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이 아닌 ‘혁명’으로 삶의 민주주의를 확장하라 -7호 엄기호,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리셋’이 아닌 ‘혁명’으로 삶의 민주주의를 확장하라
엄기호,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2016년 초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은 “세상이 계속 좋아질 것을 믿는 문명이 수명을 다했다”고 우리 시대를 진단했다. 열심히 일하면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아무리 노력해도 삶은 더 각박해지고 그 노력마저 안 하면 완전히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되는 오늘의 현실을 이제는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제는 도저히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탄식 속에서, 차라리 다 깡그리 망해버리면 좋겠다는 분노와 냉소가 퍼지고 있다.
매 주말 광화문 광장을 뜨겁게 밝히는 촛불은 이 분노와 냉소를 태워버릴 수 있을까? 촛불이 만드는 새로운 역사 앞에서, 역사 자체를 ‘리셋’하고 싶어 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본 사회학자 엄기호를 만나 그의 신간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창비, 2016)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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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한국 사회, ‘리셋’에 담긴 절망

Q. 한국 사회가 이제는 정말 바뀌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사람들을 매 주말 광장에 나오게 만드는 힘이라 여겨집니다. 마치 이 촛불을 예견하듯 때마침 책이 나왔는데, 어떤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사실 2년 전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테러 사건을 보면서 종교근본주의자들이 왜 생기는가, 더군다나 소외된 계층에서 그런 과격한 이들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청년들 중심으로 만나는데, 몇 년 전부터 망하면 좋겠다든지 이미 망했다고 하고, 차라리 전쟁이 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게 청년뿐 아니라 어른들도, 남녀노소 모두 같은 말을 합니다. 할아버지들은 전쟁이 터져야 정신 차린다고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신기하게도 할머니들과 나이 많은 중년 여성층은 그래도 전쟁이 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그분들 빼고는 망하면 좋겠다고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왜 그랬으면 좋겠냐고 물어보면, 그들이 보기에 이 사회는 구제불능이라는 거죠. 열심히 하면 잘 먹고 잘산다는 희망,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국가가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희망, 빈부격차가 줄어들고 무언가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이 사회에 그런 희망이 없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우리는 안 죽으려면 미친 듯이 살아야 합니다.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건 확실한데, 열심히 살지 않으면 완전히 죽는 수밖에 없으니까 미친 듯이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절망인 거죠.
유럽에서는 이 절망이 이주노동자의 자녀, 무슬림, 주변화된 사람들이 ‘게토화’된 삶을 살면서 거기서 테러 같은 모습으로 튀어나오는데, 한국은 상당히 보편적이에요. 자영업자들이 먹고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도 내가 여기서 언제까지 버틸지 모른다, 그 이후에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커지고 있습니다.

Q.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변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처음 시작된 건 1998년 IMF 체제 때부터라고 생각되는데,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나아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외환위기 후 다시 2004년까지 아파트값이 오르다가 세계경제위기 때 폭락하는 등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는데, 전체적인 흐름은 내려가고 있다고 사람들은 체감하죠.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저 위치에 있는 사람도 허망하게 간다고 느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광우병 투쟁 때, 이렇게 사람들이 열심히 나와 반대해도 아무것도 안 바뀐다고 느꼈죠. 정부에서 들은 척도 안 했잖아요.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와서는 완전히 민주주의가 멀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세월호 사건이죠. 이 국가는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어진 메르스 사태 때도 엄청난 것을 느꼈습니다. 올해 발생한 지진, 여성들에게는 강남역 사건, 비정규직에게는 구의역 사건 등 이런 게 연쇄적으로 계속 터지니까, 과거에는 소수의 일, 나와 무관한 일이라 애써 외면을 했다면, 지금은 그것이 안 되는 것이죠.

 

  • 파괴적 ‘리셋’은 역사성을 지닌 ‘혁명’과 다르다

Q. 사실 ‘리셋’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컴퓨터의 리셋처럼 초기화하고 싶은 욕구, 세상을 원점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은 혁명의 욕구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이를 혁명과 구별하여, 파산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냉소, 유예, 도피, 리셋이라고 구분했습니다. ‘리셋’과 ‘혁명’의 차이는 어떻게 구별될까요?
‘리셋’이란 말 그대로 초기화하고 싶은 것이에요. 지금 있는 것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거죠. 한국이 만들어 온 민주주의와 산업화, 다 실패한 것이니 애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안에서 저항하고 만드는 건 소용이 없다는, 구제불능이라는 의미에서 리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태초로 돌아가는 것, 지금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주장하는 것이 초기 칼리프 국가를 재건하겠다는 겁니다. 우리로 하면 초대교회 영성으로 돌아가자는 개념인데, 다른 점이라면 가톨릭교회의 2천 년 역사를 다 부정하고 초대교회로 가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리셋은 허무주의적인 종말론에 가깝죠. 실제로 일본에서는 ‘옴진리교’가 그랬고,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종교화되어 자신들이 새로운 사회의 첫 번째 아담, 하와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거 같습니다.
‘혁명’이라는 건 다음으로 넘어가자는 것이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참조하고 그 역사 안에서 살리려고 노력했던 흐름을 인정합니다. 혁명은 계보가 있고 선구자들도 있지만, 리셋은 아무 것도 없이 다 날려버려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 광장에서 멈춘 민주주의, 삶으로 확장하기 위하여

Q. ‘금수저’, ‘흙수저’ 등 흔히 우리 사회를 신계급주의 사회라고 보는데, 이 책에서는 ‘안’과 ‘밖’으로 구분한 것이 인상 깊습니다. 계급이라는 건 어쨌든 사회 안의 이야기고,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시스템에 들어오지 못하고 비인간화되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 여부를 떠나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물질화되었습니다. 이런 프레임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요?
저는 ‘안’과 ‘밖’의 통치라는 걸 오랫동안 생각해왔습니다. 아이와 옹(Aihwa Ong)이라는 문화인류학자가 우리말로 하면 ‘추방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as Exception)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지금의 자본주의는 ‘포획’하는 게 아니라 ‘추방’하는 것으로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현 자본주의 권력이라는 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대들면 추방하겠다고 협박하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친 듯이 노력하면 안으로 들여보내 주겠다고 가혹하게 착취하는 방식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비정규직 문제죠.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겠냐, 북한 사람 아니냐고 소위 ‘종북몰이’를 하는 것도 한국에서 대표적인 추방 논리입니다. 사회 밖으로 쫓아내서 비국민으로 만드는 거죠. 추방과 착취, 이 두 가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게 제가 말하는 ‘안’과 ‘밖’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데 이게 훨씬 더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Q. 이런 것들이 지배층의 통치논리인데, 이 틀을 바꾸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중은 정치를 불신하고 혐오하면서도, 메시아니즘에 기대듯 또 정치에 기댑니다. 그런데 책에서 대의민주주의 정치에 기대기보다는 우리 일상의 삶에서 먼저 변화된 삶, 두 번째 혁명을 경험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다른 삶이 가능할 수 있다는 변화의 실마리(촉진제)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가 87년 민주항쟁 이후로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투표나 광장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을 사는 회사라는 사회 안에서는 민주주의를 누려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이곳이 민주적 공간이 될 거라는 생각도 안 합니다. 학교나 집, 특히 회사에서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는 것은 존엄함에 있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니 아무리 회사라도 나를 인격적으로 모독할 권리가 없고, 나 또한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모독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료시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개념이 광장과 투표소 외에서는 작동을 안 하고 있어요. 집에서도 자식을 동료시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학교에서 교사도 학생들을 동료시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적인 시공간 안에서 서로를 동료시민으로 대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조심을 해야 하죠. 그렇게 되기 위해 법적·제도적 장치도 필요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적용되는 법이 다르니, 서로 무관한 존재가 되어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하인처럼 부려도 되는 상황입니다.
서울시 조희연 교육감이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은 시민’이라는 개념을 썼는데, 이는 학생들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며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겠다는 것, 동료시민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학교에서도 학내 민주주의, 학내 자치권, 학생들의 자치활동이 많아져야 하고, 그것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 ‘변이’, 협력의 기술

Q. 존중받고 싶은 사람들은 약자인데, 이들이 힘을 가진 이들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는 건 밖으로 밀려날 각오를 무릅써야 하는데요. 그런 용기를 어떻게 낼 수 있을까요?
그런 용기를 내기 위해 중요한 건 혼자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결사체를 만들어야 가능합니다. 그 결사체를 만들어내는 공간이 지금의 촛불광장이어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처지인 사람들끼리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결사체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 광장에서 여성과 청소년들은 새로운 결사체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페미당당’이나, “모든 어른들의 지도를 거부한다”란 슬로건을 내세우며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중고등학생연합과 같은 이들이 그런 예입니다. 촛불광장에서 이런 결사체가 많이 만들어져야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박근혜를 쫓아내자’라는 정치투쟁 이상의 의미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Q.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시민으로 살다 보면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데 그게 참 힘듭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함께’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는 이들과 어떻게 ‘함께’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지금 한국은 토론 불가의 상황이라고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 하지 않고요. 계속 나와 뜻이 맞는 사람들의 세력을 늘리는 것, 그 정도만 하고 있어요. 그게 가장 큰 문제죠.
제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썼는데, 저는 ‘협력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말을 돌려줄 때, ‘비판’, ‘공감’, ‘변이’라는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비판은 말 그대로 틀렸다고 하는 것이고, 공감은 맞는다고 수긍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변이입니다. 찬반을 떠나 그 사람의 언어를 내 언어로 재해석해서, 그 사람의 말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박근혜를 왜 지지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한다면, “네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이렇다는 거지?”하고 그 사람의 말로 돌려주는 겁니다. 내가 ‘달리 말하면’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자기주장이었지만, 제가 그 말을 돌려주면 자기 언어에 대해 성찰할 수밖에 없는 거죠.
소크라테스가 했던 대화법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한국은 이 ‘달리 말하면’이 없는 사회에요. 그리고 그 사람의 말을 돌려주더라도 그 방식이 ‘조롱’인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조롱과 비아냥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조롱을 당하면 수치심을 가지고 복수하고 싶어져요. 옳고 그름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요.

  • 서로 존중하고 철저하게 평등한

    이상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교회

Q. 책을 보면 모든 이가 철저하게 평등한 공동체, 있는 그대로 상대를 존중하는 공동체로서 이상적인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이미’ 살고 있는 존재인 교회의 역할, 이 시대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에게는 가톨릭학생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가대연 후배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감옥에 가게 되었을 때, 친구랑 저랑 “저 녀석 감방 가면 우리가 최소 10년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이미 살아가는 공간이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길게 보는 것이죠.
제가 이념적으로 투철하지 못했지만 가톨릭학생회가 좋았던 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길게 보았고, 이해관계로 발 빠르게 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세상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안전할 수 있다, 내가 잘못했다고 해서 내칠 사람들이 아니라 고쳐줄 사람들이다, 서로를 통해 배워나간다는 그런 신뢰가 있었습니다.
사회 안에서 종교와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는 둘째치고라도, 우선 그 안에서 존중받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가능성이거든요. 교회가 세속의 위계적 가치와 상관없이 형제자매들끼리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도록 노력을 해야지요. 평등공동체의 가능성, 그것이 이 시대 교회의 가장 큰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교회사를 보면 끊임없이 기초공동체 운동이 나오잖아요? 끝날 때쯤 새로운 것이 나오는 그런 흐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완전히 불가능하다면 안될 텐데, 역사적으로 쭉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입니다.

  • 촛불광장에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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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 책의 프롤로그 첫 마디가 “나는 역사의 힘을 믿는다” 였고, 에필로그에서는 촛불광장에서 해방을 미리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광장 이후의 삶, 이 촛불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역사는 무엇입니까?
저는 민주주의를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제도적인 것에서, 사람의 관계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확실히 과거보다 성장했습니다. 광우병 촛불 때만 하더라도 나를 안전하게 해 달라는 요구였다면, 지금의 촛불은 그것보다는 더 나가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가 앞으로 나간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보다 더 현명해질 수 있을지 아니면 더 오묘한 짓을 하다가 망할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너무 탐욕스럽게 되어버려 다들 길게 안 보잖아요. 사람들이 종교를 믿던 시절에는 시간을 길게 보았어요. 내가 잘못하면 신이 나에게 징벌할 것이라는 그런 개념이 사라지니, 나에 대한 단기적 이익만 바라고 있죠.
역사라는 것 자체가 시간을 길게 본다는 겁니다. 제가 역사의 힘을 믿는다는 건, 길게 볼 때 우리가 현명해질 수 있고 제대로 된 전략을 낼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이 모든 사달의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너무 무리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시간을 길게 보지 못하는 사회니까 계속 무리하는 거지요. 이 촛불광장에서 우리는 삶의 민주주의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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