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운동의 영성을 찾아서 – 두려움 없이 성령의 바람을 따르는 삶

황경훈 아시아 평화 연대 센터장

절실함이 불러내는 성령

살다보면 사람의 마음이 절실해질 때가 종종 있게 마련인데, 생로병사 전체가 그러하겠지만 특히 심신이 지치고 아플 때가 아닌가 한다. 인천이라는 제조업이 밀집한 지역이라는 특징 때문이었겠지만, ‘노학(勞學) 연대’의 이름 아래 횃불이나 화염병을 들고 공장 근처에서 하루가 멀다하게 해오던 야간시위로 20대를 보내고, 어찌 어찌하여 20대 중반을 넘겨 한번 거부했던 군대에 다시 가면서 몸도 마음도 깡그리 망가져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던 30대가, 아마도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가장 지치고 힘들었던 때로 기억된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성령세미나’의 문을 두드린 것도 바로 그 때였다. 안수를 받으면 뒤로 넘어지는 것이 ‘쇼’로 보였고, 너무도 시끄럽고 이상했던 방언이나 통성기도, ‘오바’하는 찬양도 마땅찮았다. 그러던 내가 누구의 권유도 없이 제 발로 7주 동안 열심히 성령세미나에 참석했던 건 그 만큼 마음의 병이 깊었던 까닭이었던 것 같다.

강의가 끝나고 분임토론에서 만난 그룹원들은 나보다 더 절실한 사람들이었다. ‘힐링’이 만연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담론이요 기제’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정말로 그 사람들은 치유가 필요했다. 내 경우와는 달랐지만, 성령세미나에 참석한 많은 이들은 아마도 즉각적으로 성령의 임재나 치유를 받은 듯했다. 그래서인지 성령세미나는 짧은 기간에 그 어떤 심신단체의 교육이나 피정, 전례 프로그램보다도 급속하게 번져나갔다. 1990년대 초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조직이 각 교구로 흡수되고 체계화되어 ‘한국 가톨릭성령봉사회’라는 전국 조직 아래서 시쳇말로 ‘폭풍성장’을 해 나갔다.

그럼에도 사회문제보다는 자신, 가족, 교회에 국한된 성령봉사회의 활동과 영성은 내가 몸담은 ‘천주교 사회운동’이라 부를 수 있는 교회 내 진보세력의 영성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그러는 사이 사회운동 전반, 특히 천주교 진보운동은 평신도 활동가들이 하나 둘 떠나고 점점 더 침체되는 것을 보면서 성령쇄신운동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고민은 나만의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현상만도 아니었다. 이미 성령주의 교회와 오순절 교회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심지어 해방신학의 본거지이자 세계 가톨릭 인구 중 42%가 살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복음주의 계열의 신흥교파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오고 있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었다. 최근 미국의 가톨릭 주간지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National Catholic Reporter)에 따르면, 2011년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세계가톨릭청년대회’ 참가자 가운데 절반이 이 교파에 속한 이들이라고 한다. 현실이 이러하고 보니, 점점 약화되어가는 교회 내 진보세력이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어쩌면 이들의 영성과 활동에서 진보세력이 배워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명약으로 쓸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성령기도에서 치유는 중요하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교회 내 진보세력 중 생태적 공동체 운동을 강조해온 ‘예수살이’에서 제자단을 이끌고 있는 이호정 대표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현재 인천교구 은행동 성당의 성령쇄신기도회 회장이기도 한 이 대표를 만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참 반가운 일이었다. 성령세미나를 받은 뒤로는 성령쇄신운동에 대해 전처럼 부정적이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썩 긍정적으로만 보는 편도 아니어서, 내심 이 대표가 어떻게 매우 성격이나 활동도 다른 두 단체에서 아무런 갈등 없이(?) 활동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오십대인 이 대표가 성령세미나를 받은 때는 1984년경으로 한창 청년인 나이였다고 한다. 그 역시 안수 받고 넘어지고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세미나를 받고 달라졌다고 한다.

“개인사입니다만, 20대에는 심하게 방황을 했습니다. 성령세미나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지는 않았는데, 안수를 받았을 때 허리에 힘이 탁 끊기면서, 뒤로 넘어가게 되더라고요. ‘성령 안의 쉼(Resting in the Spirit)’이라고 하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이게 중요할 수도 안할 수도 있지요. 제가 보기에 기도회 때 통성기도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치유가 되는 것 같더라고요. 마음속에 응어리 진 것을 다 쏟아 낸 다음에 오는 평화로움은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겠지요. 아무 데에서도 해갈하기 어려운 영적 갈망이나 상처에 새 살이 돋게 하는 구실을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종교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부분이 성령쇄신운동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운동은 20세기 초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한 흑인 침례파 교회에서 목사의 지도 아래 신도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 데서 시작했다고 한다.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늦은 1960년대 미국 피츠버그의 한 대학에서 신학 교수들과 대학생들의 기도모임에서 출발했고, 곧 여러 대학과 성당, 수도원으로 퍼져 성직자와 수도자가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몇 년 뒤 한국에서도 성령기도회에 참가했던 메리놀회 신부들과 한국인 수사가 모임을 갖기 시작하면서 성령세미나를 열었고 그 뒤로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현재도 해마다 3만 명 안팎의 사람들이 성령세미나를 받고 있다고 한다. 성령쇄신운동은 1973년 ‘성신운동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뒤 ‘한국성령쇄신 봉사자협의회’로 바꾸고 주교회의 인준을 받아 전국 체계를 갖추었다. 그 아래는 교구마다 ‘성령쇄신 봉사회’가 있으며, 본당에는 본당 기도회가 있다. 협의회 창립시기 기도회 연참석자 수가 47만여명에서 2000년에는 566만여명으로 약 12배로 급격히 늘었고, 참가본당수도 137개에서 528개로 늘었다고 한다(‘한국의 성령쇄신: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한국가톨릭 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2002).

성령운동의 한국적 토착화?

미국에서는 방언이나 다른 은사 중심이었는데, 앞서 이호정 대표가 강조한 통성기도는 성령기도회가 한국적으로 ‘토착화’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평양의 한 장로교회에서 한국 교회의 첫 목사 가운데 한명인 길선주(1869∼1935) 목사가 공개적으로 회개하면서 시작된 회개운동에서 통성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개신교에서 교파를 초월해 마음껏 소리치고 울고불고 하는 통성기도 중심의 ‘심령대부흥회’가 그때부터 한국 전 개신교 교회의 독특한 전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대표는 통성기도의 장점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너무 개인중심, 복달라고 비는 구복적인 점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은 극복되어야 할 점이라고 지적했다.

“사람이 있으면 어느 조직이든 파벌이나 파당이 있기 마련인데, 본당에서도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본당에서 성령기도회에 참석하는 이들에게 이웃이나 사회는 너무 먼 이야기라서, 그걸 기도의 주제로 삼는다거나 하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자기나 가족보다는 본당 공동체와의 일치를 이루자고 강조하는 편인데, 그것 자체도 한계가 있지요. 본당만 강조하다보면 본당 밖은 남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이십대에 성령세미나 받고 난 뒤부터 성령쇄신봉사회에서 활동해 온 이 대표는 이런 저런 문제와 부딪히면서 잠시 쉬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만난 것이 예수살이였는데, 그에게는 ‘충격’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성령운동은 본당이나 ‘체육관’에서 시작하고 끝나는데, 예수살이는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하는 시각이나 태도가 너무 달랐다는 것이다.

“예수살이의 기본이 되는 것이 ‘4행 5계’인데, 일종의 규율이면서 실천 강령 같은 것이에요. 하루에 한번 명상(일명상), 일주일에 한번 봉사(주적공), 월에 한번 성찰(월성찰), 년에 한번 함께 살아보라(연공생)는 것이 사행이고요, 5계는 기도, 노동, 배려, 공유, 정직인데, 여기에는 신앙과 삶이 함께 있는 거지요. 오프(Off) 운동도 있는데, 이것도 생활 속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하는 작은 실천운동입니다. 이런 점은 거꾸로 성령운동이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성령운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요즘은 딱히 늘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해요. 숫자이긴 합니다만 기도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거의 늘어나지 않아요. 30여명 정도이지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고 다른 본당도 대등소이하지 않을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운동이 사회적인 관심을 갖지 않고 계속 개인영성에만 머문다면 발전이 없고 정체될 거라는 거지요. 교회내 진보운동단체는 어렵긴 하지만, 운동과 기도를 함께 통합하는 원동력으로서 성령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성령운동: 수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우리신학연구소도 전부터 이 대표와 같은 생각을 해왔고 그 고민은 지난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 기념 국제 심포지엄의 한 주요 주제로 표출되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구속주회의 존 프라이어 신부를 초청해 그에게 ‘오순절 운동의 영성: 거부할 것인가, 수용할 것인가?’를 주제로 강연를 부탁했다. 영국인 선교사로 인도네시아에서 40여년을 활동해 온 그는 기초교회공동체와 성령운동에 대해 각각 강연을 하고 토론 자리에서는 이 둘을 묶어서 설명했다.

프라이어 신부에 따르면, 성령운동과 기초공동체가 묶이는 것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성령운동 참여자 대부분이 기초교회공동체 같은 풀뿌리 운동 조직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이들의 역동성에서 보기도 했다. 프라이어 신부는 아시아에서 오순절운동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로 중국과 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등 다섯 나라를 꼽고, 주류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전에는 무속에서 담당했던 억압받고 상처 입은 그래서 가슴속에 깊이 숨겨두었던 응어리들을 풀어내는 감성적, 영적 방출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아시아의 소수민이 이런 자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변화, 곧 사회-문화적, 도덕-종교적 대격변에 큰 충격을 받은 이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종교적 욕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지적하고,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사목적으로 가장 배려 받지 못했지만 영적으로 가장 열심인 이들이라는 데에서 교훈을 찾으라고 주문했다.

대부분의 성령운동단체들이 보이는 반 엘리트주의적인 모습은 이런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에서 출발한 것으로, 일상에서 하느님의 치유의 능력을 체험하고, 성경을 직접적이고도 감성적으로 접하며 활동적이고 따듯한 우애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순절운동, 성령운동이 ‘모델’은 아니지만 여기서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프라이어 신부도 가톨릭교회가 이 문제를 풀려면 “엄청난 상상력 훈련이 요구된다”고 정리하고 있듯이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고무적인 사실은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협동조합이 천주교 운동 내에서도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기초교회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성령운동의 적극적인 주체임을 보았듯이, 성령운동은 교회론과 깊은 관련을 가지며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식 공동체도 ‘세상에 열린’ 교회론으로서 하나의 중요한 실험이 될 수 있다고 보인다. 기존의 교회론이 심지어 가장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가난한 이의 교회’조차도 ‘신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기에 ‘하느님 백성’인 이웃을 온전히 포함하기에는 그 자체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음을 기억한다면, 지역이나 종교를 초월할 수 있는 협동조합 방식은 신선한 접근이요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 틀 안에서 어떠한 영적 체험과 역동성을 보게 될 지는 아직 점치기 어렵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주체들의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불러내는 성령이 함께 할 것이라는 점이다.

성령이여 오소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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