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전하는 선교사-3호/성골롬반외방선교회 오록신부

한국문학의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전한 선교사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오록 신부

권은정(작가)

 

3호-오록인터뷰1

“모든 것이 유일한 존재들입니다. 다 똑같다고 간단히 말할 수 없어요. 사물을 관찰할 때 정확하게 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케빈 오록 신부(Kevin O’Rourke, 77세)는 미국 현대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설명하고 있었다. 서울 돈암동의 성골롬반외방선교회(이하 골롬반회) 본부에서 열리는 영시 수업이다. 벌써 8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 수업은 이번 학기부터 하루를 더 늘여 매주 화, 목요일에 열린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중년 여성들이지만 눈빛과 열정은 스무 살 청춘의 그것을 능가한다. 시를 읽고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하는데 스스럼없는 학생들을 보면서 오록 신부는 내심 흐뭇한 표정이다. 시작 때만 하더라도 수업시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던 이들이다. 그새 얼마나 달라졌는지! 시를 읽으며 내적인 눈을 키워가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하다. 오록 신부는 골롬반회 소속 선교사제로 1964년 한국에 왔다.

  • 『서울, 1964년 겨울』, 그 시절 만난 한국

골롬반회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때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파리외방전교회, 메리놀외방전교회가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었지만, 골롬반회는 교황청으로부터 전남에서 일할 것을 제의받고 그해 10월 최초로 10명의 회원을 한국에 파견하면서 이 땅과 인연을 맺었다. 목포, 노안, 순천, 광주, 제주, 서귀포 등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8년 11월 2명의 회원을 춘천에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강원도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일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교회 사제들을 강제추방하였다. 국내에 있던 이들도 가택연금 상태여서 1945년까지 사실상 선교 사업이 중단되었다. 선교회원들은 해방 후 다시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지만 6·25 전쟁으로 춘천교구를 맡아 일하던 사제 중에 순교한 분들도 있다.

아일랜드에 본부를 두고 있는 골롬반회는 중국 선교에 관심이 많던 블로윅 신부(John Blowick, 1888-1972)와 갈빈 신부(Edward Galvin, 1882-1956)에 의해 1916년에 만들어졌다. 아일랜드는 수백 년간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그해 ‘부활절 봉기’로 어느 때보다 독립을 위한 새로운 정신이 분출되고 있었다. 골롬반회는 달간 걸웨이에 신학교를 세웠고 1920년 3월 20일에 드디어 선교사 첫 그룹 16명을 중국으로 파견하면서 아시아 선교의 첫 발짝을 떼었다. 골롬반회의 주보 성인은 골롬반(543년 아일랜드 출생) 성인으로,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 서품을 받고 부모와 고향을 떠나 복음을 전하고자 먼 길을 주저 없이 떠났던 이다.

오록 신부도 역시 사제서품을 받는 대로 바로 고향을 떠나 한국으로 왔다. 그의 나이 스물넷. 아름다운 바닷가 작은 도시 로살리가 고향인 그는 달간의 골롬반회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시절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들 했지만 한국에 온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해안에서 사목하던 골롬반회 동료 신부는 전기가 없이 등유로 불을 밝혀 책을 읽는다고 말해주었다. 기본적인 한국말을 배우고 춘천 소양로 성당에서 보좌신부로 1년 정도 일한 후,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다시 서울로 왔다. 10층 건물이 딱 하나 있던 서울의 모습을 그는 잘 기억하고 있다. 시청 주변 찻집 어디쯤에서 김동리나 서정주 같은 예술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처럼 그때를 그는 ‘참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 한국말 배우며 만난 한국문학, 그 아름다움에 빠져

선교사로 온 그는 한국의 아름다운 시를 세계에 알리는 한국문학 전문가로 살아간다. 서양 사제가 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오록신부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서였지요.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 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가령 어릴 적부터 꿈이 소설가나 시인, 혹은 문학의 세계를 동경하던 그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아일랜드 사람 누구에게나 뼛속 깊이 문학적인 게 있어요. 그건 마치 한국 사람들에게 유교가 깊이 박혀 있는 것과 같은 거지요. 문학에 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고 재능으로 연결되는 점이 분명히 있었겠지요.”

확실히 그렇다. 영미권 대문호 중에 셰익스피어를 제외하면 상당수가 아일랜드에 뿌리는 둔 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조너선 스위프트, 브램 스토커……. 모두 아일랜드가 낳은 인물들이다. 그뿐인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조지 버나드 쇼, 사무엘 베케트, 셰이머스 히니 등 노벨문학상을 받은 문인도 많다.

“한국 문학과의 인연은 우연이었어요. 한국 문학을 하겠다 작정한 것이 아니라 말을 배우려면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고 시작한 거지요.”

처음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한 아일랜드 신부가 어느 날 한국어로 된 아름다운 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에게 내재된 문학의 피톨이 그 아름다움의 연원을 찾아 올라가게 만들었고 그는 어느덧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시 세계를 거닐게 된 것이다.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제대로 책을 읽기 위해서는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게 맞는 순서일 것 같아서 연세대에서 석사과정부터 시작했다. 국문학 석사과정을 시작한 게 1960년 말, 유일한 외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외국인으로서 최초의 국문학 박사 1호이기도 하다.

“그 당시 서양 사람이 한국문학을 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리고 뭔가를 크게 배우고 싶으면 박사학위 이런 건 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너무 좁은 분야를 파게 되니 전반적인 틀에서 별로 도움이 안 돼요! 책을 많이 넓게 읽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대학원에 가니 책을 두루 읽기가 더 어려웠어요. 절차가 복잡해서 학기마다 일곱 시간, 여덟 시간 강의 들어야 했었지요. 기진맥진한 상태로 공부도 잘 안 되고 그랬지만 참았지요.”

그러나 대학에서 자리를 얻으려면 학위가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웃는다. 吳鹿(한자어로는 오랑캐 사슴이라는 뜻인데 자신이 바이킹이 후손이니 걸맞은 이름이란다.)이라는 한자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경희대 국문과 교수 조병화 시인의 주선으로 그는 경희대 영문학과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28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수로 있었으니 그 많은 번역작업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학기가 끝나면 바로 번역에 매달렸어요. 11월 중순쯤 학생들 시험 치고 나면 3월 1일까지 전부 내 시간이었으니까요. 온종일 서재에 있으면서 번역하는 거지요.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

1980-90년대 한국 영자신문에 매일 실리던 그의 이규보 한시 영문 번역시가 떠올랐다. 한국말이 모국어인 사람들도 어려워하는 한시가 아닌가. 그 관심을 촉발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시조에 관해서 관심이 있었어요. 우선 작품이 짧아서 감당하기 쉬운 거지요. 한시를 읽다 보니 점점 시대가 넓혀서 읽게 되었어요. 고려가요는 아마 80년대 이전에 한 거 같아요. 이미 그전에 수백 수의 시조, 한시 번역을 했어요. 『이규보 시선집』은 1995년에 나왔는데, 그때는 관심이 현대에서 조선 시대로 올라가고 있었지요.”

그는 이 지점에서 잠시 쉰다. 중요한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시 공부를 하다 보니 가장 위대한 작품이 고려 시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영시에서는 시의 연원이 서양 시에 있다고 하는데 저는 고려의 시에서 진정한 시의 정신이 출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그 소중한 사실을 알고 있는 거의 없어요! 수백 번 얘기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몰라요. 안타깝지요!”

그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도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껏 펴낸 책은 권수로만 25권에 이르고, 그가 영어로 번역해 내놓은 시와 시조는 2,000수가 넘는다. 서거정, 김시습, 정철, 김삿갓……. 우리는 우리 것이라 하면서도 벌써 잊은 지 오래인 이름들이다. 영어로 번역된 ‘어부사시사’를 읽다 보면 이 사제학자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의 대표적 현대소설 번역은 최인훈의 『광장(The Square)』,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Our twisted hero)』 등이다. 그 외에 번역 소설작품들은 물론 많다.

“신라 향가, 고려가요와 한시, 조선시대 한시……. 이제 19세기 말까지 작품들은 거의 다 했지요. 그리고 현대시도 한 6백편 정도 옮겼으니 어느 정도 다 했다고 할 수 있지요.”

3호-오록인터뷰3

 

  • 선교지의 문화전통을 소개하는 선교 사명

그래도 그는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어머! 신부님이 문학을 가르치시네요?!” 드문 일은 아니지만, 선교사제가 한국문학을 전공하니 받는 질문일 것이다. 이 땅에 선교사로 왔는데 한국 문학에 깊숙이 들어가서 사는 삶이 예수님의 말씀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지 사람들은 궁금해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과 내가 40년간 싸워 왔다고 할 수 있어요. 바로 그런 고정관념, 과연 사제가 한평생 문학을 해도 되느냐, 그 말이지요. 성당에 나가 고해성사 주고 교구 본당에서 신부로 일을 해야만 ‘올바른 신부’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요? 중국에서 천주교가 시작될 때를 봅시다! 마태오 리치 이런 분들은 중국 문화 중심으로 종교 활동을 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선교사로서 가장 값진 일 중 하나가 한국 특유의 문화 전통을 서구에 설명하고 알리는 것이에요. 저는 처음부터 그렇게 목적을 둔 것이지요.”

오록 신부는 스스로 ‘문학에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참으로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전통적인 방식이야 본당 사목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지만 시대를 지나면서 시야를 넓히고 마음을 열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오록신부의 생각이다. 문학 속에서 인간의 본질과 사랑을 찾아내도록 하는 게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게 하는 좋은 사목의 방법이라는 말이다. 일찍이 골롬반 성인은 획일적인 교회의 문화에 다양성을 추구하는 노력을 중시했다. 성인은 교황에게 직접 호소하여 각자의 방식에 따라 부활절을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도 하였다. 영국 시인이면서 사제였던 제럴드 맨리 홉킨스는 “세상은 신의 장엄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문학은 그것을 알아보는 가장 좋은 도구인 것이다.

1990년 초부터 그의 한국시 영문 번역본이 하이페리온출판사, 하버드대학출판부, 아이오와대학출판부 등 영미권의 이름 있는 출판사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의 시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정수를 넓은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주고자 기울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정작 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가 세상 밖으로 날아오르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의미를 분명히 설명하고 싶어 했다.

“한국 사람들은 이제 상상력이란 것을 잃어버렸어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지요. 저는 그 책임이 유교사상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지요. 아무도 혜심이 누군지, 이규보가 누군지, 서산대사도 모릅니다. 이것은 너무나 큰 손실입니다. 조선시대 때 글이란 과거시험에 붙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어요. 문학적인 정신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경향이 지금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문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에게 가장 큰 관심은 언제 노벨 문학상을 탈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우리 문학의 풍성함을 세상과 나누려는 노력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를 나누려는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번역가로서 노력해온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한국이 가진 이 멋진 시의 정신, 이 풍요로움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자는 것이지요!”

최근에 그의 자서전 『나의 한국: 갓 없이 40년(My Korea: Forty Years Without a Horsehair Hat)』이 나왔다. 글을 하는 선비로 살아왔지만 정작 선비의 상징인 갓과는 상관없이 지내온 삶이었다는 말이다. 사실 그는 ‘갓’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두어 해 전에 그는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린 공로로 정부로부터 한글날 훈장을 받았다. 같은 공로로 서울시 명예시민이 된 것은 한참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것은 그런 형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 아름다움, 그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

그는 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교적인 사고의 틀, 형식을 앞세우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수없이 강조한다. 그는 우리 천주교회 신자들이 가지는 ‘죄의식’도 유교적 형식에 매이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죄의식이란 개념을 아주 강하게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잘못이에요. 우리 선교사들이 소개한 천주교 신앙이 바로 죄의식 관념이었죠. 이것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18세기 프랑스에서 온 거죠. 우리 때도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죄의식을 굉장히 부담스럽게 가르쳤어요. 죄의식 중심으로 신자 생활을 하는 그런 방식은 이미 옛날이야기 같은데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그게 지배적이지요. 신자들이 죄를 안 짓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다만 그 관점이 좀 더 적극적으로, 좀 더 밖으로 나가는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죄의식 관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너무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하찮게 여기게 된다면 문제라는 것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자신만만하게 앞길로 나가야 해요!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었어요. 부활하신 예수는 우리를 희망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주셨잖아요! 우린 그 안에서 자유를 찾아야 해요. 우리 자신을 찾아내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할 줄 아는 자유 말입니다!”

그는 신자들이 아름다움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를 권한다.

3호-오록인터뷰4

“시를 읽을수록 진실한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지요. 산책하면서 땅을 밟을 때 참 근사하다 느낄 때가 있어요. 젊었을 때는 생각 못 했지요. 사람들이 아름다움 중심으로 신자생활을 안 하는 거 같아요. 이 아름다움이란 결국 진리이며 하느님과 마찬가지라는 말이지요. 하느님, 진리, 정의, 아름다움 다 같은 말이에요. 그걸 알아야 신앙생활이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이 아니게 되는 거죠. 그리고 훨씬 더 희망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 문학 감성, 한국인이 잃어버린 아름다움

이 땅에서 50년을 넘게 한국정신의 소산인 문학작품을 파고들며 살아온 그가 요즘 시대에 들어서 가장 안타까워하는 점이 있다.

“어째서 사람들에게서 문학에 대한 감성이 없어졌는가 하는 것이에요. 우리 그전 시대의 좋은 시 작품들은 모두 선(禪) 사상을 중심에 둔 작품들인데요. 요즈음 현대 시에서는 선에 그다지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어요. 선에 대한 의식이 굉장히 약해진 거 같아요. 학교나 정부에서는 고전문학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합니다만 실제로 읽는 사람들이 없고요. 고전문학에 대한 감성이 있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게 굉장히 섭섭해요. 그리고 모두 한류, 한류라고 말하는데 그게 모방 중심이고 창의적 것들이 없어요. 다 사라졌어요. 한국의 아름다움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지 생각을 해 봐야 해요.”

한국 가톨릭은 그전보다 신자 수도 늘어났고 교세도 강해졌다. 그가 해줄 말이 있을 것 같다.

3호-오록인터뷰2

“교회 전반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일반적인 한국인의 태도를 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고려시대의 승려시인 혜심의 시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연못>이라는 시예요.

바람이 아니 불고 파도가 아니 일어도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다양한 세상

더 말이 필요 없네

그저 보는 것으로 족할지니.

고요한 연못을 들여다보면서 넓은 세상을 보는 거죠. 많은 말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그냥 보면 되는 건데, 우리는 이런 생각을 상실했어요. 한국 사회는 언제나 많은 말을 필요로 해요. 그냥 볼 줄 알아야 해요. 신앙생활도 많은 말들이 아닌, 보는 것으로 해야 해요. 그래야 정말 좋은 교회, 효과적인 교회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본국으로 돌아간 연로한 신부들을 제외하고 이제 한국에 남아있는 아일랜드인 골롬반 회원들은 십여 명 남짓이다. 하지만 그동안 골롬반회가 이 땅에 남겨놓은 족적은 아주 크다. 가난하고 힘없는 신자들에게 선교 사제들은 풍성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었고, 레지오 마리애 군단을 교회마다 깊이 뿌리 내리게 하였다. 제주의 이시돌 목장도 골롬반회 사제의 손으로 가꿔낸 보물이다. 한국의 골롬반회는 이제 다른 지역으로 우리의 선교 사제를 파견할 정도로 성장했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늘 새로운 것과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오록 신부의 가르침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잘 봐야 합니다.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이 온갖 만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시를 통해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니까요!”

문학의 나라 아일랜드에서 온 이 사제는 선교지 나라의 문학을 세상 밖으로 이어주는 아름다운 다리를 제대로 지어 올렸다. 그리고 하느님 말씀을 우리 가슴에 제대로 심어주었다. 그의 선교임무는 완성된 거나 다름없다!


권은정 루이제. 영문학을 전공하고 <한겨레> 런던통신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후, 여러 매체에 오랫동안 칼럼과 인터뷰 등을 기고해왔다. 특히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평전이나 글로 풀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 임인덕 세바스티안 신부 평전>, <그 사람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왕따들>, <소공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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