설은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교회 인식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노동’과 ‘청년’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정의평화위원회 내에 ‘노동소모임’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의 노동의 문제, 특히 ‘청년노동문제’에 대한 엄중한 위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관심 수준이다. 분명 『간추린 사회교리』(287항)에서는 “청년실업이 사회의 재앙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청년실업 상황에 대한 교회 인식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고 안이한 분석과 대처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한국을 비유하길 ‘헬조선’, 아니 ‘헬조선에서라도 살고 싶다’는 우리 청년들의 울부짖음 앞에 교회는 아직까지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19세기 유럽 사회에서 교회가 산업현장에 대한 무관심과 잘못된 현실분석과 대응이 지금 한국에서 재현되고 있다. 어쩌면 청년 노동자들에게 지금의 교회는 ‘꼰대’로 비치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다.

청년 노동자들은 과연 교회에 관심이 있을까? 슬프지만 없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청년 노동자들을 배제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청년노동자들도 교회를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교회에 청년들이 희망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노동자들을 만나보면 적지 않게 신자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하지만 놀랍지도 않게 교회에는 관심이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처절한 삶을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자기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 물론 신앙의 힘으로 생활하는 노동자들도 있긴 하지만, 미래조차 희망할 수 없는 현실을 사는 그들에게 교회는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빵을 먹어야 살 수 있고 그 힘으로 기도할 수 있다. 단순히 이들을 물질주의를 맹신하는 사람으로 매도할 수 있을까? 불의한 세상(구조)이 빼앗아간 ‘믿음, 희망, 사랑’을 “왜 잃어버렸니? 왜 찾지 않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 교회의 노동관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우리 교회의 인식은 또 어떠한가? 분명 사회교리에서는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신성한 행위로, 인간 성화(聖化)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노동자이셨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노동’과 ‘노동자’는 천한 일, 천한 일을 하는 사람, “공부 안 하면 저런 사람처럼 저런 일 하게 된다”는 식으로 노동의 종류에 따라 귀천(貴賤)을 나눈다. 아니, 자신을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되물어보자. 예수님께서는 노동자이셨다. 그렇다면 그 누가 노동자가 아닐 수 있는가? 주교와 사제 그리고 수도자는 노동자가 아닌가? 예수님도 노동자인데,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노동이 인간 성화의 방법이라면 이는 신성한 권리이고, 노동의 가치와 그로 인한 결과물은 훼손되거나 불공평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이러한 노동 가치를 훼손할 경우 노동자들은 이를 지킬 권리 또한 있다.

교구 관할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노동권’에 대한 강의를 실행한 적이 있었는데 강의 이후 몇몇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강의 내용 다 믿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곳뿐이겠는가? 어쩌면 우리 내면에는 이런 의식들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면 그들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하기는커녕 ‘빨갱이’, ‘집단이기주의’ 등의 선입견으로 보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노동조합과 파업권이 교회 가르침에서도 인정하는 노동자의 생존권 보호를 위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오히려 ‘생떼’로 보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컵초

  • 청년 노동자를 위한 사목,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지금까지 두서없는 글을 써 내려갔다. 사실 주제와 관련하여 글을 쓰는 내내 단번에 쓸 수가 없었다. 가난한 청년 노동자, 그러나 우리 관심조차 받지도 못하는 그들, 우리와 한 하늘 아래에서 숨 쉬고 있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지내는 그들을 간혹 만나면서도 할 말이 없다. 그저 힘내라는 상투적인 표현과 함께 손만 잡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관심을 접는 것은 결코 교회 정체성도 사명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자기정체성 찾기다. 앞서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노동자이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모든 인간의 노동은 신성하고 이를 실행하는 사람들 또한 신성한 존재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나 다 ‘노동자’이다. 사제, 수도자 또한 노동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노동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노동할 권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은총임에도 불구하고 신분차별로 삼고 있다. 이는 아마 우리 사회가 노동과 노동자에 대해 가진 고정적인 낙인 때문일 것이다. 독일, 프랑스, 스웨덴에서는 이미 초등학교부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과 노동자의 권리, 특히 노동조합의 가입의 필요성, 단체협약의 방법 그리고 파업에 대한 것을 교육하고 있다. 현재 우리 청년 노동자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키우는 것이 아닐까? 학교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이러한 교육이 필수적으로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현장과 구체성이다. 60~70년대 노동운동에 중심이 되었던 여성노동자들은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으로서 수도회 등의 협조와 지원 안에서 현장에서 많은 노동자와 함께 노동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키워나갔다. 물론 종교 노동운동의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자신들이 처한 노동현장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현장성과 괴리된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예전의 영향력이 점차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노동청년회 사례가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현장’이다. 그러나 노동현장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곳이 현장이어야 한다. 스스로 노동자로서 살고자 할 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노동자로 맞아들일 때,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같은 노동자로서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짊어지려는 연대의식을 지닐 때 모든 곳이 노동의 현장이 된다. 한편 가난한 청년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좀 더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 구조적 차원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불의한 구조가 양산하고 있는 빈곤과 불평등은 개인적인 접근이 아닌 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다. 단순히 시혜적이고 감정적인 자비로서의 접근이 아닌 정의롭고 공정한 구조에 대한 관심과 목소리가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그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브라함 헤셀은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그곳을 보고 찾아가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은 어디에 계실까? 사실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가 미처 인식조차 하지 못한 곳에 있다. 그 누구도 바라보지도 않았던 창녀와 세리 등을 예수님께서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느님의 시선과 예수님의 발길 그리고 성령님의 사랑을 지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기다림이다. 물론 탕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무관심으로 떠나간 노동자, 청년 노동자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사회교리의 이론적 차원에서 벗어나, 나 자신이 노동자라는 인식 전환과 함께, 같은 노동자로서 노동자의 아픔에 연민을 가지며, 구체적이고 더욱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을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지 않는 냉담신자로 대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대하거나, 물질주의에 중독된 사람 등으로 기다려서는 안 된다. 무관심했고, 덜 적극적이었으며, 오히려 그들을 비판하고 비난했던 우리 자신을 용서 청해야 한다.

오늘날의 가난, 빈곤, 불평등, 부조리 등의 문제는 대체로 ‘구조적 문제’와 거기에 편승하고 재생산하는 ‘권력과 가진 자들’의 불의의 문제로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면 교회의 복음적 분석은 ‘구조’와 ‘그 세력’이어야 한다. 이러한 구조와 세력으로 인해 청년 노동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목민이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분석은 잘못된 실천과 결과를 낳았음을 우리는 교회 역사를 통해 보았다. 21세기 유목민들이 정착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그들을 이방인으로 내치는 것일까? 아니면, 귀한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따뜻한 방과 음식을 내놓는 것일까?

 

 


 

이영훈. 부산교구 사제로 부산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가톨릭평론> 3호 특집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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