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전 – 하동의 행복은 현재진행형

인터뷰 및 정리 김옥자

하동의 행복은 현재진행형

노동문제상담소장에서 유기농 농부로의 전격 전환 스토리!

경북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 443-5 ‘사람과 땅 농장’(다음 카페 : 사람과 땅 농장). 충남 정안휴게소에서 만난 이선화 선교사와 2시간 남짓 달려 찾아간 포도농장이다. 20여년 전, 당시 서울교구 시흥 성당에서는 도심 성당임에도 선교사를 채용, 초․중․고등부 아이들의 교육을 전담케 했고, 노동문제상담소(1993년 3월 17일 개소)를 유치해 운영했다. 주일학교 교육의 전문성과 노동 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한 송진 주임신부의 판단으로 시작된 일이다. 당시 이선화 선교사와 김하동 소장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이번 만남은 홍성에 사는 이 선교사가 연구소의 후원회원이 되는 와중에 성사되었고, 이 선교사가 직접 홍성에서부터 정안휴게소로 나를 마중 나와 왕복 5시간여의 상주까지 함께 해주어 가능했다. 유난히 따가웠던 햇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기꺼이 운전과 안내를 해주신 이선화 선교사님께 감사드리며(‘이선화 선교사님, 그날 정말 짱이었어요~ 감사합니다 ^^’) 오늘의 본론, 생수전의 주인공 김하동 농부를 소개한다.

노동문제 상담소 소장 김하동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공부’는 아니었지만 하동은 공부를 잘했다. 농부였던 아버지는 몇 가지 어려운 사연으로 살던 곳을 떠나 구로동에 정착, 대서소를 하셨다. 오래 전 구로동 사람들이 그랬듯 하동의 집 역시 가난했지만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하동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딱 그때까지만이었다. 공부만 알던 모범생 하동은 당시 흔히(?) 만나는 운동권 형들의 꾀임(?)에 빠졌고, 바야흐로 위장취업에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운동권’ 청년으로 재탄생했다.

“대학에 들어가 새로운 책을 읽으면서 세상을 접하게 되었어요. 충격적이었죠. 왜 형이 그렇게 살고 부모님이 그렇게 사셨고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됐거든요. 그때부터 운동(movement)하고 살겠다고 생각했어요. 공장에 다니면서 제 대학 학비를 대던 형은 그런 제 모습에 굉장히 화를 냈어요. 사실 전 형의 삶을 보면서 형과 같은 노동자들의 삶을 좀 더 낫게 행복하게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결과적으론 형과 부모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해 드렸죠.”

대학을 나온 하동은 시흥성당 노동문제상담소에서 일했다. 상담소장 겸 직원으로 5년간 일했는데 주로 한 일은 체 체불임금, 산업재해, 해고 등과 관련된 노동 법률 상담이었다. 하동에게 노동자는 친숙했다. 나서 자란 곳도 구로공단 근방이었고 친형과 집 근처 아는 형들은 대부분 노동자들이었기에 그들을 위한 삶은 하동에게 의미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법률상담은 주로 돈과 관련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 노동자들은 한번 보상을 받으면 또 반복해서 소송을 하려했다. 노동의 신성함과 자기 권리에 대한 노동자들의 의식이 높아지길 바랬던 하동은 그런 일들을 겪으며 회의가 들었고,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다. 그즈음 하동은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오래 전, 어느 선배로부터 ‘자선이란 남을 돕되 나 이상이 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라는 말을 듣고 공감한 적이 있어요. 그 이후로는 자선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죠. 그러다 언젠가 <좋은생각> 류의 잡지들에서 자선행위를 하는 이들의 글을 읽었는데 본질이 어떻든 그 행위를 하는 이들은 모두가 행복이 넘치는 것 같더라구요. 어찌 보면 이기적일 수 있지만, 그 행위 속에서 자신이 베푼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는 것을 보고 난 지금 행복한가 자문했죠. 전에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면서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농사를 지으면 행복할까?

“저는 서울 출신에 농사는 해본 적도 없지만 어쩐지 농사를 지으면 행복할 것 같았어요. 또 하나는 아이들을 보며 든 생각인데, 처음 아이가 태어나고 생명의 신비에 기쁨을 느끼며 1년 정도 아주 열심히 육아를 했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신비하고 놀라운 존재를 어떻게 하면 잘 키울까, 자연환경 등이 잘 되어있는 곳에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하동은 상담소를 전격적으로 그만 두었다. 상담소 일을 병행하면서 갈 곳을 알아보는 건 고민이 아니라 걱정일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귀농 정보도 없는데다 시골엔 연고도 없어 하동은 가톨릭농민회 회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6개월을 찾아다니다 농민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는 공공근로 자리가 생겨 지원을 했고 상주로 오게 되었다. 하동은 농촌에 들어오면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마을 속으로 들어가 함께 사는’ 것과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

“귀농한 사람들은 대부분 두 부류로 나눠지는데 조용히 자기 자신의 삶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과 뭔가를 조직해내고 어우러져 사는 사람들이죠. 제가 선택한 건 후자였어요. 또 농부는 기본적으로 생계를 농사로 해결하거든요. 생계를 위한 농사를 짓지 않으면 농민의 심정을 정확히 알 수도, 삶을 나눌 수도 없어요. 5천평 짓는 농부 옆에서 5십평 지으면서 농사짓네 할 수 없으니까요.”

처음엔 혼자 비닐하우스에서 살면서 공공근로를 했다. 처음부터 농사를 짓는 것보다 농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농민들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어서 하동에게는 적절하고도 좋은 기회였다. 그 후 농사를 시작하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이제 동네에서는 하동을 성공한 사람이라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것을 성공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동은 자신이 아직은 성공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참 의외의 대답.

“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의 행복을 생각해왔어요. 농민들과 어떻게 하면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면서 생산자 공동체도 만들었는데 지금은 공동체를 나왔어요. 공동체란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깔려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니고, 시간을 좀 가지면서 회복하고 다시 새로운 방식들을 고민하고 찾아낼 생각이에요.”

땅 욕심을 부르는 유기농

하동은 마을의 유기농 선생님이다. 오래 농사를 지었어도 일반 농사만 하던 사람은 유기농을 모른다. 그만큼 일반농과 유기농은 천지차이다. 하동도 처음에는 포도농사를 저농약으로 재배하려 했지만, 첫 해 하루 농약을 뿌린 후 구토증세와 어지럼증을 겪고는 다시는 농약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유기농을 지어온 지 14년이 지났고 지금은 포도 3천평에 벼농사 3천평을 짓는다. 3천평 수확이면 포도는 20톤(관행농사는 30톤 정도) 정도로 4킬로로 포장하면 5천 상자가 나오는데 그건 아주 잘되었을 때다. 최근 몇 년간은 기후변화의 영향이 컸다. 늘 서리에, 약해 피해에 2년에 한 번씩은 거의 수확물이 없다시피 했다. 판매는 주로 직거래로 하며 포도와 포도즙, 포도주, 포도 효소, 멥쌀, 찹쌀 등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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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초기에는 수확철마다 트럭에 아내와 아이 둘을 데리고 서울 경기 일원에 직접 배달을 다녔다. 친구들을 통해 20여명 정도의 구매자가 생기면 하루에 20-30군데를 돌아다녔다. 새벽에 나가 새벽에 돌아왔고, 다시 수확한 포도를 싣고 배달을 다녔다. 그렇게 몇년간 포도를 팔았다.

6천평 농사면 언뜻 땅부자란 생각에 물어보니 대부분 다 임대란다. 땅 살 돈도 없었지만 굳이 땅을 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땅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땅을 사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유기농 농사는 땅을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주인이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줘도 그 땅에 그대로 유기농 농사를 한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열심히 가꾸어 놓은 땅에 제초제라도 한 번 뿌리면 그 순간 땅은 끝난다. 땅주인이야 화학비료를 쓰든 안 쓰든 상관없지만 땅을 만든 사람에게는 너무나 허망한 일이다.

“예전엔 노인들이 힘드셔서 농사를 그만두면 땅이 나오니, 가만있어도 땅을 빌릴 수 있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귀농하는 분도 많고 땅주인의 자녀들이 내려와 점점 땅이 줄어들어요. 기회가 닿으면 땅을 좀 사고 싶은데 이제는 땅값이 올라 어렵죠. 그나마 만들어놓은 땅마저 빼앗기면 농사지을 땅마저 없어질 거 같아 걱정이에요.”

yy다시 없을 최고의 직업

귀농과 귀촌의 차이는 뭘까? 하동은 농사로 자기 생계를 책임지면 귀농이고, 다른 일을 하면서 농촌에 사는 건 귀촌이라며, 개인의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지만 한 가지, 귀촌의 경우, 농촌의 특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한다. 흔히 도시에서는 이웃끼리도 잘 모르고 지나치지만 농촌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다 보이기 때문이다. 귀농의 경우에도 농민들을 선생님으로 생각하고, 계속 묻고 배우려는 자세가 동반되어야 한다.

세상 최고의 직업 ‘농부’의 손

또한 귀농과 귀촌을 위한 준비에는 ‘아주 소박하게 살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며 농사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기에 불안정할 수밖에 없지만 ‘농사’야말로 최고의 일이고 ‘농부’야 말로 최고의 직업이란다.

“힘들긴 하지만 농사일은 지겹지가 않아요. 어떤 작업을 며칠 동안 해야 해서 그 기간은 지겨울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매년 다르고 매 순간 다르거든요. 일전에 한 중학교에 가서 유

기농 강의를 했는데 그때 아이들에게 이야기했죠. ‘사람은 매순간 다른 일을 해야 지치지 않고 행복하지, 그게 아니면 돈을 위해 일하게 된다. 예술가 같은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농부만큼 좋은 직업은 없다. 많은 부모들이 선호하는 의사는 평생 남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판사, 변호사는 평생 분노에 차고 찌든 사람만 대해야 하니 얼마나 지치고 지겹겠니’ 농촌에 살아온 농부들은 힘들다고는 하지만 ‘지겨워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아요. 봄이 오면 올해는 농사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며 희망에 부풀죠. 정말 권하고 싶은 최고의 직업이에요.”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20-30%도 안 된다는 하동은 하루 종일 모터 돌려 물을 주어봐야 5분 비 온 것과는 차원이 다르단다. 그러니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20-30% 갖고 농사가 잘되고 안 되고 할 수는 없단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농산물을 수확하기 위해 비닐하우스니 식물공장 같은 것들을 해보지만 거기서 나온 농산물이 좋은 것인지, 또 그걸 위해 엄청나게 소모되는 에너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지적한다. 하긴 그 에너지를 위해 결국 환경이 파괴되고 기후변화가 오는 것이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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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집은 그렇게 짓는 것입니다

하동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직접 설계하고 손수 지었다. 시골집이라고 허술하게 지은 게 아니다. 내부 계단이 있는 복층 구조의 2층 집은 거실로 천창이 나 있는 그야말로 사진 속에서나 본 듯한 언덕위의 하얀 집이다. 집 안의 씽크대, 책상, 책꽂이, 2층 침대, 소파, 식탁에 집 밖의 그네와 테라스 등등 모두 하동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원래부터 손재주가 있었나 싶지만 하동은 이전에 다닌 자동차 부품 공장, 미싱공장, 중장비 제작 공장 등에서 ‘일 못하기’로 유명했다.

농부 김하동의 작품

“일은 엄청 열심히 하고 땀도 많아 무지 잘 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결과물은 남들 10개 만들 때 7개 만들었어요. 같이 일한 사람들한테 놀림도 많이 당했죠. 사람 사는 데 기본이 먹고, 자고, 입는 거잖아요. 옛날 사람들은 그 기본들을 다 자기 손으로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잊어버린 거 같아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안 해왔기에 할 수 없는 거죠. 저도 직접 집을 지었던 후배(* 공교롭게도 이 후배는 강화도에 사시는, 연구소와도 잘 아는 시사만화가 박흥렬씨였다. ^^)가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결과는 놀랍다. 지은 지 7년이 되도록 곰팡이 하나 피지 않은, 결로도 누수도 없는 뽀송뽀송 하자 없는 집이다. 아내와 본인, 그리고 목수 한 명과 일한 결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동은 자기 손으로 집짓는 일의 장점을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고, 집에 탈이 났을 때 어디가 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있으며, 가족에게 맞는 설계가 가능하기에 일석 다조’라 했다. 처음엔 생각지 못한 거실 천창은 아내의 아이디어였고, 4년 전에는 직접 구들을 놓고 가마솥을 걸은 황토방도 지었다. 가히 여성들의 로망, 맥가이버의 재림이다.

30대 중반, 단돈 2천만 원에 살 집도 농사지을 땅도 한 평 없었던 귀농 새내기 하동은 이제 50대의 멋진 집을 가진 베테랑 유기농 농부다. 이만하면 성공한 농부라 불러도 좋으련만 하동은 여전히 혼자만 행복하거나 성공한 농부가 되길 원치 않는다. 아이들과 부인은 물론 주위의 농부들, 자신과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이 함께 행복하길 꿈꾼다. 그래서 하동의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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