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는가? – 8호 비평, 시대의 소리

교회 안에는 예수가 있는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이것은 천주교회 내에서 하나의 공리(公理)처럼 통용되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천주교회가 하느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세상은 자신보다 열등하다는 우월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천주교회는 교회 밖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교회의 우월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한 가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보려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는가?” 재차 묻고자 한다. “교회 안에는 정말 구원이 있는가?”

천주교회가 구원의 담지자라는 자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예수와 동고동락했던 사도들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선교에 파견하신 증거자들인 ‘사도들의 기초’(에페 2,20; 묵시 21,14 참조) 위에 세워졌다”(󰡔가톨릭교회교리서󰡕 857항)는 선언은 천주교회의 자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천주교회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문장을 진리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교회 안에는 예수가 있는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예수가 없는 교회 안에는 당연히 구원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예수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가? 지금까지 필자는 천주교회 안에 예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질문 앞에 서보니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는 예수의 요구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느꼈던 당황스러움이 어느새 필자의 것이 되어버린 듯하다. 자연스레 필자가 속한 한국천주교회(이하 한국 교회)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된다. 과연 한국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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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 예수가 없다?: 한국 교회의 영적 젠트리피케이션

프란치스코 교종이 방한했을 무렵, 필자는 한국 개신교계 일부에서 천주교회를 이단으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라며 호통을 치던 예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호통은 이내 한국 교회를 향하고 있었다. 한국 교회는 교종 방한 효과를 한껏 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연이어 터지는 추문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왔다. 교종의 의지와는 동떨어진 듯 보이는 교회 지도자들의 언행, 일반 기업들보다 못한 교회 내 노동자들의 인권, 사제들의 성추문이 잇따라 세상에 알려지더니, 급기야 최근에는 현직 신부가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예수의 적자(嫡子)라는 공언이 무색할 지경이 되었다. 이제 더 큰 추문이 폭로된다 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추문들이 오래전부터 예견됐지만, 한국 교회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는 1970~80년대에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했던 일부 구성원들 덕분에 국민적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 결과 한동안 폭발적인 교세팽창기를 보냈던 한국 교회는 내적인 복음화에 힘쓰기보다는 외적인 성장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정진석 추기경이 2004년 서울대교구 사목교서에 발표했던 ‘복음화 2020운동’(2020년 인구대비 신자 비율 20% 달성 운동)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의 사목교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한 성직자의 강연 내용은 외적 성장에 골몰하는 한국교회의 상황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2005년 기준으로 서울시 인구의 12.99%가 천주교 신자이다. 2020년 인구대비 신자비율을 20%로 증가시키려면 68만8406명의 신자가 증가해야 한다. 이것을 15년으로 나누면 서울대교구에서 매년 4만5894명의 신자가 증가할 때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연간 목표치를 교구 본당 수(215개)로 나누면 213명이란 숫자가 나온다. 각 본당에서 매년 신자 213명이 늘어나면 2020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한 본당에서 연간 213명은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숫자는 아니다. 오히려 목표치가 정해져 있음으로 해서 신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참여율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리라 본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고, 교구마다 신학교를 지어나갔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하는 구성원들이 나타났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치적 쌓기에 골몰하였다. 이러다 보니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성전을 짓는 일이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인식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또한, 한국 교회는 각종 이권이 걸린 사업에 참여하여 대외적인 영향력을 확장해나갔다. 특히 국가 보조금을 얻어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여러 의료‧복지시설을 확장하면서,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건축된 성전은 돈 있는 자들과 그들을 두둔할 수밖에 없는 성직자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성전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신학교는 운영난에 처하게 되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교구민들이 짊어지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 의료‧복지시설을 이용하는 클라이언트는 보조금을 타기 위한 수단이자, 숫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는 교회 비즈니스의 최대 파트너가 되었다. 최근에는 국가와의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 한국 사회 곳곳에 배타적인 영역을 구축하려는 모습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소문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을 둘러싼 천도교 및 민족주의 사학계와의 갈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교구와 서울시 중구청은 이 사업이 천주교 성지 조성사업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인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있는 사람들(마태 25,35-36)을 마음속에서 내쫓아 버리고, 성전 수, 신자 수, 신부 수, 클라이언트 수 등으로 빈자리를 채워버린 한국 교회 안에 예수가 설 자리는 점점 없어지게 되었다. 예수는 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마태 25,40)이 바로 자신이라고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가히 영적(靈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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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젠트리피케이션의 결과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일부 구성원들이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프란치스코 교종마저도 경고했다. 그는 한국 주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교회는 중산층의 공동체가 되어,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그 안에 들어가기를 부끄러워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또한 정신적 웰빙, 사목적 웰빙에 대한 유혹입니다. 곧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또는 잘사는 자들을 위한 중산층의 교회가 되려는 유혹입니다. ……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쫓아내지는 않지만, 가난한 이들이 감히 교회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또 제집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도 없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번영에 대한 유혹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는 교종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종이 경고했듯이, 한국 교회는 ‘사교 모임’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명목상 교회 안에서 예수를 찾지만, 실상 그들이 찾는 것은 세속적인 이익에 불과할 경우가 다반사가 되었다. 어쩌면 교종이 방한했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저승에서 절규하는 부자의 목소리에 응답한 아브라함(루카 16,19-31)이 오늘날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그들이 교종의 말도 듣지 않는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영적 젠트리피케이션의 결과는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 총조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1995년 288.5만 명(총인구 대비 6.6%), 2005년 501.5만 명(10.8%)으로 급증했던 천주교 인구가 2015년에는 389.0만 명(7.9%)으로 급락한 것이다. 이것은 꾸준한 교세성장세를 보여주었던 한국 교회의 자체 교세통계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주교회의가 펴낸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15󰡕에 따르면, 2015년 12월 31일 현재 한국교회의 신자 수는 5,655,504명이다. 그런데 통계청이 집계한 천주교 인구는 3,890,311명이므로, 양자의 통계 결과 사이에는 1,765,193명의 차이가 나타났다.

보통 주교회의 통계는 세례자와 교적을 토대로 작성된다. 반면 통계청 통계는 응답자가 자신을 천주교 신자로 인식하는 주관적인 응답을 반영한 수치이다. 따라서 통계청 통계는 주교회의 통계보다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왜 나타나게 된 것일까? 필자는 이러한 차이가 천주교를 믿고자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들 가운데 다시 교회 밖으로 나가버린 사람들의 숫자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한다. 다시 말해, 이 통계 차이는 천주교 입교자들 가운데 약 31.2%가 한국 교회 안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다시 교회 밖으로 나가버렸으며, 결국엔 천주교인이라는 자의식마저 지워버린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교회 밖으로 내몰림 당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한국 교회는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유다인가 베드로인가?: 선택의 갈림길에 선 한국 교회

이제 한국 교회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 교회 밖으로 내쫓아버린 예수를 다시 교회 안으로 모셔 들일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계속 배척할 것인가? 그 결말은 2000년 전, 유다 이스카리옷과 베드로의 선택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제시되었다. 유다는 은돈 서른 닢에 예수를 배신하고, 그를 유다인들에게 팔아버렸다. 예수를 마음에서 내쫓았던 유다는 결코 다시 예수께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살했고, 예수를 팔고 얻은 돈은 죽은 자, 그것도 이방인들의 묘지를 사는 데 쓰였다(마태 27,5-8). 베드로 역시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흐느껴 울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에게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고백했다. 이후 그는 복음 선포에 앞장섰고, 복음 때문에 순교하였다. 결국 그는 교회의 반석이 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사도 2,36-38)

베드로는 예수를 못 박은 죄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십시오”라고 당당히 말했다. 지상의 나그네인 교회 역시 베드로처럼 실수할 수 있다. 실수할 수 있어서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을 절실히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도 회개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회심의 시기인 사순시기를 시작한다. 한국 교회는 결단해야 한다. 유다처럼 예수를 계속 내쫓을 것인가? 아니면 베드로처럼 회심하여 예수를 다시 모셔 들일 것인가? 그 결단에 따라 “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는가?”에 대한 대답도 달라질 것이다.


김선필. 제주대학교 강사. 역사‧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종교를 연구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 지배구조의 형성과 변형: 교회 쇄신을 위한 사회학적 검토 』(박사학위 논문), 『천주교회의 관료제적 특성이 한국교회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수용에 미친 영향』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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