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주어야 하나?- 4호 특집원고

기본소득,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주어야 하나?-

금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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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이란 모든 시민에게 국가나 정치공동체로부터 아무런 조건 없이 부여되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노동을 강제하지 않고 자산 심사 없이 지급되는, 정치공동체에 대한 개별적 시민의 권리이다. 부양의무 규정을 두고 있는 현행 기초생활수급제도와 달리 기본소득은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지급된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을 특징으로 한다. 현행 복지제도와 비교하여 설명하자면, 기본소득은 빈곤에 대한 사회부조도 아니고 일자리가 없어서 받는 실업수당도 아니다. 기본소득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건 없건, 자산이 많건 적건 모두에게 부여된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기본소득네트워크를 비롯하여 유럽기본소득네트워크는 여기에 인간다운 삶과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참여에 충분한 소득이라는 기준을 덧붙인다. 기본소득 지급액이 터무니없이 적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 왜 기본소득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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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가장 오래된 이론은 18세기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의 『농업정의론』이다. 페인은 모든 인류는 대지의 공동소유자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기본소득을 토지가 사유화된 상태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지급하는 일종의 배당으로 본다. 토지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서 사적 소유를 도입할 수 있지만, 이득 중의 일부는 거둬들이고 기본소득의 형태로 모두가 나눠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현대에 적용하면, 모든 시민은 국민총생산의 일정 부분을 배당으로 공평하게 나눠 받을 권리를 가진다. 1970년대 이후로는 기본소득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필요성에 관해서도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고 수많은 논거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 중 주요한 것들만 추려보자.

거의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의 4분의 1 이상이 불안정노동자이고 종래의 복지제도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자, 기본소득은 불평등을 바로잡고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최소한의 소득안정성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또한, 인공지능으로 일자리 감소가 더욱 극심해질 것이라는 전망은 제4차 산업혁명의 최전선에 서 있는 개발자들과 IT기업가들을 기본소득에 찬성하도록 만들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임금으로 지급되지 않는 육아나 돌봄 등 사회적으로 유용한 여러 가지 활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으로서 기본소득을 환영한다. 이렇듯 사회적 문제들의 해결책으로서 기본소득이 주목받는 이유는 기본소득이 노동 여부와 무관한 소득이라는 특징에 기인한다. 이와 같은 사회적 문제들, 즉 비정규직 확대로 인한 근로빈곤, 기술혁신에 따른 일자리 감소, 사회재생산의 위기 등만이 아니라 생태적 문제도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높여왔다. 시장경쟁체제가 생태적 재앙을 재촉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생태주의자들은 이미 1970년대부터 기본소득 도입에서 생태적 전환의 길을 찾아왔다.

정치제도의 차원에서는, 날이 갈수록 참여율이 떨어지고 형식적 절차가 되어가고 있는 민주주의를 살려낼 방법으로서 기본소득이 논의된다. 기본소득은 국민 모두에게 최소한의 공통적 기초를 마련해 줌으로써 모든 사람의 정치적 참여를 가능하게 해 주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공화주의 정치이론들은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물질적 독립성을 부여하는 기본소득이야말로 민주적 공화국의 기초라고 말한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질적 기초가 개별적인 모든 시민에게 부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군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도 자유의 전통적인 개념인 소극적 자유, 즉 어떠한 강제도 받지 않고 자의에 따라 선택할 자유는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가지고 있지 못할 때 공허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들 중 일부는 기본소득을 도입함으로써 자유의 실질적 기초를 확립하자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소득과 부의 불평등, 2008년의 세계경제위기, 진행 중인 인공지능혁명 등 최근 역사에서 진행된 거대한 변화는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사회적 생태적 위기를 해결할 수단이자 임박한 기술혁신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대응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아 오는 7월 7일부터 9일까지 서강대에서 개최되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대회의 전체 주제도 “사회적, 생태적 전환과 기본소득”이다.

  • 기본소득에 대한 우려와 논쟁점들

물론 새로운 생각에는 언제나 우려와 주저함이 따르는 법이고, 여기에서 기본소득도 예외는 아니다. 여러 우려들과 반대론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들만 추려서 소개하면서 지난 20년간에 걸친 기본소득에 대한 수많은 학술적, 사회적, 정치적 토론과정에서 이러한 반론들에 대한 어떠한 답변들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반론은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아무도 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이다. 물론 나미비아와 인도에서의 실험은 이와 정반대라는 점을 보여준다. 적어도 저개발국가에서는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극빈층이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노동의욕이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해 볼 수 있다. 발전된 국가들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립된 통계가 없다. 기본소득을 실험적으로 도입하기로 한 핀란드나 또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 2015년 12월 기본소득 도입을 의결한 캐나다 온타리오 주 킹스턴 시 등의 결과가 나오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로빈곤층의 경우에는 확실한 소득증대 효과가 있을 것이고 노동의욕도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은 지금도 충분한 근거를 가진다. 일자리를 가지고 있으면 실업수당이나 사회부조의 대상자에서 제외시키는 현행 복지제도와 비교할 때, 일자리가 있더라도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빈곤의 덫에서 빠져나올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의 금액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지금 당장 실현 가능성은 매우 떨어지지만 아주 많은 금액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할 경우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노동 대신에 여가를 선택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질 것이다. 노동의욕 상실에 대한 염려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 도입과 노동시간단축을 연동시키면, 기본소득은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여가를 제공하면서도 일자리가 사회적으로 골고루 분배되도록 할 수 있다. 일자리를 가진 사람은 이전보다 더 적은 시간을 노동하는 대신에 기본소득을 받음으로써 소득이 현격하게 줄어들지 않을 수 있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기본소득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일자리도 얻게 되어 추가적으로 노동소득이 생겨 큰 규모의 소득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노동의욕이 있어도 일자리가 없는 세상보다, 모두가 더 적게 일하면서 일자리가 골고루 나눠지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일 것이다. 나아가 노동의욕 저하라는 반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면, 이는 인간은 게으르며 굶주림의 강제가 없다면 일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간관에서 비롯된 반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잘못된 가정에 대해서는 좀 더 근본적인 철학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뒤에 살펴보듯, 그리스도교에서의 기본소득 논의는 이러한 문제를 매우 중심적인 문제로 다룬다.

그 이외에도 많은 반론이 있다. 예컨대 기본소득 도입으로 저소득층의 소비가 늘어나면 생태적으로 더 나쁜 상태가 된다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알려진 사실은 저소득층을 고객으로 하는 소비품은 탄소발자국이 더 길며 그만큼 자연에 해를 더 끼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도입은 저소득층의 소비 패턴을 바꿀 것이고 그와 같은 소비품의 생산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또한, 기본소득 도입으로 노동시간단축이 가능해지면 산업이 자연에 전가하는 부담이 줄어들 것이다. 기업의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면 높은 세율의 생태세를 과세해야 한다. 그런데 높은 세율의 생태세는 저소득층의 에너지 사용에 부담을 준다. 해결 방법은 에너지 기본소득을 제공하면서 생태세를 획기적으로 올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소득층의 평등한 에너지 사용을 보장하면서도 산업에너지의 절약과 생태적 전환을 유도할 수 있다.

비교적 조직률이 높은 노동조합은 기본소득이 노조를 필요 없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노동자들이 나쁜 일자리를 거부할 수 있는 협상력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굳이 노조가 필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개별 노동자의 협상력 증대는 노조의 전체적인 협상력 증대로 이어질 것이다.

기본소득 그 자체로는 소득의 재분배를 바꿀 수 있는지는 몰라도 더 큰 문제인 자산의 불평등을 고치지는 못한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자산이나 일자리의 불평등한 분배가 소득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는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기본소득의 재정기반을 마련하는 조세개혁은 자산불평등을 어느 정도 바로잡을 것이며, 공공의 소유 부문을 늘려나가는 경제개혁이나 여러 형태의 사회적 경제의 확대는 기본소득의 재정기반도 확충하면서 자산불평등도 해소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기본소득이 여성들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낼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여성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고 불안정 저임금노동에 시달리는 현 상태가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기본소득은 여성들에게 선택권을 부여할 것이며 여성노동자의 처지를 우선시하는 노동시장개혁이 기본소득 도입과 결합된다면 여성 노동권의 신장은 더 획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기본소득에 관한 논쟁들은 이와 같은 논점에만 한정되지 않고, 과연 국가가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옮겨간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부가 편중된 것이 문제이다. 세습자본주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는 날이 갈수록 편중되어 가고 있다. 부자가 더 많은 것을 부담하는 정의로운 조세제도는 기본소득을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다. 국가마다 지급수준은 다르겠지만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부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면, 어떤 나라든지 그 나라의 빈곤선 이상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는 충분한 재정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 서구의 기본소득 현황과 사례

지난 6월 5일, 스위스는 직업, 수입, 나이 등과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매달 2,500프랑(약 300만 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투표 전 여론조사에서도 부정적 의견이 많았는데, 실제 결과도 77%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기본소득의 열기가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투표 실시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주목 효과를 거뒀다는 말이다. 네덜란드는 위트레흐트 시를 비롯하여 19개 도시가 기본소득 실험을 하려고 한다. 핀란드도 기본소득을 시범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도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시범적 도입이 이뤄지고 나면 나미비아나 인도와 같은 저개발국가가 아니라 충분히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기본소득은 어떠한 사회적 효과를 낳을지 실증적 자료를 가지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이 이미 제도화된 경우도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킹스턴시가 그 예인데, 시의회는 작년 말에 기본소득 도입을 의결했고 올해부터 시행된다. 캐나다에서는 이미 1974~1979년에 마니토바주 위니펙과 도핀에서 기본소득 제도가 시범적으로 시행된 적이 있다. 미국의 알래스카주도 공동소유인 석유자산을 기금으로 하여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조세를 재정으로 전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유가 등락에 따라 알라스카 주민들에게 1/n로 나눠주는 기본소득 액수가 함께 등락하는 문제가 있지만, 공유자산형 기본소득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2008년 이후로는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은 사회운동과 정치권에서도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핀란드는 사회민주당을 제외하고 중앙당, 좌파연합, 녹색당이 모두 기본소득을 지지하며 최근에는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기본소득지지 의원들이 늘어났다. 영국에서는 녹색당이 기본소득을 지지하지만 최근 제레미 코빈이 대표가 된 노동당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독일 좌파당은 2011년 강령에 현행 복지제도에서 노동 강제의 폐지와 기본소득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의 진행을 명문화했다. 현재 좌파당 대표인 카트야 키핑은 기본소득독일네트워크의 대변인 출신이다. 스페인의 신생정당 포데모스는 2014년 5월의 유럽의회 선거에서 기본소득을 주요 공약으로 하고 원내정당이 되었다. 2015년 그리스 채무위기 때 시리자 정부의 재무장관으로서 채권단과 협상했던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최근 기본소득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밝혔다. 노조운동의 차원에서도, 더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각국의 서비스노조들부터 기본소득에 대해 점점 더 우호적인 입장으로 바뀌고 있다.

  • 그리스도교에서의 기본소득 논의

2008년 이후 기본소득 운동 열기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지만,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최소보장소득에 관한 여러 정책이 제안되고 논쟁되었던 1960년대 미국이다. 그중에서 가구 단위로 지급된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현대적 기본소득에 가장 근접한 제안은 제임스 토빈의 ‘시민보조금’(demogrant, 경제적 수준 등에 관계없이 일정연령 또는 특정한 부류에 속한 시민에게 지급되는 보조금)이다. 1972년 민주당의 맥거번 후보가 이 제안을 대통령 선거강령에 포함시켰으나, 밀턴 프리드먼이 제안했던 이보다는 좀 더 후퇴한 안인 ‘마이너스 소득세’(negative income tax, 고소득자에게는 세금을 징수하고 저소득자에게는 보조금을 주는 소득세)를 공약으로 했던 공화당 닉슨 후보에게 패했고, 기본소득 논쟁으로 이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시기 미국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이다. 1968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킹 목사는 ‘빈자들의 행진’을 기획하며 쓴 책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혼돈인가 공동체인가?』에서 “빈곤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기본소득 보장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킹 목사 말년의 활동은 사회적 빈곤 문제와의 대결이었고 그는 기본소득에서 해답을 찾았다. 킹 목사만이 아니라 기본소득 운동의 주요한 인물 중에는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기본소득 운동의 정신적 지주는 성공회 투투 주교이다. 남아프리카의 기본소득운동은 다른 나라와 달리 그리스도교와 노조가 초기부터 참여해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나미비아도 루터교의 제파니아 카미타 주교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기본소득 지지는 남아프리카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독일에서도 가톨릭과 루터교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2004년 독일 기본소득네트워크를 창립에 참여했던 단체들 중에 ‘독일가톨릭노동자운동’(Die Katholische Arbeitnehmer – Bewegung e,V)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단체는 19세기 중반에 ‘노동자의 주교’라 불렸던 폰 케틀러(Emmanuel von Ketteler) 마인츠 주교에 의해 창립되었고 현재 12만5천 명의 회원이 있는 가톨릭 사회운동 단체이다. 그밖에 공개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가톨릭 단체로서는 ‘독일 가톨릭 청소년연맹’(BDKJ – Bund der Deutschen Katholischen Jungend), 오스트리아 기본소득네트워크의 창립 단체인 ‘오스티리아 가톨릭 사회아카데미(KSOE – Katholische Sozialakademie Österreich) 등을 들 수 있다.

  • 성경에 나오는 ‘일할 의무’와 기본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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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여러 교파 종교인들의 기본소득 지지가 단지 우연만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교회의 전통, 나아가서 성경 속에 그 근거가 있을 것이다. 물론 성경 여러 곳은 노동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고 노동 없이도 부여되는 소득인 기본소득은 성경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라고 많은 이가 잘못 알고 있는 테살로니카 2서 3장 10절은 원문 그대로 보면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이다.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일하지 않는 자”란 일자리가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상태가 아니라 의도를 뜻한다. 일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굶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일할 의무를 말하고 있지만 노동을 강제하라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테살로니카 2서에서 ‘일’은 의무로 나타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불안정노동이나 저임금노동은 성서적 기준에서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러한 노동을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할까? 앞서 언급한 ‘오스트리아 가톨릭 사회아카데미’는 성경의 노동 개념에는 생태적 관점과 신의 모상으로서 인간 개인의 실현이라는 관점이 들어 있다고 본다. 신의 창조물인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며, 신의 모상으로서 노동자는 노동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테살로니카 2서에서 말하는 ‘일할 의무’와 오늘날 노동시장에서 제공되는 모든 종류의 노동을 무조건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임금노동만이 ‘일’인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육아, 돌봄, 봉사, 사회적 활동 등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유용한 활동의 60% 정도는 임금노동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 성서적 기준에서의 ‘일’과 임금노동 또는 생계노동의 구분은 기본소득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구분은 성경의 ‘일할 의무’를 충족시키는 것이 오직 임금노동이나 생계노동의 형태로 이뤄질 필요는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경은 ‘일할 의무’만 강조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의 시편 127장 1-2절, 잠언 10장 22절, 마태오복음서 6장 16절, 루카복음서 10장 18절은 신의 자비와 믿음이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개신교의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즐겨 인용할 뿐만 아니라, 구원론에서도 기본소득의 근거를 발견한다.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지 일을 얼마만큼 했는가에 따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사람들이 나태해질 것이라는 가정에 대하여 개신교의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그와 같은 인간관이 ‘산상수훈’에 나타나는 신의 무조건적 사랑과 일치하지 않음을 말한다.

  • 가톨릭 사회 교리와 기본소득

가톨릭 사회 교리로 채택된 ‘보조성의 원리’는 하위 공동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상위 공동체가 해결해서는 안 되며 “개인이 스스로의 주도하에,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개인에게서 박탈하여 공동체의 활동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기본소득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조건 없이 소득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보조성의 원리’와 상충되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개인이 알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굳이 상위 공동체가 나서서 그런 사람들에게도 기본소득을 주어야 할까?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많은 일자리는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좋은 삶을 보장해 주는 일자리가 아니며, 그나마 그러한 일자리도 점점 더 희소해지고 있다. 그렇기에 공동체는 모든 개인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함으로써 노동하는 사람들의 협상력을 높이고 노동시장의 일자리들을 성서적 기준의 ‘일’에 가깝게 유도할 의무가 있다. 가톨릭의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노동시장의 현실이야말로 기본소득이 오히려 ‘보조성의 원리’에 의해 옹호되도록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기본소득은 불안정노동의 확산, 일자리의 희소성, 부의 불평등, 인공지능과 기술혁신 등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라는 오랜 전통 속에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동양과 인도의 전통 사상과 종교 속에서도 기본소득의 뿌리는 마찬가지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기본소득은 단순히 하나의 사회 정책이나 경제 정책이 아니라 인류의 오래된 이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금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의 소장이며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한국에서는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던 2007년에 기본소득 운동을 시작했으며, 기본소득에 관한 많은 글을 발표해 왔다. 『진짜 민주주의』(공저), 『사회적 공화주의』 등의 책을 썼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는 2008년 1월부터 2년 동안 지역 주민 930명에게 평균 임금의 1/4 수준인 100나미비아달러(15,000원 정도)를 매달 기본소득으로 지급했는데, 2년 후 이곳의 빈곤문제와 실업률, 기아율 등이 크게 줄어들었다. (편집자 주)

인도에서는 6,000명의 주민에게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매달 조건 없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3%인 300루피(5,000원 정도)를 지급했는데, 아동의 영양상태 개선, 학업과 교육비의 증가, 만성질환자와 노인들의 약물치료가 지속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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