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인간발전성 신설로 돌아보는 한국 인성회의 경험 -6호/ 비평, 시대의 소리

교황청의 인간발전성 신설로 돌아보는

한국 인성회의 경험

최재선 (전 주교회의 인성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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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교황청에서 ‘인간발전성’을 신설한다는 발표를 들었다. 그 조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기에 가타부타 언급하기 어렵지만, 일단 그 명칭을 인간발전성으로 한 것이며 조직과 체계가 통합적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또한 1975년 설립되었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인성회’(이하 인성회)와 유사점이 있기에 반갑기도 하다. 인성회는 1991년 ‘사회복지위원회’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여전히 과거의 인성회를 기억하는 이들에게서 당시의 경험을 들려 달라는 청을 받고 이렇게 글로 나누고자 한다.

  • ‘인성회’가 창립되기 전까지

인성회는 종교, 사상, 이념에 관계없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이 같은 인간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활동하는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를 부활하는 과정에서 설립된 조직이다. 한국전쟁 후 윤을수 신부가 한국 카리타스(Caritas Coreana)를 설립하여 교회를 대표하는 기구로 발전시킬 의도가 있었으나,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며 유명무실해진 상태로 오랫동안 명칭만의 기구로 존속되던 상황이었다.

1970년대 초 한국에서의 철수를 고려 중이던 미국 가톨릭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s)의 책임자 캐롤 몬시뇰(George M. Carroll)이 주교회의에 한국 카리타스 부활을 제의하였는데, 1974년에는 교황청 사회복지평의회(Cor Unum) 박희섭 원장도 ‘한국 가톨릭 사회발전심의회’ 설립을 주교회의에 제출하였다. 이 두 제안은 성격과 활동이 유사하면서도 다른 기구 설립에 대한 제안이었다. 박희섭 원장의 제안은 국내에서 원조를 받은 사업과 기구들이 원조제공기구인 선진국 교회 원조 기구와 어떻게 효율적이고 투명성 있게 관계를 맺어가는가를 조정하는 기능을 가진 원조업무 전담기구 설립이었고, 미국가톨릭구제회의 제안은 한국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체계적이고 효율성이 있고 또 교회적인 방법으로 봉사할 것인지를 다루는 교계제도상의 기구로 한국 카리타스를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1970년부터 가톨릭구제회에서 근무하면서 원조사업 현지답사와 사업 진행 평가를 위해서 거의 4년 동안 주말을 제외한 매일을 전국 방방곡곡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톨릭구제회에서 주교회의에 ‘개발사업 및 복지사업을 위한 한국 가톨릭교회 서비스 기구의 설립을 위한 제안서’를 제출하게 되면서, 나는 책임자들의 지시에 따라 한국 카리타스 설립안을 한글로 작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안서 작성 담당자로서 1974년 11월 추계주교회의 정기총회에 참석하여 그 안을 직접 설명하였다.

추계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는 카리타스의 부활을 원칙적으로 결정하였지만, 구체적 기구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제안의 통합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박희섭 원장과 나를 그해 12월 마닐라에서 개최된 아시아 대륙 카리타스협의회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마닐라 회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첫째 부분은 빈민지역에서 살아보는 현장생활 체험이었고, 두 번째 부분은 신학자들의 강의와 토론 및 각국 카리타스 현황 보고와 토의였다. 현장체험은 나에게는 깊은 감동과 깨우침 및 회심의 자리였다. 가난한 이들을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이것이 신앙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였다. 이 깊은 감동과 깨우침, 그리고 회심이 나의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관련된 일에 매달리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또한 이어진 신학자들의 강의와 토론은 교회의 감추어진 보화인 사회교리와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접할 수 있게 한 기회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각종 사회회칙, 아시아 주교단의 선언문 등에 나타난 가난한 이들의 발전에 관한 신학적이고도 사목적 전망을 갖게 하는 강의와 토론은 한국 카리타스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었다. 회의 후 필리핀 카리타스와 홍콩 카리타스 방문은 한국 카리타스의 얼개를 그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귀국한 두 사람은 회의 참가 보고서는 공동으로 작성하여 주교회의에 제출하였지만, 설립안은 각기 별도로 수정·보완하여 제출하였다. 내 개인적 견해는 한국 카리타스가 설립되면 해외원조 조정·심의기능은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사무국 업무 중 하나로 처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캐롤 몬시뇰은 단일화를 위하여 책임 주교 선정을 주교회의에 제안하였고, 1975년 춘계주교회의에서는 지학순 주교를 담당주교로 정하였다. 지 주교는 우리 두 사람을 불러 박 원장의 동의를 받아 단일화안 작성을 나에게 맡겼다. 해외원조 심의·조정 기능은 한국 카리타스의 큰 조정기능 속에 포함시켰다. 이 설립안은 ‘헌장’이라는 명칭을 쓰고 그 내용은 취지문과 정관을 달았는데, 여기서 ‘사회사목’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 ‘인성회’의 명칭과 정신

 

내가 작성한 헌장의 제1조는 이 기구의 명칭인데, 나는 이를 담당주교가 작명하도록 빈칸으로 남겼다. 당시 주교들 사이에는 카리타스라는 명칭에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여럿이어서 지 주교는 한국식 명칭을 원했다. 홍콩 카리타스는 현지어로 ‘밝은 사랑’이라는 뜻의 ‘명애회(明愛會)’, 대만 카리타스는 ‘보편된 사랑’이란 뜻으로 ‘보애회(普愛會)’라 쓰고 있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카리타스라는 명칭 대신 자국어 또는 영어로 된 명칭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리면서, 내 개인 의견으로는 ‘인간발전위원회’가 좋겠다는 제안도 했다. 당시 인간발전이란 용어가 아시아 사회사목 분야에서 그 내용을 가장 잘 설명하여 주기에 자주 쓰는 용어였고,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산하 사회사목 담당 부서와 선진국 교회 원조기구와 아시아 각국 카리타스가 공동 설립한 아시아 원조기구가 ‘인간발전’(OHD, Office of Human Development)이란 명칭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지 주교는 새 기구의 명칭을 ‘어질게 이루어가라’는 뜻으로 ‘인성회(仁成會)’, 영어로는 인간발전위원회(Human Development Committee)로 명명하였다. 인성회라는 명칭을 넓게 해석하면 인간발전의 뜻이 들어 있다고 보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이렇게 명칭이 정해지자 설립 헌장을 주교회의에 제출했고, 주교회의는 1975년 6월 26일 자로 이를 인준하였다. 이로써 기존에 설립된 정의평화위원회와 인성회가 한국천주교회 사회사목의 예언직과 왕직을 담당하는 두 기둥이 되었다. 지 주교는 설립안을 준비한 사람이 인성회를 제일 잘 아니 그 업무를 맡으라고 하였고, 이후 나는 한평생을 이 조직에서 일하게 되었다. 인성회의 정신과 주요 활동은 내가 『가톨릭대사전』에 정리해 놓았으니 세부 내용은 그것을 보면 되겠지만, 인성회의 기능과 주요 활동 중 몇 가지 시사점은 짚어보도록 하겠다.

  • 통합적인 인간개발을 추구했던 인성회의 활동rimg01

인성회의 기능은 가난한 이들과 관련한 교회의 사회사업과 활동을 교회 내외에 대표하는 기능을 하면서 이를 활성화하고 격려하는 역할, 조화롭게 정책을 제시하는 조정기능,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고 배분하는 지원 기능이 있다. 주요 활동 분야는 긴급구호와 자선활동, 사회복지 활동, 사회경제 개발활동, 사회운동 등이다.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카리타스가 대략 이 네 가지 접근 방법을 사용한다. 다만 시기와 장소에 따라 주류가 되는 방법은 차이가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지역교회에서 식별한다.

한국은 시기에 따라 이 네 가지 방법이 모두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는 굶주림이 심하여 긴급구호 중심이었고, 1960년대에는 소규모 경제사회개발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1970~80년대에는 산업화의 여파로 사회운동이, 그리고 1990년대에는 사회복지사업이 주류가 되었다. 물론 이 네 가지 접근 방법은 항상 병용했고, 다만 주류가 무엇인가는 식별이 필요한 것이었다. 일례로 인성회 설립시기인 1970년대 중반에 아프리카에서는 긴급구호, 아시아는 경제개발사업, 남미는 사회운동, 서유럽과 북미 및 호주와 뉴질랜드 등 선진국에서는 사회복지사업이 주류였다.

가난한 이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교회가 어떤 응답을 할 것인가는 지역교회가 식별하여 판단할 일이지만, 특정 접근 방법을 배제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비복음적이다. 가난한 이들의 필요와 요구는 다양하고 교회는 이에 응답할 의무가 있다. 인성회가 자선구호 활동, 개발 활동, 사회복지 활동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듯이 사회운동도 받아들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로 인해 교회 안팎에 오해와 거부감 또는 갈등이 일부 있었다. 심지어는 교회 일부 사회운동 단체로부터도 정반대 이유로 오해와 거부감이 있었다. 그러나 인성회는 복음의 빛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으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따라, 한국 상황을 고려하고 한국 교회 체질에 맞는 활동을 하겠다는 원칙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인성회 초기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80년대 후반기는 교회의 사회운동이 사회사목의 주류였던 시기이다. 인성회는 세 가지 차원에서 교회의 사회운동을 지원했다. 첫째는 교회 사회운동의 교회적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교회의 사회운동이 사회사목의 일환이라는 것을 고취시키는 일이었다. 이에 대한 신학적이고도 사목적인 논리는 이미 풍부했지만, 한국 교회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외국의 풍부한 자료들을 많이 번역하여 자료로 발간하였다. 그 내용은 사회교리 해설자료, 교황청과 아시아주교회의 및 아시아 각국 및 선진국에서 발표된 성명서, 선언문, 보고서뿐 아니라 사회사목의 원리와 방법, 사회사목의 영성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직접적으로는 각종 연수회, 묵상회, 피정 기회를 마련하여, 사회사목 종사자들이 활동만이 아니라 쉬면서 공부와 기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두 번째는 요즈음 말로 네트워킹이다. 산발적인 운동들을 분야별로 전국협의체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물론 인성회는 조정기구이므로 이들 개별 단체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협의의 틀을 전국화시키도록 격려하는 기능에 그쳤다. 농민 분야는 가톨릭농민회로 전국협의의 틀이 있었고, 노동 분야는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전국 협의체로 되어 있었으나 여러 곳이 노동사목이란 명칭으로 활동하던 것을 전국협의체로 만들도록 하고 인성회 사무실에 자리 일부를 내어 주기도 했다. 도시빈민 분야도 협의체를 만들도록 주선하기도 하였다. 이미 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는 자발적으로 협의체를 만들었지만, 인성회 관할 분야가 아닌 단체들도 가입했기에 인성회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들 분야별 전국협의체는 주교회의의 공식 인준 여부와 관계없이 인성회 전국위원회의 교구 대표와 함께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세 번째는 사회운동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다.

 

  • 가난함 속에서도 시작한 ‘사순절 운동’

인성회에서는 설립 이후 곧바로 사순절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산업화를 급속히 진행하여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긴 했지만 1인당 총생산은 약 600달러로 아직도 국민 대다수가 가난했고, 교회 역시 약 100만 명의 신자 수로 자립이 힘들어 해외 원조에 의존하던 교회였다. 사순절 운동은 모금을 첫째 목표로 삼지 않고, 가난하지만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지향하는 의식교육 운동이었다. 사순절 운동은 이웃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지 못한 데 대하여 참회하고, 그 보속의 의미로 하루 단식한 몫을 봉헌하자는 운동이었다. 모금은 운동의 결과물이지 목표가 아니었다.

사순절 운동은 보편 교회 모두가 참여하는 운동이다. 선진국 교회에서는 이 사순절 운동의 결과로 모인 헌금이 해외원조의 큰 부분을 담당한다. 이웃사랑은 바로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표현은 나눔이라는 메시지를 모든 신자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물론 이것이 생활화되고 정착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걸 염두에 두었지만, 이 운동을 지지하고 결정하여준 당시 교구 대표 사제들에게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 1970~80년대 교회의 사회운동 지원

과거 한국 교회의 모든 사회사업과 활동은 대부분 미국 가톨릭구제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이 기구가 한국에서 철수하고 그 빈자리에 한국 교회 자체의 기구로 인성회가 들어섰는데, 그동안 진행되어온 사업과 활동뿐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사업과 활동의 경제적 지원을 조정하는 업무도 인성회가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인성회의 3대 기능 중 한 가지이기도 했다.

인성회 설립 직후 한국 교회에 원조 조정기구가 설립되었다는 것을 교황청 관계 부서를 비롯하여 각국 카리타스와 선진국 교회 원조기구에도 통보하였다. 선진국 교회의 원조기구는 인성회 설립을 가장 반가워했다. 이제부터 한국에 대한 원조가 효율성 있고 투명한 질서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직접 원조 방식을 취하던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담당자가 즉시 한국을 방문하여 원조업무에 대해 협의를 하였다. 당시 프랑스, 벨기에, 아일랜드,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아시아 인간발전협력체를 통한 간접 원조의 방식을 택하였다.

선진국 교회 원조기구 모두가 내부적으로 당시 한국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사회운동을 중점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한국인성회의 방향과도 맞았기에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농민, 노동자, 도시빈민운동 분야에 집중적인 지원이 약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인성회가 사회운동을 주류 지원 분야로 설정하긴 하였어도 기존의 자선활동, 재해시의 긴급구호 활동, 사회복지사업 분야를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분야에도 사회운동 분야와 같은 활성화, 격려, 조화, 정책제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인성회 시기에 교구별로 인성회가 조직되거나, 기능·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로 인하여 인성회의 전국위원회는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였고 인성회의 모든 활동은 전국사무국 체제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교구에서는 그때까지 인성회의 사회사목적 활동이 교구 사목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국 사무국은 참으로 외롭고도 험한 길을 걸어왔다.

 

  • ‘인성회’에서 ‘사회복지위원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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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가 가까워지면서 인성회 활성화에 대한 논의가 내부적으로 일어났고 외부에서도 논의가 되었다. 사무국 중심 체제에서 전국위원회 중심 체제로 변화를 모색한 것이다. 각 교구 인성회가 활성화되어 전국사무국이 해온 활동을 교구에서도 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인간발전을 사목의 중요하고도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받아들여 표현하는 기구가 제대로 기능할 때 정상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사무국의 견해였다. 교구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면 전국위원회의 기능 역시 정상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회사목 분야별 전국협의체는 이미 전국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교구는 그렇지 못했다. 1980년대는 사회운동이 교회 사회사목의 주류였지만, 사회복지 분야가 급속히 성장을 시작한 때였다. 1980년대 후반, 특히 1987년을 고비로 교회 내의 사회운동은 퇴조의 길로 들어서가기 시작했다. 대신 이들 운동이 교계제도상에 농민사목, 노동사목, 빈민사목이라는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다른 시대의 징표는 교회 상층부에서 인성회가 사회복지를 중심으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시각이 있었음도 부인하지 않겠다. 인성회의 법적 설립자이며 그동안 인성회 책임을 장기간 맡아온 지학순 주교가 1990년 가을 주교회의에서 교체되어 대구대교구 출신의 새로운 안동교구장 박석희 주교가 인성회 담당주교가 되었다. 이때 주교회의 의장에 김남수 주교, 부의장에 이문희 대주교, 그리고 총무에 정진석 주교가 선출되었다. 인성회의 헌장 개정 준비 작업이 이 시기에 진행되었고 명칭은 ‘주교회의 사회사목위원회’ 혹은 ‘주교회의 인간발전위원회’로 논의가 집약되었지만, 1991년 가을 주교회의에서는 이를 ‘사회복지위원회’로 변경하고 새 정관을 인준하였다. 그 의미는 사회사목의 방향이 사회복지를 중심으로 좁혀진 것이었다. 따라서 새 위원장 주교는 전국위원회의 사회운동 전국단체 대표자들과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사회복지위원회는 사회운동적 접근 방법을 구조적으로 배제시켰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선진국형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가 실제 선진국이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을 갖게 된다.

 

  • 인간발전을 위한 통합적 조직의 필요성

인성회가 추구하였던 통합적 인간발전을 위한 교회 조직으로서의 모습은 몇 년 뒤인 1994년 서울대교구에서 다시 그 형태가 나타났던 것을 나는 주목한다. 당시 서울대교구 교구장이던 김수환 추기경은 교구 내 모든 사회사목 기구를 총괄하고 협의·조정하는 상위 구조로 ‘사회사목부’를 설립하였고, 이 기구의 영어 명칭을 ‘서울 카리타스’로 명명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이 사회사목부를 인성회 모델에 따라 설치한 것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사목적 관점에서는 필연성을 지닌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다시 약 20년이 지난 시점인 최근에 와서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가 교구청 직제인 ‘사회사목국’으로 승격되어 교구장 직속 관할 기구가 되었다. 직제상으로 발전이 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모든 교구에도 사회사목국이 설립되면 좋겠다. 주교회의 차원에서도 교구 사회사목국이 모여 ‘사회사목위원회’ 또는 ‘인간발전위원회’가 설립되기를 바란다.

교구나 주교회의에 이런 기구가 생긴다면, 협의·조정·총괄기능으로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기구는 조정기구이지 실제 구체적 사업을 집행 실행하는 기구가 아니다. 교회는 사회교리의 보조성의 원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제도 교회 안에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는 동안 교회 스스로 천명한 이 보조성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여 실패한 사실을 많이 보아왔다. 이 조정기구는 산하 분야별 전문기구의 자율성을 충분히 보장해 주어야 하고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만 손을 내밀어 잡아주어야 한다. 보조성의 원칙은 조직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질서를 만들어 준다.

인간발전은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성숙하여 변화하고 인간공동체 전체가 인간다운 공동체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창조된 모든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성장 발전한다. 교황청 인간발전성이 교회가 이러한 소명과 사명을 수행하는데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한다.

 


 

최재선. 1970년부터 2004년 퇴임 때까지 주교회의 인성회, 사회복지위원회에서 근무하며 정의평화위원회, 서울대교구와 의정부교구의 사회사목 분야에서 봉사한 평신도이다. 이 분야 국제 관계와 사회교리에 관심이 많다. 모교인 서강대학교와 우리신학연구소 이사를 지냈다.

최재선, “인성회”, 인터넷 가톨릭대사전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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