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6호/ 자비의 선교사,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자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자비의 선교사,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2016년 11월 20일 막을 내리는 ‘자비의 특별희년’ 폐막식을 앞두고, 서울대교구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던 대방동성당 주수욱 신부를 만났습니다. 주수욱 신부는 가난의 영성을 사는 프라도회 재속사제이며, 소공동체 운동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목활동이 두드러진 대방동성당 주임사제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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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비의 특별희년이 이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자비의 선교사’로서 보낸 이 자비의 희년이 어떤 의미이셨는지요?

한국 교회는 전교지역이기 때문에 자비의 선교사에게 주는 특권은 이미 모든 사제가 갖고 있어서 자비의 선교사라고 특별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비의 선교사는 자비의 해 기간에 하느님 자비를 알리고 고해성사를 주는 사제로서, 죄의 경중에 따라 주교 또는 교황(사도좌)만이 사해줄 수 있는 죄도 자비의 선교사들이 사해줄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받았다. 한국천주교회는 이미 1986년 주교회의 춘계정기총회에서 교구장 주교에게 주어진 사면의 권한을 전국의 사제들에게 위임하였고,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1995년 제정) 제88조에서도 보편교회법에 의한 자동 처벌의 형벌은 고해 사제가 사면해 줄 수 있도록 제정하였기 때문에 자비의 선교사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미 갖고 있었다. (편집자 주)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마음에 새기는 선교사로서 교회가 자비를 베푸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몇 명의 사제가 상징적으로 자비의 선교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정말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세상입니다. 시리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전쟁, 남북 사이에 핵무기 위협이나 사드 배치 등 군사적 긴장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과 대립이 가득합니다. 또 한국 사회 안에서도 공권력의 폭력에 희생된 백남기 농민의 문제나, 소수의 부를 가진 사람들이 노동자나 가난한 다수의 대중에게 행하는 폭력도 있습니다. ‘금수저’와 ‘흙수저’를 처음부터 갈라놓는 폭력적인 사회 구조, 심각한 빈부격차, 인간을 인간답게 키워내지 못하는 교육시스템 등 수많은 폭력적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결국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를 간직해야 평화로운 사회가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황님께서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신 것은 한가한 종교적 담론으로서의 자비가 아니라, 절실한 현실의 문제로서 자비를 호소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루카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하느님의 자비를 등지고 간 자들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얼마나 무시하고 버려두었는가를 보게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모르는 큰아들이 동생에게 분노하고, 자기 아버지에게 분노하는 모습도 봅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 또 자신의 정당함만을 이야기하고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비극적인 면을 여러 차원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곧 자비의 희년을 마치게 되지만, 자비의 희년 동안 우리가 마음에 새긴 하느님 자비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온 세상에 확산시켜 나가야 합니다. 세상이 폭력을 넘어 자비롭게 되도록,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자비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주인공인 신자들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가정 등 오늘의 현실 안에서 가장 앞장서서 하느님 자비를 중요한 가치로 살아가며 사회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 가난의 영성을 사는 프라도회 재속사제이기도 하신데, 프라도회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재속사제라고 하면 대부분 낯설어합니다. 평신도 중에서도 세상에 살면서 복음삼덕을 서원하고 살아가는 재속회원이 있듯이, 우리는 교구 소속 사제이면서 복음삼덕을 서약하고 봉헌생활을 하는 사제입니다. 수도회가 아니라 재속회로서 교구 사제들로 이루어진 축성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라도회는 19세기 중엽에 프랑스 리옹교구 사제인 앙트완느 슈브리에(Antoine Chevrier, 1826-1878)가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라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부르심을 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리옹은 프랑스 혁명 이후 산업화를 이룬 첫 번째 지역으로,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 공장으로 와서 비참한 조건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의 가난한 대중은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슈브리에 신부는 프라도 댄스홀을 인수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빵을 얻기 위해 공장에서 노동하던 어린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첫영성체를 해주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구 사제들의 단체인 프라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라도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노동자를 비롯하여 시대마다 나타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그런 사제단입니다. 이것은 사제들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1970년대 초반에 공업화가 이루어졌을 때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께서 노동자들을 위해서 서울대교구 신학생 두 명을 프라도 신학교를 보냈고, 그들이 서품받으면서 1975년에 처음 프라도 사제가 한국에 탄생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프라도 사제가 소개되었고, 저도 부르심을 받아서 아주 부족한 사람이지만 오늘까지 프라도 사제이면서 서울대교구 사제로서 살고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 120여 명의 회원이 있고, 저는 3년 전인 2013년에 프라도회 국제총회에서 비상임 국제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어서 1년에 서너 차례 국제평의회에 비유럽사람으로서 참석하는 일을 하고 그 외에는 평회원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 프라도회 사제로서 가난의 영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와 가난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왜 생겼는지를 생각해보면, 인간의 죄의 결과로 가난한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으로 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도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났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비유도 단순하게 가난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그들의 생활 안에서 하셨지요.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복음선포하실 때도 99%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활동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겁니다.
이는 부자나 권력을 가진 사람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세상에서 떵떵거리던 사람들의 말로를 보면 주로 감옥에 들어가 재소자가 되는데 이들도 그렇게 되면 가난한 이들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죠. 오늘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교회는 분명하게 가시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에게 충실했을 때 아름다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어떤 이유에서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멀어졌을 때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가난이라는 문제는 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난한 사람인가를 돌아보면, 보시다시피 지금도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삶, 결코 가난한 삶이 아니에요. 제가 항상 부끄럽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저는 가난하게 살라고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몹시 가난한 동네에서 세탁기도 없고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연탄가스도 맡으며 살았지만, 과연 내가 가난함을 받아들이고 충실했는가 하면 분명히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늘 답을 찾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 복음적 가난이란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듯,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신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은 쉬운데 실행하기란 어렵죠. 많은 사람들이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먹고 사는 게 충분하면서도 끝없이 걱정하느라 죄를 짓고 감옥에 가거나 비극을 맞이합니다. 그 비극을 맞는 사람들 모습에 내 모습이 있습니다. 이상한 일은 제가 한국전쟁 직후에 태어났지만, 정말 그 어려운 시대에도 사람들은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 풍요롭고 부유한데도 훨씬 더 불안하게 삽니다. 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거죠. 그러면서 이 사회는 더 어두워지고 더 절망적이 됩니다.
저는 우리가 가난을 살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공동선을 실천해 내려는 의지가 포함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난을 말할 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최소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그것을 믿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나요? 우리 사회가 정말 더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정말 진실로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진실로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타인을 형제로 맞이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현재 사목하시는 대방동성당은 소공동체 운동이 활성화된 본당으로 유명한데, 지금 어떻게 이뤄지고 있습니까?

이 본당은 소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빈껍데기만 남을 곳입니다. 왜냐하면 인구 10만 명이 사는 지역에 8,700명 넘는 사람들이 이 본당 신자로 등록되어 있고, 매주 평균 2,800여 명이 미사에 참여하는 성당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당에서 사제 3명이 어떻게 무슨 활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규모에서 복음의 공동체, 같이 삶을 나누는 공동체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교회의 미래는 소공동체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마침 대방동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대방동 성당은 지역 안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자리 잡고 있는 곳이라, 신자들의 전통이 있는 곳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드나드는데 지혜롭고 책임감있는 평신도들이 기꺼이 헌신하기에 이렇게 유지하는 거 같습니다. 또 소공동체 운동을 훈련한 사목자들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전임 사제들이 각자의 장점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사목하고, 평신도들이 열심히 각자 맡은 분야 안에서 성실히 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평신도에 의해 시작된 교회이고, 소공동체로 성장한 교회입니다. 평신도들의 신앙 전통이 유지되는 소공동체를 뿌리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공동체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있으면 부자가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공동체를 교회 안에서 자리 잡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공간적 개념의 소공동체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동네별로 나누어져 있는데, 같은 조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거조건을 뛰어넘어서 소공동체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본당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청년공동체, 30~40대 공동체, 유치원 자모들의 소공동체 등 공감대를 바탕으로 다양한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공동체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본당이 신길동 지역인데, 중국동포(조선족)가 많이 들어와 있고 우리 신자들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 중에도 조선족이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중국에 가서 복음을 선포할 수 없지만, 우리 곁에 있는 조선족에게 사랑을 실천하면 그들이 복음을 만날 수 있겠죠. 이처럼 주거지역에서의 소공동체는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역 안에 가난한 사람들, 우울증을 앓는 이들, 노인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 힘든 사람들이 다 동네에 있습니다. 이 지역 안에서 사람들이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어야 합니다. 낯선 사람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또 그 나름의 소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하던 것을 점검하면서 발전시켜야 하지만, 우리가 새롭게 나아가는 길, 그건 무조건 소공동체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 도시화된 삶, 바쁜 일상 속에서 소공동체 운동이 어렵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소공동체 운동을 초창기부터 같이해 왔습니다. 1980년대에 주로 노동사목을 했던 사람으로서, 본당 공동체에 와서 그러한 사목 경험 안에서 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 안에서 복음화의 주체가 되도록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당연히 소공동체로 갈 수밖에 없었죠.
소공동체 활동은 주로 50대 이상 고령층 신자들이 주로 한다고 하는데, 나이가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100세 시대인 요즘은 그 연령대가 사실 옛날의 40대나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하고, 힘도 있고, 시간도 있으니 그분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 되지요. 요즘 바쁘고 힘들어서 공동체로 모이기 쉽지 않다고 하는데, 정말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다 오게 됩니다. 어떤 맛있는 음식보다, 그 어떤 권력이나 돈보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되면 사람들은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참여할 것입니다. 요즘에는 쉬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희 본당에서는 주말에 6시 미사가 끝나면 방 3개가 불이 켜집니다. 함께 성경을 읽는 소공동체입니다. 정말 의미있고 중요하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고 타협하기보다,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프라인으로만 모인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에 바오로 사도는 말을 타고 복음을 전하려 다녔지만, 지금은 비행기 타고 다니는 시대입니다. 화상통화도 할 수 있고, 요즘 핸드폰은 웬만한 전화나 문자도 다 공짜로 사용합니다. 이런 시대에 모든 것을 활용해서 사람들의 상황과 조건에 맞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지, 안 된다고 푸념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방동 성당 소공동체는 평신도인 본당 신자들이 스스로 교재를 준비합니다. 특징은 아주 단순합니다. 성경본문을 읽도록 이끌어가는 겁니다. 성경이 무슨 참고서 보면서 읽으라고 쓴 것도 아니니, 그냥 평신도들이 같은 평신도를 고려하면서 본문을 읽는 것에 충실하니 좋지요. 문제는 이제 통독이 거의 다 끝나가는데 지금까지의 반복을 할 수는 없으니 그다음을 연구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복음화를 위한 소공동체위원회를 만들어서 어떻게 이 본당 소공동체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발전시킬 것인가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 대방동성당에는 신자 교육프로그램도 많은데, 이렇게 다양한 평신도 양성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시는 이유가 있는지요?

제가 보았을 때 한국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한국 신자들의 수준이 높다고 봅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신자 교육을 많이 했고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물론 취약한 점이 있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다른 나라 교회와 비교하면 끊임없이 복음이나 사회교리를 교육하고 실천하고 활동하는 힘찬 교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신부님들이 나름대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고 신자들도 교육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아직은 활발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이 복음에 목말라 하는 백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제가 요한복음을 강의하는데, 10명만 와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30~40명 정도 옵니다. 성당 규모를 생각하면 그게 많은 거냐고도 할 수 있는데, 저는 많이 오는 거라고 봅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 곳에서 교육을 제공합니다. 신심단체, 레지오 등에서 많은 교육이 이뤄지고 있고, 사회교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육도 본당이나 지구 차원에서 하고 있습니다. 또 교구에서 하는 교육도 많이 참석하도록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총명한 사람들인데 교회구성원들도 총명한 이들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신자교육을 하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몫,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본당 홈페이지에서 사회교리와 신앙교육 자리도 있고, 교황님 말씀이나 자비의 희년에 나온 자료들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계속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사제들의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학교 공부만으로 되지 않고, 사제가 되고 나서도 계속 양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의사도 의학계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다시 배우게 해서 환자들을 대하는 것처럼, 사제가 된 사람들도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강의보다는 소그룹으로 하는 게 효과적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복음의 식탁에 맛있는 양식, 영양가 있는 양식을 제공하려면 항상 새롭게 연구해서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빵집이 새로운 것을 개발 안 하면 누가 갑니까? 유명한 제빵점은 끊임없이 뒤에서 연구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사제들도 말씀을 당연히 계속 연구해 나가야합니다.

  • 대방동 성당의 발달장애인을 위한 미사와 주일학교, 중국 동포 사목, 유아 동반 가족석, 심리상담실 등 다양한 사목을 통해 교회가 ‘자비의 희년’을 사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이런 자비의 정신을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런 사목이 얼마나 지속될까 내일의 걱정을 미리 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이 교회가 하느님의 교회인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은 어떤 계획 속에서 가고 계신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섭리를 무시한다면 이 교회는 망할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도해 나가실 때 하느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부르실 겁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영을 불어 넣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계획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분명히 하느님 계획에 따라서 완성을 향해 나갈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3년 전만 하더라도 발달장애인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겠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발달장애인을 위한 미사만 하지, 실제로는 그 부모들이 얼마나 고생하면서 뛰어다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우리 사회가 발달장애인에 대해 눈이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누가 했는가 생각해보면 제가 한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이 시작하신 것이고, 모든 일은 하느님이 주도하시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목이 얼마나 지속될까 너무 인간적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교회는 돌아온 탕자를 껴안고 그를 잔치의 주인이 되게 하신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가난한 사람을 껴안고 기쁨의 잔치에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복음은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기 가족만 아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그 가정 안에서 서로 힘을 합치고 다른 가정을 위해서 나아가고, 이러한 가정이 늘어나면 이 사회도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독특한 사목을 하지 않고 그저 본당 사제로서 미사하고 고해성사하고 환자들 방문하는 일을 주로 합니다. 하지만 제가 우리 본당 신자들만의 목자가 아니라 이 본당이 있는 지역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이 목숨 바쳐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제가 직접 하든 교우들과 함께하든 이 지역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선교라는 게 종교패권주의식 확장주의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사랑하고 다가가는 것이지요. 이 대도시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고독이 아닙니까?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대화를 시작하고, 사람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 사랑의 삶을 사는 게 저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당장 제 눈앞에 발달장애인, 조선족이 보이니 우선 그들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저는 우리가 자비를 살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부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고, 제가 봉사하는 이 교회가 가야 하는 방향이고, 이 사회도 결국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교회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닌, 인간을 위해 목숨 바치는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비의 선교사는 자비의 해 기간에 하느님 자비를 알리고 고해성사를 주는 사제로서, 죄의 경중에 따라 주교 또는 교황(사도좌)만이 사해줄 수 있는 죄도 자비의 선교사들이 사해줄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받았다. 한국천주교회는 이미 1986년 주교회의 춘계정기총회에서 교구장 주교에게 주어진 사면의 권한을 전국의 사제들에게 위임하였고,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1995년 제정) 제88조에서도 보편교회법에 의한 자동 처벌의 형벌은 고해 사제가 사면해 줄 수 있도록 제정하였기 때문에 자비의 선교사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미 갖고 있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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