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축성에서 시작된다! 평신도 ‘축성생활’의 본질과 사명 -7호 비평, 시대의 소리

모든 것은 축성에서 시작된다!

평신도 ‘축성생활’의 본질과 사명

국춘심 (성삼의 딸들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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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는 축성, 수도자는 봉헌, 평신도는……?

어느 교구 교리신학원의 수업시간.

“자매님은 무슨 축성을 받으셨나요?”

“…… 저는 아무 축성도 받지 못했는데요.”

“그래요?”

“처녀시절엔 수녀가 되고 싶었는데 되지 못해서…….”

“혼인성사는 받으셨어요?”

“예.”

“형제님은 어떤 축성 받으셨어요?”

“아이고! 사제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축성을 받아요?”

“혼인성사는요?”

“받았지요.”

  • 세례성사와 혼인성사를 받고도 축성은 받지 못했다는 이 답변이 적지 않은 평신도들의 정체성인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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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신자들, 아니 적지 않은 수도자들과 사제들도 ‘축성’은 사제의 몫이요, ‘봉헌’은 수도자의 삶이며, 평신도는 이도 저도 아닌 나머지들로 여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사제에게는 축성이 강조되고 수도자에게는 봉헌이 강조되며 평신도에게는 둘 다 강조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이것이 ‘평신도 축성생활’이라는 부제(副題)가 불러일으킬 만한 의아함의 뿌리일 듯싶다. 이 글에서는 모든 신자의 삶, 교회 전체의 삶의 출발점이자 토대인 ‘축성(consecratio)’이라는 용어를 숙고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절대다수요, 교회의 주역인, 주역이어야 하는 평신도가 받는 축성의 의미와 실재를 되새김으로써 평신도의 정체성 인식과 사회의 복음화에 대한 사명감을 더 부추기고자 한다.

  • consecratio, 축성인가 봉헌인가

“금년은 교황님이 정한 ‘봉헌의 해’입니다. 신자 여러분은 무엇을 봉헌하시겠습니까?” ‘축성생활의 해’(2014.12.1-2016.2.2)를 지내는 동안 어느 본당 보좌신부가 강론 중에 했다는 말이다. 과연 그는 이 말을 어떤 의미로 했고 신자들은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이 사소한 일화에는 축성과 봉헌이라는 말을 둘러싼 한국교회 안의 혼란이 잘 드러난다. 우선 ‘축성생활’과 ‘봉헌생활’이라는 두 용어 사이의 혼란과 ‘봉헌생활’이라는 명칭과 ‘봉헌’ 사이의 혼란이다. 첫 번째 혼란을 밝히면 두 번째 혼란은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consecratio라는 말의 신학적 의미는 ‘신화(神化)하다’, ‘성스럽게 하다’이다. ‘성스럽다’는 말은 모든 종교에 공통된 용어로 그 가장 고유한 말뜻은 “분리되어 따로 보존된, 그리고 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경우 특히 하느님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거나 의미하거나 실현하면서 그분과 직접 연결된 모든 것에 관해 쓰는 말이다. 이 개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서 두 가지 차원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먼저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여 부르신 사람에 대해 능동적으로 주도하시는 자유롭고 독점적인 행위로서 성령을 통해 그를 성삼위의 사랑의 친교라는 거룩한 영역에 들게 하시는 행위를 뜻한다. 이 행위가 축성이며, 그리스도인 생활이 지닌 신비적 차원의 근원이 된다.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깊은 개인적 친밀함으로 그를 온전히 차지하시고, 자신을 위해 따로 보존하시며, 그의 존재를 온전히 새롭게 변화시키신다. ‘축성된 자’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형성하기 위함이다. 축성을 받는 조건은 그분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 곧 자유의지로 세례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렇게 축성을 받은 사람이 자유롭고 의식적인 응답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내드리는 행위가 바로 봉헌이다. 곧 축성을 통해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내주시는 하느님께 인간이 전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바치는 행위로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응답이다. 그리스도인 삶의 이 도덕적‧수덕적 차원의 응답을 통해 축성이 구체화된다. 기도나 시간, 예물이나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이웃을 위한 희생이나 봉사와 인내도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이 두 가지 차원이 포함된 라틴어 consecratio는 따라서 ‘축성봉헌’으로 번역됨이 바람직하지만, 편의상 줄여서 부른다면 ‘봉헌’보다는 하느님의 주도적 행위인 ‘축성’이 훨씬 더 적절하다 하겠다. 축성이 먼저고 그에 대한 응답이 봉헌이기 때문이다.

  • 뿌리축성으로서의 세례

축성과 봉헌이라는 이 단일한 실재의 두 측면은 기본적으로 세례성사와 혼인성사 및 성품성사를 통한 축성봉헌(이하 ‘축성’)에 동일하게 들어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우선 세례로 축성되었으며 말씀과 성사로 실존적인 축성을 받는다. 현재 교회에서 부적절하게도 ‘복음권고를 서약하는 그리스도인’만을 ‘축성생활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의 축성이 더 탁월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고유한 다른 적절한 명칭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축성생활자의 우선적 임무는 존재 자체와 삶으로 사제나 평신도들에게 자신의 축성을 상기시키는 일이다.

세례축성 후에 받는 모든 축성(혼인축성, 사제축성, 주교축성, 축성생활의 축성)은 이 세례축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혼인축성, 사제축성, 축성생활자들의 축성은 여러 교회문헌에서 세례축성에 토대를 둔 “새롭고 특수한 축성”이라고 말해진다. 사실 세례축성에서 출발하는 교회 안의 모든 축성이 함께 교회의 삶과 거룩함을 이룬다. 교회의 모든 것은 바로 축성에서, 곧 근본적 축성인 세례축성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특히 평신도들의 혼인축성에 대해서 공의회는 “그리스도인 부부는 그 신분의 의무와 존엄성을 위하여 특수한 성사로 견고하게 되는 것이니, 말하자면 축성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요한 바오로 2세는 “남녀 관계를 부부의 형태로 축성하여 주고 이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표지로서 밝혀 주는 혼인성사는 교회 생활에 있어 극히 중대한 가르침, 교회를 통해 오늘날의 세상에 전해져야 할 가르침을 담고 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52항)고 말한다.

사명을 위하여 축성되다

이 모든 축성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축성도 세례 때 이루어지는데(마르 1,9-11 참조), 직접 축성의 효과를 내는 존재는 바로 성령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자렛 회당에서 사명개시를 선언하실 때 “주님의 영이 내 위에 계신다. 그래서 나에게 기름을 바르시고(=축성하시고)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8)고 선언하신다. 사실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기름 발린 자’, 곧 ‘축성된 자’라는 뜻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바로 세례성사에서 성령으로 도유되어, 곧 축성되어 삼위일체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축성받는 목적은 루카복음 4장 18절에서 드러나듯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비롯한 당신의 사명을 위해서이다. 따라서 교회 안의 모든 축성도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각자의 고유한 사명을 위해서이다. 사제와 축성생활자만이 아니라 모든 평신도도, 혼인성사로 축성된 이들도 그리스도처럼 축성을 통해 나름의 사명을 받고 그 사명을 행할 힘을 성령에게서 받는 것이다. 곧 축성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축성과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명이 그렇듯 무릇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한 것이다. 특히 “성품성사와 혼인성사는 타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 성사들은 개인적인 구원에도 이바지하지만, 그것은 타인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이루어진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34항)

그렇다면 세례축성의 결과에 대해, 혹은 그 안에 포함된 실재에 대해 숙고할 때 우리는, 영원히 삼위일체 하느님의 차지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의 변화가 이루어진다든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 안으로 들어간다든가,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면서 그분과의 새로운 인격적 관계를 형성한다든가 하는 내적 차원만이 아니라 바로 타인을 위한 이 사명의 차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요컨대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를 가시적으로 현존케 할 사명’인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위대한 재발견 중 하나인 보편 성화성소는 바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받은 이 세례축성에서 기원한다. 모든 하느님백성, 곧 교회의 세 신원 모두에게 공통된 첫째 의무인 이 거룩해질 의무(『교회헌장』 32항; 40-42항)는 바로 세례축성의 결과이며 봉헌의 토대이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 4,3) 특히 혼인축성은 “나날이 더욱 자기완성과 상호성화를 위한”(『사목헌장』 48항) 축성이다. 사실 성덕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고 주어야 하는 최고의 선물이요 우선적 사명이다. 혼인축성은 이 성화의 부르심과 임무를 더 강화한다. “이 부름은 그들이 받은 혼인성사로써 구체화되고,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의 현실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가정 공동체』 56항)이다.

  • 십자가에서 완성되는 축성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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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은 전통적으로 수도자들에게 적용되어 온 표현들 중 적어도 두 가지를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명시적으로 확장한다. 그것은 ‘시류를 거슬러가기’와 ‘복음적 철저성’으로서 이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복음적 가치에 반대되는 세속의 흐름에 저항하고 불이익과 고통을 무릅쓰고 철저히 복음을 사는 것은 사제나 수도자만의 임무가 아니라 세례로 축성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예언직 임무이다. 복음의 가치가 궁극적으로 인간 존중이요 사랑이라면 세례로 축성된 이들이 사사로운 사랑에서 담대하게 사회적 사랑으로 문을 열 때 사회의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헌장은 거룩함에 이르는 탁월한 수단을 그 어떤 경건주의나 수직적 영성도 아닌 ‘사랑’으로 제시한다(43항 참조). 그리스도의 축성이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는 순간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가장 무력하게 죽어 가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내주는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다면, 그리스도인의 축성도 나날이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줄 때, 곧 매 순간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을 때, 일상의 죽음들을 받아들일 때 살아지고 완성된다.

  • 타인을 위해 축성된 자의 세 가지 연대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진리를 독점하고 천사들에 둘러싸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축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육화에서 파스카 사건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타자(他者)를 위한 존재’로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듯이 바로 ‘타자를 위해, 타자를 향해, 타자 안에, 타자와 함께, 타자를 통하여’ 현존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축성된다. 실제로 이는 세례로 축성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세 가지 차원의 연대로 실현되는데, 그것은 삶에서, 죽음에서, 그리고 책임에서의 연대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6년 5월 21일 알제리의 작은 마을에서 무장이슬람 집단에게 살해된 엄률 시토회의 7명 수도자 중 크리스티앙 신부의 유언은 평신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다.

어느 날 – 바로 오늘일 수도 있겠는데 – 현재 알제리에 살고 있는 외국인 전부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은 테러리즘에 제가 희생된다면 우리 공동체와 교회와 제 가족은 제 삶이 하느님께, 또 이 나라에 온전히 선물로 주어진 삶이었음(삶에서의 연대)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 또한, 저의 이 죽음을 저와 똑같이 폭력 아래 죽어 가 무관심 속에 남겨진 이름 모를 수많은 다른 이들의 죽음에 묶어(죽음에서의 연대)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 불행히도 세상을 지배하는 듯한 악에, 또한 마구잡이로 덮쳐올 수 있는 악에도 제가 ‘공범’이라는 사실(책임에서의 연대)을 깨달을 정도의 세월은 살아왔습니다.

바로 그래서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고 연대하는 노란 리본은, 전국의 광장과 각자의 자리에서 국민을 위한 정치를 위하여 치켜드는 촛불은, 먼 나라의 지진과 전쟁의 희생자를 위한 연대는, 사회적 약자를 편드는 모든 언행은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이나 양심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례로 축성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의무인 것이다.


국춘심. 성삼의 딸들 수녀회 총봉사자.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석사, 로마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글라레띠아눔에서 축성생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신도와 수도자, 신학생을 위한 교육과 번역, 방송 등의 사도직을 맡고 있으며, <가톨릭 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저서로는 Comunione missionaria, 『왁자지껄 교회 이야기』(공저)가 있고, 역서로 『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돈 치마티』, 『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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