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마음으로 읽는 『사랑의 기쁨』 – 3호 / 비평, 시대의 소리

자비의 마음으로 읽는 『사랑의 기쁨』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에 대해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A mother holds her child as she observes a session of the Synod of Bishops on the family at the Vatican Oct. 24. (CNS photo/Paul Haring) See SYNOD-FINAL Oct. 24, 2015.

A mother holds her child as she observes a session of the Synod of Bishops on the family at the Vatican Oct. 24. (CNS photo/Paul Haring) See SYNOD-FINAL Oct. 24, 2015.

  • ‘기쁘게 사는 것도 저항’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즈음이면, 이미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 한국어 번역본이 출판된 뒤인지도 모르겠다. 어쭙잖게 개인의 감상을 드러내 초점을 흐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조금 에누리가 된다면, 『복음의 기쁨』에 이어 『사랑의 기쁨』을 제목으로 정한 데 대해 개인적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고 또 그런 마음이 드는 것 자체가 기쁘다는 말로 글을 시작하고 싶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이 주는 기쁨이 힘겹고 어두운 현실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 것이라면, 신앙인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 누구 말대로 좀처럼 희망을 꿈꿀 수 없는 상황에서는 ‘기쁨 자체가, 기쁘게 사는 것도 저항’이라는 말이 생각나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수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를 입으로는 웅얼거리지만, 내면에서 우러나는 기쁨이 없다면 그건 단지 오기의 표현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습관적인 자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이 의식적인 것인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의 기쁨’은 『복음의 기쁨』의 빛으로 읽어야 더욱더 그 기쁨의 참맛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은연중에 이를 제안하기 위해 ‘가족 유사성’이라고 할 만한 이 ‘기쁨 시리즈’를 발표한 것은 아닐까. 제목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말이다. 그러나 소문처럼 『복음의 기쁨』에서 보여준 현실에 대한 신랄한 분석과 비판,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함과 막힘없이 대안을 제시하는 명쾌함이 『사랑의 기쁨』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우리는 『사랑의 기쁨』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 <사랑의 기쁨>, 어떻게 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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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평론> 창간호에서는 2014-15년에 걸친 두 번의 주교시노드와 그 결과를 살펴보았다. 당시 쟁점이 되었던 동성애와 동성결혼 문제, 이혼 및 재혼 신자들의 영성체 문제에 국한해서 말하면, “동성애자라고 하더라도 차별 없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원칙의 확인과 후자는 일정한 보속을 거치면 사제들의 판단에 따라 영성체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교회 안팎의 사람들은, 아니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행동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새 문헌에 적어도 위의 두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무엇인가 더 구체적이고 진일보한 내용이 담기기를 바랐을 것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사랑의 기쁨』이 나온 4월 8일, 이 교황 권고에 대한 ‘질의응답’ 번역문을 내고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전했다. 많은 논쟁을 불러온 이혼 및 재혼한 신자의 영성체 문제와 관련해 교황 권고가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은 데 대해 “시노드는 논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비생산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신 “가정생활과 혼인, 그리고 힘들고 복잡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성소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하느님 백성을 존중과 자애로 살펴보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설명했지만 지나치게 일반적인 말이어서 ‘립서비스’에 그친 것이며 그전과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로 들리지 않는다. 기자들도 궁금했던지 교황이 4월 15일 그리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

“『사랑의 기쁨』이 출판되기 전에 비해 이 문서에 (재혼한 이들과 관련해 성체성사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 같은 것이 있습니까?”

“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National Catholic Reporter, 2016년 4월 16일 기사)

짧은 문답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 문제와 관련해 교황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확신의 실마리를 『사랑의 기쁨』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한군데가 눈에 띄는데 본문도 아니고 각주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은 성사의 도움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저는 사제들에게 고해소가 고문실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만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싶습니다’(『복음의 기쁨』 44항). 또한, 저는 성체성사는 ‘완벽한 사람을 위한 상이 아니라 약한 이들을 치유하는 강력한 약이자 자양분’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사랑의 기쁨』 각주 351)

이 약자, 약한 사람 범주에 이혼이나 재혼을 한 이들이 포함된다면, ‘사제의 의지와 식별에 따라’ 이들이 화해와 친교의 성체성사에 참여케 할 가능성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열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 지역 교회에 따라서는 사제의 판단으로 실제로 그것이 가능하리라 예상된다. 이는 기존 교리의 해석이나 사목적 돌봄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진전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본문이 아니라 각주로 처리했을까? 4월 8일 『사랑의 기쁨』 출간을 발표한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은 이에 대해 “잘 모르겠다”면서도, “이 부분에만 집착하게 되면 이 문헌에서 제안하고 있는 결혼에 대한 폭넓은 관점과 전망을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동성애, 동성결합에 대한 입장은 분명했다. 그는 동성애자들이 존중받아야 하고 이들에 대한 편견과 공격, 폭력은 없어야 한다면서도, 동성애자 간의 결합은 결혼과 가정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동성애자 간의 결혼을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교회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혼인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는 것입니다. 동성 결합은 그리스도인 혼인과 동등한 차원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기쁨』 251항)

앞에서 쇤보른 추기경의 말대로라면, 특정 문제에만 집중하지 않기 위해서 이것도 각주로 처리하는 것이 더 공평하고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드는 대목이다. 아닌 게 아니라 동성애 문제와 성 평등에 관심이 많은 미국 최대 평신도 단체인 ‘콜투액션(Call To Action)’에서는 이 문서가 발표된 4월 8일 당일에 성명을 내고 이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 가톨릭교회의 대다수가 LGBT 공동체의 포용, 여성평등, 이혼/재혼한 이들을 교회가 완전히 수용하는 직접적인 방안 등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교황 문헌이 가톨릭교회의 구조와 실천에 있어 진정한 질적 변화 없이 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 데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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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콜투액션’이 『사랑의 기쁨』에 대해 비판만 한 것은 아니다. ‘콜투액션’은 이 문서에서 교황이 호소하듯이 하느님이 주신 양심으로부터 일깨우고 활동하는 것이 이들의 권리요 의무라면서, 성직자들이 완고한 교리를 바탕으로 사람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데서 벗어나라고 요구했다. 또한, 이들은 교황의 이 문서가 복잡다단한 인간 삶의 곳곳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도록 모든 이들을 부르고 있다고 보았다.

  •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사랑의 기쁨』

『사랑의 기쁨』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 쇤보른 추기경을 다시 이 자리에 모셔야 할 듯하다. 그는 결혼과 가정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용하는 ‘말과 스타일’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고 기쁘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교회에서는 결혼과 가정 문제와 관련해 항상 규칙을 따르는 ‘규범적’(regular)인 이들과 문제로 취급되는 ‘비규범적’(irregular) 상황에 있는 이들로 나누어 논해왔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예수의 관점에 서서 모든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는 것이다. 쇤보른 추기경이 말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스타일’은 교황 요한 23세, 또 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닮았다. 어느 날 밤 요한 23세는 공의회 개최와 관련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가로등 아래서 한 쌍의 남녀가 싸우고 난 뒤 서로 키스하면서 화해하고 용서하는 장면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가 개최한 공의회도 이러한 정신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교회의 교리나 도그마의 변화가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 세상에 대한 태도와 공의회 절차와 과정의 변화, 한마디로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왔다.

칼 라너와 버나드 로너간은 ‘(세계 교회의) 시작의 시작’, ‘교회의 역사성 회복’이라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문장으로 공의회 성격을 규정했는데, 교회사가인 존 오말리는 바로 이 스타일의 변화를 공의회의 특징으로 들고 있다. 교회가 과거처럼 대결의식에 빠져 세상을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고 대화함으로써 역사성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보편성을 지향하는 세계 교회로서 그 시작을 알린 것이기에, 스타일의 변화는 앞서 두 신학자가 말한 공의회 성격의 결과로 드러났다고도 볼 수 있다. 스타일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을 물어야 하므로, 이를 『사랑의 기쁨』에 적용한다면 이 문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 자비와 포용의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Pope Francis participates in prayer at the opening session of the Synod of Bishops on the family at the Vatican Oct. 5. (CNS photo/Paul Haring) See POPE-SYNOD-OPEN Oct. 5, 2015.

Pope Francis participates in prayer at the opening session of the Synod of Bishops on the family at the Vatican Oct. 5. (CNS photo/Paul Haring) See POPE-SYNOD-OPEN Oct. 5, 2015.

앞서 ‘각주 351’에서 교황이 “성체성사는 ‘완벽한 사람을 위한 상이 아니라 약한 이들을 치유하는 강력한 약이자 자양분’이라는 점”이라고 한 말에서 이미 배제의 논리가 아니라 포용의 양식, 즉 그 ‘스타일’의 변화가 감지된다. 단지 그 항만이 아니다. 이런 잣대로 본다면 사실 많은 것이 새롭게 눈에 띄일 것이다. “사목자는 반드시 복잡한 여러 상황을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296항), “더 이상 ‘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301항), “동성애 남성과 여성도 존중받아야 한다”(250항), “모든 이를 환영한다”(80항), “양심은 하느님이 명령하는 것을 더 잘 알아볼 수 있다”(303항), “사목자는 ‘식별’을 통해서 사람을 도울 필요가 있다”(304항) 더 많은 예를 들 수 있겠지만, 이 모든 것들은 교회가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의 마음으로 상처투성이의, 고통으로 허덕이는 이 세상 모든 이들을 품에 안으려는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것이 『사랑의 기쁨』이 보여주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말은 좋은데,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면 뭐라 대답할 것인가? 『사랑의 기쁨』에 대해 할 말이 그게 다라면, 이는 마치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 가수 나나 무스쿠리의 〈사랑의 기쁨〉을 듣고 “목소리도 좋지만, 곡도 가사도 좋네”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른 말로 해서, 앞서 동성애 포용 문제니 재혼자의 영성체 문제니 심각하게 얘기했지만, 여전히 ‘교회’에만 시각이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가 어머니 같아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어머니 없는 가정이 얼마나 많으며 교회가 ‘가정’이라고 한정한 그 좁은 울타리를 벗어난 이들이 점점 다수가 되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교회의 이러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말이다.

『사랑의 기쁨』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리스 난민촌을 방문하고 시리아 난민 세 가족 12명을 비행기에 태워 바티칸으로 데려온 바로 오늘, 그 현실에서 읽고 물어야 할 것이다. 날마다 정든 집과 가족을 등지고 타국으로 떠나야 하는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비애, 또 결국 이들 대다수가 난민으로 몰리고 있는 아시아 현실에서, 무자비한 개발로 토착민들이 집을 잃고 역시 난민촌으로 쫓겨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사랑의 기쁨』은 읽히고 해석되어 이들에게 ‘기쁨’이 되어야 한다. 또 IMF 때 빚에 몰려 결국 수많은 아버지들이 자살했다면, 2016년 현재 ‘헬조선’에 남겨둘 수 없어 가족과 동반자살 하는 사건들이 날마다 뉴스거리로 오르는 한국의 현실에서, ‘가족의 위기’니 ‘해체’니 하며 개인의 탓으로만 호도하는 언론과 그것에 편승하는 종교와 그 배후에서 웃음을 흘리는 금융자본주의의 탐욕을 직시하면서 『사랑의 기쁨』을 읽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다급한 현실을 익히 알아서일까? 교황은 이 문헌을 “너무 급하게 읽으려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모든 사람이 『사랑의 기쁨』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먼저 그 내용을 천천히 읽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 마음은 급하지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가는 마음으로 『사랑의 기쁨』을 천천히 읽어보자.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소장으로 저서로 『Asian Theology for the Future』(공저) 등을 쓰고, 『대승불교, 그리스도를 말하다』, 『지혜의 땅 아시아의 생명』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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