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전쟁 ‘ 대신 ‘정당한 평화’를-4호 / 비평, 시대의 소리

‘정당한 전쟁’ 대신 ‘정당한 평화’를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교수)h_50439681

  • 정당한 전쟁은 가능한가?

1차 대전에 참전 중이던 영국 시인 지그프리드 사순(Siegfried Loraine Sassoon)은 1917년 한 신문에 실명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한다.

“내가 방어전이라고 생각하고 참전했던 이 전쟁은 이제 침략전이자 정복전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나는 나와 내 동료 전우들이 원래 품었던 참전 목적을 처음부터 분명히 밝혀서 그것이 나중에 변질되지 않도록 했어야만 했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우리가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를 지금쯤 협상으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순의 고백은 외견상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정의의 전쟁, 즉 불의한 공격자에 맞서 자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킨다는 방어전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쟁이라는 실제 현장에서는 얼마나 걷잡을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버리는지를 생생하게 일깨워 준다. 세상의 모든 군대는 자기 조국과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그 어떤 군대도 다른 나라와 타 국민을 ‘침략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만일 모든 나라가 정말 순수하게 자기나라를 방어하기 위할 목적으로만 전쟁을 상상한다면 이 세상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먼저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가.

전쟁을 ‘국가 간 혹은 국가 내 무력충돌이 원인이 되어 초래된, 사망자 숫자가 1,000명 이상 되는 모든 형태의 갈등’으로 규정했을 때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 시대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서 교전으로 죽은 직접 사망자는 약 2천4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서 전쟁의 부수적 피해로 사망하거나, 전시에 국가의 탄압으로 사망한 숫자는 제외된다. 2차 대전 이후 20세기 후반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는 약 4천100만 명이었다. 요컨대 20세기를 통틀어 최대한 보수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전시 직접 교전으로 인해 약 6천500만 개별 인간들의 생명이 소멸되었다. 한국전쟁만 하더라도 민간인 2,828,000명, 군인 1,672,000 도합 450만 명이 죽었으니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에서 발생한 모든 전쟁 관련 사망자의 11퍼센트에 해당할 만큼 큰 규모다. 더 나아가 21세기 들어 현재까지 전세계의 무력충돌로 사망한 사람들이 약 100만 명에 이른다. 가장 소중한 가치인 생명 존중의 정반대 현상이 지금 이 순간에도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원론적인 질문을 해 보자. 세계 모든 나라의 군대가 순수하게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침략을 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일까? 이 질문은 대단히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일 수도 있지만, 갈등과 분쟁의 근본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탁상공론식의 유치한 질문일 수도 있다.

무력분쟁(전쟁)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한쪽은 정말 순수하게 착한 나라이고 다른 쪽은 철두철미한 악의 세력이어서 완전히 한쪽만의 정복욕과 지배욕만으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국제관계 역학, 지정학적 대결, 자원을 둘러 싼 갈등, 이념이나 종교에 의한 대의명분, 민족 집단 간의 불화, 역사적 원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전쟁이 발생한다. 심지어 클라우제비츠 같은 이는 전쟁이 ‘다른 방식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라고까지 말한다. 대화로 풀지 못하면 주먹을 쓰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다.

객관적으로 보아 전쟁은 위와 같이 복잡한 원인 때문에 일어나는데 반해, 사람들은 주관적 차원에서 전쟁의 기원을 전혀 다르게 파악하기 쉽고 그것을 인지적으로 정당화하곤 한다. 특히 정치지도자들과 언론이 선전선동을 통해 그런 식의 믿음을 강화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A국(또는 A측)과 B국(또는 B측)이 어떤 물질적·정치적·이념적 이해관계를 놓고 다투고 있다고 치자. 이들은 서로 자신은 정당하고 결백하며 상대는 불순한 저의가 있고 불의하다고 ‘믿는다’. 한 가지 사안을 이렇게 정반대로 인식하고 있는 와중에 어떤 무력 충돌이 벌어지면 그것을 누가 먼저 시작했건 간에 서로가 자신은 결백하고 상대는 악이라고 간주하면서 자기가 싸우는 목적은 순수하게 방어용이라고 ‘믿게’ 된다.

이것은 입장이 달라서 일어나는 인식의 차이일 수도 있고, 자기기만의 결과일 수도 있다. 어쨌든 침략전과 방어전을 가르는 논리적 구분은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의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참혹과 비극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잠정적 교훈이 있다. 어떤 전쟁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질 시간과 여력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과 자원과 힘을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이루는데 쏟는 게 훨씬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전자가 언어유희—논쟁을 위한 논쟁—에 가깝다면, 후자는 수많은 인간의 구체적 생사가 걸린 실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Faithful stand on St Peter's square prior Pope Francis' grandiose inauguration mass on March 19, 2013 at the Vatican. The pope waved to the tens of thousands of pilgrims, who carried flags from around the world and shouted "Long live the pope!". AFP PHOTO / GABRIEL BOUYS

Faithful stand on St Peter’s square prior Pope Francis’ grandiose inauguration mass on March 19, 2013 at the Vatican. The pope waved to the tens of thousands of pilgrims, who carried flags from around the world and shouted “Long live the pope!”. AFP PHOTO / GABRIEL BOUYS

 

  • ‘정당한 전쟁’에 대한 교회 가르침과 2016년 4월 로마회의의 패러다임 전환

바로 이 부분에서 가톨릭교회가 등장한다. 지난 2천년 동안 가톨릭이 세계사적으로 무력분쟁을 어떻게 해석해 왔으며 그것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 대한 응답으로서 지난 4월 로마에서 대규모 국제학술대회(이하 로마회의)가 열렸다. “비폭력과 정당한 평화”라는 주제를 내걸고 모든 대륙의 평신도, 신학자, 평화운동가, 성직자, 연구자들 80여 명이 모여 21세기에 가톨릭교회가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어떤 가르침을 내놓아야할까 라는 세기적 질문을 놓고 고민하였다.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와 가톨릭 평화운동 국제네트워크인 팍스 크리스티가 공동 주관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축사를 보냈으며 정평위 의장인 피터 턱슨 추기경이 기조발제를 할 만큼 공식적 성격을 갖춘 행사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앞으로 역사는 이번 로마회의를 전쟁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패러다임 전환’의 물꼬를 튼 이정표로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대회의 제목 자체가 이러한 전환을 강하게 시사한다. 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쳐 온 ‘정당한 전쟁’이 아니라 지금부터는 ‘정당한 평화’로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정당한 전쟁(정의로운 전쟁론, 정전론)은 과연 무엇인가.

정전론은 4세기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주교에 의해 신학적인 주제로 제기되었고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이후 정당한 전쟁론은 교회의 공식 가르침이 되어 가톨릭교회 교리서에도 수록되었다. 교리서의 2307조는 전쟁의 회피 원칙을 규정하고, 2309조에서는 만에 하나 피치 못하게 무력에 의한 정당방위(방어전)를 해야 하더라도 ‘도덕적 정당성의 엄중한 조건들’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를 위해 네 가지 조건이 제시된다. ① 공격자가 가한 피해가 계속적이고 심각하며 확실한 것이어야 한다. ②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대안들이 실행불가능하거나 효과가 없다는 점이 드러나야 한다. ③ 정당방위 행동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야 한다. ④ “제거되어야 할 악보다 더 큰 악과 폐해가 무력 사용으로 초래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판단에서 현대 무기의 파괴력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요컨대 교회는 전쟁이라는 악에 대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무력에 의한 정당방위를 인정하되 그것에 대해 대단히 체계적이고 엄격한 제한을 둔 것이다. 이러한 제반 조건을 온전하고 확실히 충족시킬 수 있는 경우에만 ‘정당한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이런 —전쟁의 개시 근거와 전쟁의 수행 과정을 포함한— 조건들을 백퍼센트 채우는 전쟁, 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전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전쟁이 정당한 전쟁이 되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따라서 정전론 교리의 진정한 정신은, 학술적으론 정당한 전쟁을 규정하는 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 정전론의 한계

그러나 흔히 이론이 현실과 많이 다르듯, 정전론 역시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식으로 변질되었다. 로마대회도 정확히 이 점을 지적한다. “정전론은 원래 취지와는 달리 전쟁을 방지하거나 제한하지 못했고 오히려 전쟁을 승인하는데 악용되어 왔다.” 외견상 그럴듯해 보이는 수사와 구실로 정당한 전쟁이라는 허상을 창조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머튼의 평화론』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전론에 내재된 허점을 보여주는 구절이 나온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결함은 그것이 설파하는 좋은 의도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인간의 최악의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인— 폭력적 수단을 써서 선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유치할 정도로 지나치게 맹신한 데 있다.” 이 말은 핵무기의 현 시대에 더욱 절실한 공감을 준다.

정당한 전쟁론은 현실에서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 외에도 다른 차원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 갈등과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중심에 놓고 그것을 제한하는 조건을 제시하려는 접근방식 자체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꼬이게 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프레임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회의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정당한 전쟁이 가능하다고 시사하게 되면 갈등과 분쟁을 비폭력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수단과 역량을 발전시켜야 할 도덕적 정언명령을 허물어버리는 결과가 초래된다.” 로마회의는 가톨릭교회가 정전론에 집착해 온 나머지 역사 속에서 전쟁, 박해, 탄압, 착취, 차별에 대해 침묵하거나 묵시적으로 동조한 오류가 생겼다고 통렬히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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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회의가 내놓은 해법, ‘복음적 비폭력’

그렇다면 로마회의가 제안하는 해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적 비폭력’의 실천에 있다. 예수 시대 기원 1세기의 팔레스타인 지방은 로마제국에 의한 억압적인 점령이 이루어지고 있던 곳, 즉 나라 잃고 탄압받던 폭력의 땅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점령자에게 무력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폭력노선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는 가해자의 불의한 폭력과, 피해자의 폭력적 수단에 의한 정당방위를 모두 거부하면서 수미일관 비폭력 방식의 행동을 가르치고 실천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등 예수의 복음적 가르침은 분명히 비폭력 원칙의 궤도에 위치한다.

로마회의는 복음적 비폭력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으로서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비폭력’을 제안한다. 비굴하게 침묵하거나 굽실거리는 것이 최선의 비폭력 노선은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의 비폭력 노선은 결코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유약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행동하는 사랑의 힘’이었다. 예수는 필요하면 성전의 환전상과 유다인들 앞에서 ‘직접행동’을 행사하기도 했고,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단죄하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점잖게 그러나 단호하게 꾸짖기도 했다. 극심한 내적 갈등을 이기고 스스로 십자가형을 받을 정도로 강철 같은 의지의 비폭력주의자였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비폭력적 계시를 체화하여 보여주었던 것이다. 비폭력적 평화에 대한 염원은 요한23세 이래 역대 교황들이 빠짐없이 언급해 왔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쟁의 폐지’를 언급한 적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번 로마회의는 폐막 문서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호소한다.

  • 가톨릭의 비폭력 사회교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폭력과 정당한 평화에 관한 회칙을 반포하기를 희망한다.
  • 교회의 전체 조직과 전체 활동 속에 복음적 비폭력 정신이 통합되어야 한다.
  • 비폭력 저항, 회복적 정의, 트라우마 치유, 비무장 민간인의 보호, 갈등의 전환, 평화구축의 전략 등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들을 개발해야 한다.
  • 정당한 전쟁론을 더 이상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활용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전쟁과 핵무기 폐지를 계속 설파해야 한다.
  • 세상의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더욱 높여야 한다.

이제 빠르면 수 년 내로 복음적 비폭력과 정당한 평화에 관한 교회의 공식문헌이 발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당한 평화가 한반도에서만큼 절실한 곳이 또 있을까?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설령 정당한 전쟁론에 입각한다 하더라도 모든 무력분쟁이 결국 죽음과 파괴에 지나지 않음을 직시하고, 능동적인 비폭력을 실천할 책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실천적 움직임이 보편교회의 비폭력 교리 채택에 큰 공헌을 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지은 책으로 『인권의 지평』, 『인권의 문법』, 『조효제교수의 인권 오디세이』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머튼의 평화론』, 『거대한 역설』, 『세계인권사상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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