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날이 얼마 안 남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독거노인들의 목소리 – 5호 특집원고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독거노인들의 목소리

최현숙 (독거노인 생활관리사)

2016-11-28-18-17-40

  • 독거노인에 대한 통념과 지배 이데올로기

‘독거노인’은 ‘혼자 사는 노인’의 줄인 말로 사실관계만을 짚은 용어인데, 누구에게도 불편하다. 어둡고, 낡고, 늙고, 곰팡내 나고, 지저분하고(혹은 더럽고), 극도로 가난하고, 질병에 찌든 갖은 장면과 사람과 상황의 이미지로 낙인되어 있다. 낙인의 이면(裡面)은 자신의 전락(轉落)에 대한 불안이다. 시청자들에게 경고 겸해서, 도망쳐야 할 그리고 닿지 말아야 할 장소로 독거노인들의 ‘쪽방촌’이 뉴스에 오른다. 물론 선정적인 장면과 동정의 멘트를 달고. 불확실과 불안정이 보편적인 상황이자 정서인 현재 우리 사회에서, 시민이 전락할 수 있는 최종 상황은 ‘독거노인의 고독사’다. 일본과 한국의 고독사 생애추적을 보면,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생애 동안 그럭저럭 ‘건실한’ 사회인이자 가족 구성원이었다. 낙인 이미지를 털어보고자 독거노인복지 현장에서는 ‘홀몸 어르신’ 등의 용어를 만들기도 하는데, 다른 대체 용어들은 도무지 입에 붙지 않는다. ‘독거노인’이라는 단어와 이미지가 이미 강력하게 입과 머리와 감성에 들러붙어 있어서다.

통계상의 수치를 보자. 2016년 현재 서울 인구의 약 27%가 1인 가구이고, 전국 65세 이상 노인의 약 25%가 1인 가구라 한다. 독거의 비율로 보자면 노인세대가 유난히 높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독거노인의 빈곤율은 80%라 한다. 이는,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 50%와 한국 전체 빈곤율 15%를 감안하면, 월등히 높은 수치다. 돈이 주인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경제적 빈곤’이 소외, 자살, 고독사의 주요 원인이 되는 것은 세대를 넘는 당연지사다. 더구나 생산 활동을 못 하는 노인들이 갈수록 오래 살 거여서,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든 그들의 병원비와 생활비는 통계상 사회적 부담이다. 이러다 보니 독거노인을 비롯한 ‘노인세대’는, 그들이 빤히 보는 방송마다 사회의 주요한 ‘문제 집단’으로 공공연히 거론된다.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나 독거노인복지센터, 구청과 보건복지부가 염려하는 최고의 ‘사고’는 시신이 뒤늦게 발견되는 고독사나 자살이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까지 되어버리는 것이다. 시민들 역시 그런 보도에 불안과 공포와 혐오를 담아 주목한다. 고령화 사회가 가장 큰 문제로 거론되는 현실에서, 오래 사는 것은 차마 문제 삼지 못하고 고독사나 자살만 문제 삼는다. 문제만 삼지 근본적 대책은 없고, 그저 막기만 하란다. 노인복지현장 노동자들에게 매년 2회 이상 반복되는 고독사와 자살 예방 교육에 앉아있자면 분노가 치민다. 기껏해야 산 사람들의 체면이나 느낌을 위해 고독사나 자살은 막거나 숨기자는 식이다. 요약하자면 고독사와 자살 말고 혐오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일찍 죽어줘야 하는 게 노인들의 국가적 사명이다. 국가와 국민들이 함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암묵적 딜레마다. 여기까지가 국가와 자본이 하는 국민(노동자)관리 관점인 효율성으로서의 통계와 해석이다. 나라를 위한다는 확신으로 중증장애인 19명을 살해한 직후 트위터에 ‘beautiful Japan!’을 남긴 일본 장애인 집단 살해 사건 용의자 우에마쓰 사토시의 논리는, 저 효율성 관점과 동일 선상에 있다. 나아가 저 ‘beautiful’은 독거노인을 향한 우리들의 불안과 혐오 혹은 동정과 시혜의 뒷면이기도 하다.

노인을 ‘문제 집단’으로만 보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노년을 불안해한다. 그러다 보니 아직 ‘독거’도 ‘노인’도 아닌 사람들까지 미래의 불확실을 현재의 불안과 두려움으로 당겨온다. 두려움은 혐오의 뒷면이다. 더구나 ‘100세까지도’ 안 죽을 세상이라지 않나. 말년에 ‘독거’는 혹 피하지 못하더라도 ‘빈곤’은 피해 보자며, 믿을 건 오직 돈 뿐이라는 ‘노후대책’들이 횡행한다. 이는 돈이라면 환장하는 세상을 강화한다.

  • 독거노인과 다르게 만나기

한편, 생활관리사로서든 구술생애사 작가로서든 신앙인으로서든, 내가 만나는 독거노인‘류’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과 일반화와 해석을 의심하는 것이 내 질문과 관계 맺기와 글쓰기의 태도다. 만 59세의 독거여성이자 예비노인이며 평균보다 상당히 가난한 나는, 독거노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저 나이에 저 상황이어도 그럭저럭 살아지겠구나!’ 하는 안심이 온다. 미리 만나는 위안이다. 내 남은 삶이 지금 만나는 노인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 수 있는지를 상상하고 계획한다.

나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일상생활을 돌보는 요양보호사로 일했고, 2013년부터 지금까지는 서울의 한 기초자치구의 독거노인복지센터에서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일하고 있다. 서비스 이용자인 노인들이나 서비스 제공자인 중장년 여성 노동자들의 상황과 임금 조건 등은 두 현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내가 담당하는 31명의 독거노인들 중 25명이 여성이다. 내가 속한 독거노인복지센터에는 50명의 생활관리사 중 48명이 여성이다. ‘착한 노동’이라고들 말하지만 ‘싸구려 노동’이어서 50~60대 여성 노동자들이 몰려있다. 물론 최저임금(2016년 현재 시급 6,030원)이고, 1일 5시간 노동에 통장 입금액은 월 80만 원이 조금 안 된다. 우리 구에 거주하는 독거노인 중에서 1,500명 정도를 우리 독거노인센터에서 ‘관리’한다. 가족관계와 사회관계, 경제 수준, 건강 등을 참고해서 상대적으로 어려운 분들을 선정한다. 그러다 보니 대체로 빈곤한 독거노인들이다.

독거노인들과 만나서 하는 모든 활동이 내 밥벌이이자 일상생활이고, 글의 현장이다. 업무 외에 주력하는 것은 노인들과 함께하는 ‘구술생애사’ 작업이다. 내가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으로 욕심내는 사람은, 각별한 사건이나 각별한 생애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다. 누구나 한세상을 살다 가듯, 누구에게서나 한세상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선 중요하게 보는 것은, 나와의 친분이나 신뢰 관계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가이다. 아직 관계가 얕은 분 중에서 욕심나는 사람이 생기면, 길게 보고 슬슬 옆구리를 찔러가며 관계를 만든다. 그러다 보니 내 주인공들은 대체로 2년 이상은 나와 관계를 이어온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깊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거나, 구술생애사의 목적에 대한 이해 차이로 중간에 그만두게 될 염려가 있다.

가능하면 깊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독거노인들이 꺼내놓는 생애사와 현재를 듣고 관찰하고 공감하며, 이를 기록하고 해석하고 함께 재해석하며 책으로 출판하는 일이 내 구술생애사 작업 과정이다. 또한 생애사 내용을 원재료로 삼아 르포 형식의 다른 글쓰기들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더 집중적인 만남과 글쓰기 작업을 위해, 담당하는 독거노인들의 거주지로 이사했다.

  • 독거노인은 비참한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는 칙서 『자비의 얼굴』 15항에서, ‘자비’는 가난이라는 비참함에 무뎌진 우리의 양심을 다시 일깨워 주고,……”

‘자비’의 낱말 뜻은 읽어도 모르겠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비참(悲慘)’의 낱말 뜻은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찍함이란다. 내게 온 원고청탁서에 들어있는 교황의 칙서 중 ‘비참’이라는 단어에 신경질이 났다. 비슷한 이유로 쪽방촌을 돌다 뙤약볕 아래에서 통화한 편집부의 원고청탁 설명에 다소 짜증이 묻은 반론을 했던 기억이다.

‘노인’이 불가항력의 조건이라면 ‘독거’는 밀려난 조건이자 선택이기도 하고, ‘빈곤’은 밀려나고 또 밀려난 조건이다. 다른 욕망은 사는 동안 차차 포기했고, 그러느니 차라리 삭제했다. 밀려나고 포기하고 삭제한 ‘다른 자리’에서는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더한 빈곤에도 속 편하고 당당하게 사는 노인들이 많다. 온갖 고생 다 했고 죽을 날도 멀지 않아서, 지금이 제일 속 편하고 먹고살기도 낫다는 거다. 독거 역시 오히려 자유롭단다. 빈곤은 가난의 정도와 상태가 아니라 가난에 대한 태도이자 느낌이다.

  • 다른 자리에서는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체제의 ‘바깥 혹은 바닥’에 사는 사람들의 역설과 해학에 뒤통수를 맞듯 기가 차기도 한다. 그들의 생각은 국가와 자본과 교회가 만들어놓은 ‘정상’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되는대로 들락거린다. 생존의 현실 앞에서는 하느님이 줬다는 모성애니 부성애도 엎치락뒤치락 이다.

“불효소송인가 하는 그 방송 봤지? 그거 보니까 아주 재밌더라구, 하하하. 만고에 내가 젤로 속편하다는 생각이 들어. 달라는 놈이 있기를 해, 보채는 년이 있기를 해? 줄 것도 없고 뺏길 것도 없어. 기왕 연락이 끊긴 거, 자식하고도 차라리 안 보고 사는 게 신간이 편해. 자식들한테 연락이 오면 (국민기초) 수급 짤릴까 봐 오히려 겁난다니까. 없는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어. 호적에는 걔네들이 내 밑에 있잖아. ‘단절’인가 먼가를 증명하라구 해서, 글도 모르는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있는 놈들은 있어서 불효소송이니 머니 지랄들이고, 없는 놈들은 없어서 또 부모 자식 간에 멀어지고. 그런 세상이 돼 버렸어. …… 대장암 수술받은 거는 아직 3년이 안 됐어. 세브란스 병원에서 검사하라고 연락은 오는데, 아유 거길 머 하러 가? 지금 와서 재발했다면 항암치료를 하겠어, 다시 수술을 하겠어? 데리구 살다가 죽는 거지 머.” (79세 남성 독거노인)

제일 큰 문제 집단이라는 ‘빈곤한 여성 독거노인’ 중 많은 사람들은, 누가 심란해 하거나 말거나 지금이 젤로 편하고 행복하단다. 보증금 없는 20만 원 월세에 공동화장실 쓰는 쪽방에 사는 이말자(가명, 86세 여성 독거노인) 씨는 그중에서도 단연 갑이다. 이말자는 한강 모래사장 천막살이에서 시작해 이재민의 집단이주 경로인 잠실 땅굴집, 봉천동 달동네 하꼬방, 상계동 판자촌을 거쳐, 지금은 마포의 쪽방촌에서 살고 있다.

“나는 결혼 전이나 후나 평생 내 손으로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는 팔자였어. 지금이 외려 젤 편해. 허리 아프네 무릎 아프네 해도 지금이 젤 행복해. 옛날에는 새끼들 안 굶기려고, 저녁 때우면 아침 걱정 아침 때우면 저녁 걱정, 그걸루 세월을 다 보낸 거야. 근데 지금은 쌀 떨어질만 하면 어디서든 줘. 굶게 생겼는데도 안주면, 달라고 하면 되지 멀, 하하하. …… 아무리 늙구 없이 살아도 무릎하고 틀니만 있으면 살 만해. 어디서 머 먹으러 오라 그러면, 틀니 끼고 나가야 할 거잖아. 무릎 더 망가지면 집으로 가져오라 그러지 멀.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구, 내 꺼 없으면 남의 껄루 살면 돼, 하하하.”

평등이니 복지니 미세먼지는 길게 살아야 할 너희들의 문제란다. 그러니 너희들이 알아서 지지고 볶고 싸우든가 하란다. 가난하게만 산 나는 무죄란다. 물론 빈곤이든 가난이든 사회 정의의 측면이 있다. 하지만 죽을 날이 닥친 사람들에게 사회 정의란 길게 살아야 할 너희들의 문제다.

“아니 세상에 말이야, 물까지 사 먹고 숨도 맘대로 못 쉬게 천날 만날 미세먼지 어쩌구 하는 세상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어? 이런 놈의 세상,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나는 없는 집에 태어나서 평생을 못 먹고 못 쓰다가 가는 사람이야. 환경이니 머니 그런 거는 난 아무 책임이 없어. 지금도 나는 지네들이 종일 버린 거, 새벽마다 나가서 쓰레질(노인공공근로)을 해주고 20만 원 받아 사는 사람이야.”

“야, 전쟁이 나봐라. 구십 다 돼서 죽을 때 다된 사람이, 무서울 게 머가 있냐? 하하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는 산상수훈의 첫 구절을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체제의 밑바닥과 바깥을 ‘수긍’한 사람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다 죽는 죽음이야 더구나 문제 될 것이 없다. 게다가 닥치기까지 했는데 두려워하고 말 게 뭐냐는 거다.

평양 출신의 김미숙(가명, 92세 여성 독거노인) 씨는 해방 후 화신백화점을 구경 왔다가 이남에 묶여버렸다. 미군에게 성매매를 하고 미군과 살림을 살아주며 번 돈으로 외아들을 목사로 만들었다. 죽을 날이 다 됐나 해서 목사 부부인 아들네로 들어갔다가, “미군과 몸을 섞고 낙태를 거듭한 걸 회개하는 성령의 은사를 어머니에게 내려달라”는 아들의 새벽 통성기도에, 혼자 죽기를 각오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지랄하고 자빠졌어. 여자 혼자 벌어 먹고사느라 한 일인데, 내가 도둑질을 했어 살인을 했어? 저 목사 만든 돈이 어디서 나왔는데? …… 지네들 하나님은 어쩐가 몰라도 내 하나님은 딱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하나님이야. 혼자 사는 내 집이 천국이야.”

가진 것이 많은 노인은 다를 수 있다. 더 가져놓고도 우울증에 빠진 독거노인도 많다. 이금자(가명, 84세 여성) 씨는 연립주택 보증금 8천만 원에 통장에도 수천은 들어있는 눈치다. 남편의 춤바람과 계집질로 갈라서면서, 평생 모아 산 아파트를 팔아 돈을 나눴다. 용서해달라며 기어들어 올 걸로 생각했던 ‘쟤들 아버지’가 자기 몫의 돈을 다 쓰고 죽어버린 거랑, 아들에게 물려 줄 아파트를 처분하고 돈이 흐트러져버린 게 가장 큰 상처이자 우울과 자살충동과 악몽의 원인이다. 바득바득 아끼기만 하는 버릇은, 본인도 자식들도 지긋지긋해 하는 어쩔 수 없는 습관이다. 구술사 인터뷰가 끝난 저녁 8시 너머까지 어둡다 어둡다 하면서도 결국 형광등을 켜지 않았다.

“그 집을 아들한테 못 물려준 게 젤 후회가 돼. 이 보증금이라도 까먹지 말아야지. …… 지네들 소원이 엄마가 편하게 돈 쓰는 거 좀 보는 거라면서, 월세로 돌리고 돈을 쓰래는 거야. 내가 이렇게 구차하게 살다 가면 지네들은 어떡하냐고, 제발 좀 먹고 싶은 거 먹고, 쓰고 싶은 거 쓰고, 그러래. 궁상 좀 떨지 말라고 맨날 화를 낸다니까. …… 겨란이라는 거를 내가 여태 나 먹자고 내 손으로 사 먹어 보지를 못했어. 미련 떠는 거야 그게. 알아. 알면서도 못 고쳐. 저기 임대아파트 살다 돌아가신 노인네 있잖아. 위암 걸려서 먹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혼자 누웠으니까, 옛날에 먹고 싶어도 돈 아까워서 못 먹은 음식들이 줄줄이 떠올라서 혼자 눈물이 줄줄 나더래. 내가 결국 그 꼴루 죽을 거야. 그래도 못써. 평생 버릇은 못 고쳐요.”

  • 희년은 주는 자의 베풂에서 오지 않는다.

희년은 역사 이래 있어 본 적이 없다. 희년은 주는 자의 베풂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 가난과 고난을 수긍하며 함께 만드는 공동체는, 자유와 해방의 푯대가 되어 연대를 끌어모아 왔다. 제주와 광주와 밀양이 그렇고, 장애인과 성소수자들의 공동체가 그렇고, 여전히 아프고 느리지만 세월호가 그러하리라. 그들처럼 독거노인들도 개인과 사회의 십자가를 이미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서른셋까지만 했지, 그들은 여든과 아흔을 넘겨서까지 십자가를 살고 있다.

한편으론 ‘참 좋은 세대가 멸종되는구나!’ 싶기도 하다. 독거노인이 뉴스에 오르려면 고독사나 자살 정도는 돼야 하는 반면, 많은 여성 독거노인들은 도시 골목에서도 그들 세대의 오손도손과 십시일반을 어떻게든 꾸려 나간다. 없는 중에도 불러서 나눠 먹고, 아픈 노인에게 죽을 쒀서 쩔뚝거리며 들고 가고, 꼬박꼬박 경로당에 모여 점당 십 원 민화투를 치다 국수를 삶아 먹고, 문득 공원에 모여 양푼에 열무김치 비빔밥을 치대 먹으며, 재수 좋게 옆을 지나던 나를 극구 불러 앉힌다. 돈에 환장한 세상 속에서 그들은 다른 대안적 삶을 살아왔고 여전히 살고 있다.

고난에 대한 역설과 해학이 독거노인들의 통상적 정서라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비참 역시 얄팍한 시선이며 주는 자나 피하는 자의 통념일 수 있다. 동정과 시혜가 나누는 마음의 시작일 수는 있지만 말초적이고 표피적이다. 주는 자의 자기 위안과 오만에 멈추고, 남은 자에게는 모멸과 배제만 강화할 수 있다. 고난과 가난으로 이어진 삶일수록 질긴 생명력과 세상 물정에 대한 통찰과 일상의 단출함이 있다. 근본적으로, 더 가난한 삶일수록 존재 자체로 덜 죄를 짓고 더 하느님 뜻에 가까운 삶을 산다는 것이 내 신앙적, 정치적 소신이다. 가난을 수긍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혹 신앙인이 끼어들 틈이 있다면, 안에 들어가 함께 살며 확장할 일이다.

물질적 후원과 봉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가는 사람이 후원금품과 프로젝트만 챙겨 가면 그들 역시 후원금품과 프로젝트만 달랑 챙긴다. 위로니 감사니야 주거니 받거니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서로를 변화시키는 만남을 위해 공을 들인다면, 혹 진정한 만남이 가능할 수 있겠다. 가졌거나 젊은 채로는 볼 수 없었던 하느님 나라를, 혹 그들 속에서 일별할 수 있겠다.

독거노인은 죽을 일만 남은, 죽음까지 문제로만 남는 존재나 집단이 아니다. 독거노인 개개인은 어느 날 어디에서 태어났고, 갖은 경험과 맥락과 기억과 해석을 지니고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죽음에 닿도록 경험과 맥락과 기억과 해석과 재해석을 이어 살 사람들이다.

재수니 팔자니 하느님 뜻 말고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는 이말자나 김미숙의 똥배짱과 호기에 속이 시원하더라도, 돈 못 쓰는 이금자의 우울과 지긋지긋한 절약에 가타부타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더라도, 나는 또 나대로 이말자와 김미숙과 이금자가 도대체 왜 하나같이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를 찍었는지, 그걸 좀 이해를 해봐야 사는 사람이다. 내가 그들 속에 들어가 생애구술사를 듣고 묻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가난/독거/노인의 현재 뒤에 뒤엉켜진 생애 동안의 상처, 혼인상태 여부(결혼/이혼/비혼), 못 배움, 출신, 개인의 성격, 사회사의 영향, 노동의 내력, 이주의 내력, 몸과 마음의 질병 내력, 정치적 보수화 등의 연결고리가 나는 궁금한 거다. 거의 평생을 이어진 가난과 고난에 대해, 재수와 팔자타령에 심지어 하느님 뜻까지 끌어다 붙이는 그들의 해석 말고, 나는 다른 맥락과 해석을 찾아내야 하겠다. 그 다른 설명 안에 사회 정의와 하느님 나라의 확장이 들어있을까 싶어서다.

 


최현숙. 독거노인 생활관리사이며 구술생애사 작가이다. 저서로 8090세대 여성노인들의 구술생애사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5070세대 여성노동자들의 구술생애사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를 집필하였다.

(편집자 주) 2016년 7월 26일 일본 가나가와 현의 한 장애인 시설에서 발생한 집단 살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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