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중매 – 나는 누구인가

이연수

라일락 꽃내음이 출근길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 저 라일락은 자신의 존재를 저토록 아름다운 향내로 한껏 드러내는데, 나는 무엇으로 나를 드러내는가. 2007년 12월 31일 마지막으로 직장을 때려치우며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일은 더는 하지 않겠다고 내 자신에게 선언했었다. 남이 쓴 원고를 교정교열, 편집까지 하고 번역은 재번역까지 하며, ‘나’란 존재는 없었던 십여 년 세월이 황망해서다. 아니 더는 남의 뒤치다꺼리는 하고 싶지 않다는 자아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박사논문은 좀체 써지지 않고, 사람들을 향한 나의 미음은 끝을 모르고, 내 안의 화, 분노는 마구잡이로 쌓여가던 그때. 내 안 깊숙이 묻어두었던 물음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하느님을 알고 싶다’고 학부 전공을 바꿔 신학을 공부하고, ‘나를 알고 싶다’고 박사학위 과정에 등록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의가 아니라 단순히 나를 알고 싶어 공부를 하겠다고 한 저의가 미치도록 알고 싶어서였다.

“만약 네가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너 자신에 대하여 알도록 해라.”(7쪽)

‘아하’가 절로 내 입에서 나온다. 내가 그렇게도 찾아 헤맸던 십여 년 물음의 답이 에바그리우스 폰투스(345/46년경-399년)의 말에 담겨 있다니. 이렇게 단순한 이치를 왜 나는 몰랐을까. 작년 이때쯤 읽게 된, 안셀름 그륀의 『아래로부터의 영성』(분도출판사, 1999)은 막막한 존재의 근원을 밝혀주려는 듯 우연히 내게로 다가왔다. 정말 우연이었을까.

안셀름 그륀은 “성서를 공부하고,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을 익히며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명확히 성찰하는 것”이 ‘위로부터의 영성’이라고 말한다. 이와 달리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하느님의 음성을 나의 생각과 느낌, 나의 고통과 질병들 안에서 듣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참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지닌 가능성의 한계에 부딪쳤을 때,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기 위한 마음의 문을 열어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위로부터의 영성은 지금까지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전해 온 모습 안에서 잘 드러난다. 분명 우리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성찰하도록 이끌었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이 우리네 삶과 무관한, 현실과 동떨어진 원론적이고 담론적인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에 부합하지 못한 삶을 사는 이들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숱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가. 나와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며 기뻐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심판하고 단죄하시는 하느님으로, 그래서 저 멀리 계시는 그분으로만 밀쳐두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교회가 전하는 글자 속 가르침만을 지키는 것은 아닌지.

‘나를 알고 싶다’는 단순한 물음은 실은 ‘하느님을 알고 싶다’는 내 안의 깊은 열망이었다. 내가 부서지고 무너지고 깨지고 얻어터질 때, 하느님께 위로를 받고 싶었고, 그분이 나를 위로해 주셨으면 했다. 괜찮다고, 네가 어떤 모습으로 있든 난 너를 사랑한다고. 나는 이제야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분은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든 나와 함께 느끼고 생각하고 계실 테니까. 그러니 어떤 모습으로든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좋다. 왜.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나를 잘 아시는 분이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본디의 나로 언제 어디서나 있을 테니.

이연수

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20대 들끓는 피들과 지내다 보니, 20대로 돌아간 듯, ‘엉뚱발랄섹시’ 코드로 재미나게 살고 있는 마음만은 젊은(?) 처자. 다종교, 문학, 여성, 심리 쪽도 기웃거리며 ‘다양성’과 ‘유연함’을 삶의 화두로 삼아 본디의 나를 찾아가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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