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거룩하고 다양한 부르심을 생각하다 – 9호 비평, 시대의 소리

성소, 거룩하고 다양한 부르심을 생각하다

권순남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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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그 설렘

 성소(聖召), 이 말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그분이 나를 부르신다는데 어찌 설레지 않겠는가?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의 개인적인 부르심, 그 부르심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중년인 나는 아직도 귀밑 빨개지는 소녀 같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마치 내가 듣는 사랑 고백 같은 말이다. 내 신분이 수도자라서 그런 수도성소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부르심에 대한 설렘이다.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은 성소주일이다. 각 성당 주일학교마다 이날은 마치 빼먹으면 안 되는 주요한 연중행사를 해야 하는 날 같다. 나도 수도회 입회 전 교리교사를 하며 내 젊음을 쏟아부었던 그 싱그러웠던 시절, 성소주일마다 주일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신학교, 수도원, 수녀회를 돌아다니며 그날 그곳에서 제공했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학생들에게 나중에 커서 신부님과 수녀님이 되면 좋겠다고 덩달아 강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다가 나 역시 수도성소로 불린지 30년이 넘어섰다. 수녀가 된 나는 이제 반대로 성소주일 행사의 주최자가 되어 한 코너를 맡아 내 어린 시절 수녀원 방문 때 체험했던 그 일을 도와주곤 했었다. 우리 수녀원은 신학교 곁에 있어 신학교 개방행사가 있는 해는 온종일 수녀원이 미어터진다. 여러 지역에서 놀러 온 주일학교 어린이와 교사들을 맞이하여 수녀가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힘을 다 쏟았건만, 정작 수녀원에 입회하겠다는 자매는 가물에 콩 나듯 나타난다. 남자 수도회도 마찬가지겠지만, 현재 많은 여자 수도회는 수도성소 급감으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내가 수녀원에 올 때만 해도 수련소 식구가 60~70명이었는데 지금은 줄어도 참 많이 줄었다. 한국 여자 수도회의 수도성소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또한 성소라는 주제 앞에서, 나는 부르심에 대한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해 보고 싶다. 남들은 좀 낯설어할지도 모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펼쳐본다.

부르심을 이해하는 일, 참 신앙의 시작

 내가 예비신자 교리반을 시작할 때 예비신자와의 첫 만남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이야기가 바로 부르심이다. 성당에 왜 나오게 되었는지 동기를 들어보면 한 사람도 같은 이유가 없다. 어쩌면 그렇게도 다양한 동기로 성당 문을 두드리게 되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런데 그 동기야 어찌 되었던 ‘신앙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들을 때만 참 신앙인으로 서게 되고 각자의 소명을 이해하고 살게 된다. 그렇지 못하다면 결국 자신들이 바라고 상상했던 그 동기가 채워지길 기대하고 비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각 본당의 예비신자 교육 기간에 이 중요하고도 보편적인 부르심, 즉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삶의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 그 사람을 부르신 이유를 깊이 깨닫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느님께서 각 개인에게 주신 다양한 재능과 카리스마를 세상에 펼쳐 공동선에 기여하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함을 알리는 일, 그것이 예비신자 교육 과정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 같다. 기도문을 외우는 것, 교의, 신자가 지켜야 할 의무 교회법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부르시고 그리스도교 신자로 초대해주셔서 일생 어떻게 응답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보편적 부르심을 알아듣는 일,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핵심 교리며 진정한 성소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하시면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요청하신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부르심이 또 어디 있으랴! 그래서 이런 성소는 수도생활과 사제생활에로의 부르심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부르심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보편적 부르심에 대해 덜 강조하는 것 같고, 성소(聖召)라는 말 자체가 마치 수도자나 사제로 부르시는 것인 양 착각하는 그런 분위기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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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성소란?

 올해 4월 교황님의 기도지향은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성소에 기꺼이 응답하며 사제직이나 봉헌생활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기도합시다’라는 것이다. 매일 아침 하루를 봉헌하면서 이 지향으로 기도할 때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성소에 기꺼이 응답”하라고 먼저 말씀하신 점에 깊이 감사드린다. 왜냐하면 먼저 자신의 성소가 무엇인지 숙고하고 이에 대해 응답하라고 초대하신 다음에 사제직이나 봉헌생활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라 하셨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성소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설렌다고 하였다. 그 설렘이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 즉 자유의지, 재능, 성향, 관심, 카리스마 등 개인에게 주신 선물들이 자신의 삶 안에서 잘 발휘되어 세상 구석구석에서 아름다운 기여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나오는 설렘이다. 이런 내적 선물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목적대로 쓰여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는 하느님의 나라를 맛보는 세상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자면 이런 개인에게 주어진 선물들이 교회 안에서, 사회 안에서 잘 계발되어 발휘될 때만 창조의 협력자로서 이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 사회나 가톨릭교회, 수도회가 하느님의 그런 선물들을 잘 드러내게 하는 곳인지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든다.

이런 관점에서 특히 교회는 청년, 청소년들의 다양한 재능과 카리스마를 어디서 어떻게 발휘할 수 있게 하는가를 알려 주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성소계발이라 여긴다. 오늘날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성향과 자라온 환경을 보면 그런 필요성을 더 느낀다. 성소란 수도성소, 사제성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평신도로서도 자기의 재능과 삶의 환경에 맞추어 그들이 받은 예언직, 사제직, 왕직을 이 세상에서 구현하고 그 일을 통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수도성소와 현대 젊은이

 한국 수도회들은 성소 급감이라는 심각한 문제 앞에 봉착해 있지만 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과연 현재 수도회의 정체성(공동체 생활, 가난과 정결과 순명이라는 삶에 전생을 투신하여야 하는 삶,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요구되는 사도직 수녀회의 사도직의 역할)에 걸맞은 사람으로 양육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현재의 젊은이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내 나이만 되어도 세대차이가 너무 심해서 적응하기 어렵다. 지금 세상의 변화 속도는 예전의 변화속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정보사회, 인터넷과 SNS 사용의 원주민이 된 그들, 국제 사회가 자기 삶의 영역이 된 상황, 또한 핵가족 안에서의 적은 형제 수, 문자 세대가 아닌 영상 세대인 현재 젊은 신앙인들이 부르심에 대해 응답하고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발휘하고 살아갈 적합한 장소가 과연 수도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반문하고 싶어진다. 이런 질문은 수도회 내부에서 처한 여러 문제와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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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성소를 받은 이들의 공동체, 수도회

 수도회란 긴 여정을 걸어 온 곳이다. 중세 서구 문화라는 배경,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사고방식, 긴 서양문화 전통의 함축, 한 공동체가족의 연령 구성이 70여 년의 차이를 극복해야만 하는 세대 간의 사고방식과 삶의 격차, 현대 물질문명 속에서 태어나 인터넷과 스마트폰 속에서 생활해 온 이들과 그것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약한 세대가 한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환경, 본인의 개인 재능보다는 수도회의 카리스마가 더 중요시되는 분위기(이 점은 수도회마다 성격이 다르겠지만 여기선 일반적인 현상을 이야기한다), 이런 수도공동체 안에서 오늘 이 시대를 대변하는 청년 세대가 과연 어떤 국면을 맞이할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수도생활은 각 수도회와 창설자의 카리스마를 배우고 익혀 그 카리스마를 현대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물론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일은 기본이지만, 수도회의 전통이나 살아가는 방법은 차이가 크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즈음해서도 심각했었지만, 세상의 변화 속도를 교회나 수도회가 따라가기가 벅차다. 특히나 전통이나 교의와 교회법, 규칙이 강한 곳이 교회이고 수도회이다 보니 변화하는 세상과 시대징표를 읽고 거기에 적응·쇄신하는 일, 즉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를 만드는 일은 정말 어렵게 보인다. 세상은 급변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변하고 생활방식도 변하고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의 세상에서 예수가 제시하신 대안 공동체를 보여주고 살아야 하는 교회와 수도회는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는 공동체(사도 2,47 참조)가 되어 살기가 그리 녹록지가 않다. 더구나 요즘 교회 안에서 불거지는 사회적인 스캔들이나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에서, 우리가 보여주는 공동체에서 예수의 사명을 드러내기는 더 힘이 든다.

부족한 성소?

 교회 안에는 젊은이가 부족하고, 신앙에 투신할 젊은이는 더 부족하며, 교황님께서 4월 지향으로 제시하신 사제직이나 봉헌생활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젊은이는 더더욱 부족하다. 인간이 만든 단체는 모두 수명이 있어, 탄생하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노쇠하여 쇠퇴하고 소멸하게 된다. 하느님의 특별 카리스마를 받은 모든 단체(수도회 포함)들은 그 시대 하느님의 요청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리고 그들이 받은 카리스마로 현대 사회에 하느님의 도구로 쓰일 일이 없으면 자동 쇠퇴하고 소멸하고 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 공동체는 새로운 세대들을 통하여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로 응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체 내의 쇄신과 변화를 거쳐 식별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이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는 예전과는 또 다른 형태의 복음 선포를 하도록 세계 구석구석에서 요청된다. 이런 곳에서 젊은이들이 수도자로서든 평신도로서든 응답하여 살아갈 일을 제시하여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 부르심에 눈뜨게 하는 양성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는 사제와 수도자들이 경험이 다양하므로 얼마든지 방향을 알려줄 수 있으리라.

어느 시대 어느 사람들이나 헌신하고 투신하고 싶어 한다. 인간 본성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창조된 지라 오늘 교회는 평신도들에게 이런 일에 희망을 품고 복음적 위해 투신하기 위한 신앙교육이나 양성 프로그램을 제공했으면 좋겠다. 대학 졸업 후에도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전전긍긍해야 하는 젊은이들 앞에, 세상은 넓고 그들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사실을 여러 분야로 알려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비단 수도회를 통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수도회의 성소자 숫자를 논하기보다 하느님 부르심의 자리가 어디인지, 어떻게 응답하여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교회의 지도자, 사제, 수도자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외국의 몇 나라에 여러 해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그때 만난 여러 나라 젊은 평신도들이 나에게 주었던 감동은 지금도 남아 있다. 서양 교회는 늘 비어 있고 성소자는 없다고만 들었는데, 그곳에서 내가 만난 젊은이들은 평신도로 살아가면서 신학을 깊이 연구하고 가르쳤고, 가난한 오지에 평생을 투신하러 떠나기도 했고, 자기 자리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그런 부르심을 응원하고 싶다. 또한 이런 젊은이들이 설레며 찾아 나설 수 있는 쇄신되고 깨어 있는 수도 공동체도 많아지면 더 반갑겠다.


 

권순남.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소속 수녀로 영성신학을 공부한 후 평신도 재교육에 대한 열정이 많아 강의를 다니고 있다. 대구 내당성당 꿈터(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본당일도 돕고 있다.

image 1 이외 image 출처 동일  http://photo.catholic.or.kr/alb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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