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여성 이야기, 여성혐오를 넘어 꽃이 되어라 – 9호 특집원고

숨겨진 여성의 이야기,

여성혐오를 넘어 꽃이 되어라

박정은 (미국 홀리네임즈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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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진보, 그 안에 감춰졌던 여성 현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고 했던 시인 릴케의 말처럼 “지난겨울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고 나는 고백한다. 매서운 한겨울의 추위 속에 한마음이 되어서 촛불을 든 시민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러기에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에게 그 광장은 다가온 하느님 나라였고, 메시아의 꿈 같은 현장이었다. 이제는 나이 들어가는 내 친구들이 감기약을 미리 지어 먹고 광화문으로 나갔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딸아이와 함께 나갔다가 친구처럼 사이좋게 돌아왔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가슴 두근거리는 새로 쓰는 역사의 순간에서마저 심심찮게 들려오던 여성혐오 혹은 여성비하의 이야기는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데 나를 더욱 우울하게 하는 것은, 사실 이런 이야기가 전혀 생소하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문단에서의 성추행이나 교육현장에서 일어나는 성폭행도 사실 갑자기 생긴 사건이라기보다는 꼭꼭 숨겨두었던 불편한 진실이 이제야 겨우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를 막론하고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대우는 사실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여성으로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현실은 여전히 ‘사회적 약자’로서 성폭력, 살인 등 강력범죄 앞에서의 무력감이고, OECD 성평등 지수 최하위의 불명예가 증명하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지위다. 남성 호주제가 사라진 지 겨우 십여 년이 지났고, 미혼모나 비혼 여성에 대해서 공론화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민주화 과정 중에서 나타난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폭력성도 간과할 문제는 아니다. 1980년대 민주화 학생 운동권에서도 여성의 인권은 거대담론에 묻히기 일쑤였고, 민주화를 외치는 현장, 그 그늘에서 여성의 성이 대상화되거나 무시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재미 여성신학자 정현경이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 존재했던 여성의 대상화를 두고 글을 썼을 때, 그런 진실에 대해 불편해하는 파장이 만만치 않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 영화나 소설들을 통해 민주화 과정에서 여성이 성적 대상이 된 부분들이 점차 알려지면서, 겨우 담론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부정적 이야기들이 우리 사회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아시아 여성신학자 곽퓨란(Kwok Puilan)은 『후기 식민주의 여성주의적 상상(Postcolonial Imagination and Feminist Theology)』이라는 책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여성에 대한 불평등, 그리고 그로 인한 여성성의 비하와 여성들 안에 내면화된 절망, 열등감 등을 언급하면서 여성의 몸, 특히 독립과 해방을 위해 치열했던 그룹 안에서 여성의 몸과 성은 차별화되고 대상화 되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억압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성적 혹은 어떤 성에 기인한 폭력이 일어난 후에 가해자를 지지하는 (가부장제도를 수호하고 지지하는) 법적인 체계와 그 모든 것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가해자들의 언어폭력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여성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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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이 겪는 수치심과 두려움

 이탈리아 폼페이의 한 유명한 프레스코 벽화에는 남성의 성기가 드러나는 장면들이 연출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남성의 성기가 드러날 때마다 항상 함께 수치심이라는 ‘데몬 (demon)’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이 데몬은 초자연적인 상서롭지 못한 존재로, 우리말로 풀어보면 “수치심이라고 하는 악마”가 될 텐데, 이 치명적인 존재는 활을 들고 누군가를 겨냥하고 있다. 여기서 남성의 성기가 드러난다는 것은 물론 추행, 성폭행 같은 성적인 행위를 포함해서 폭압적인 권력 구조, 그리고 내면적으로 또 외적으로 타자를 찍어 누르는 가부장제의 사회 구조, 그리고 현상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 수치심은 자신의 잘못한 행위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는 죄책감과는 달리, 자신의 ‘존재 자체에 잘못이 있다고 느끼는 괴로움이라는 점에서 사실 더욱 폭력적이다.

여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는 어릴 적 겪었던 성폭행이다. 수치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냥 자기 속에 묻어 둔 기억들은, 생각하지 않은 형태로 본인들을 괴롭힌다. 굉장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한 여성은 자라면서 자신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느낌이 컸다고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자기가 한 식탁에 앉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부엌에서 먹어야 하는지, 또 밥을 다 먹어야 하는지 남겨야 하는지 늘 불편했다고 했다. 어릴 적에는 그 불편함이 무엇이고 또 어디서 오는 건지도 모르는 채 지냈는데,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자기 어머니가 첩이고, 큰어머니의 형제들과는 다른 위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학교에서도 누구 하나 친구가 없었고, 아버지로부터 용돈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 동네 가게 아저씨가 자신의 몸을 만지고 그 대가로 과자를 주었다고 했다. 그 후에도 그는 비슷한 사례를 겪었는데, 누군가 자신을 만지면 그 순간은 소중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중에 자라서는 수치심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자신이 소중하다는 생각 같은 것은 별로 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누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자동적인 반응은 “감사합니다”였다고 했다. 그때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던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또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자신의 몸을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기 몸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여성들을 자주 만난다.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의 키나 다른 여러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한다. 몸이나 특정 신체 부위, 특히 얼굴이 아름답지 않다고 들었거나 혹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스스로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아주 쉽게 자신은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눈을 맞추기를 불편해한다거나, 자라면서 자신의 몸을 가리느라 어깨가 굽거나 하는 경우도 흔하다. 또 지나치게 부정적인 자신의 이미지는 원인 모를 우울증이나 불안 증세로 나타나기도 한다. 더구나 그런 자신의 몸,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이되거나 강요된다. 예를 들어, 자기가 늘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자녀의 몸에 불만을 표현하거나 억압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부정하는 수치심은 자녀에게까지 확대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위험천만하다.

폭압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자들이 수치심과 함께 경험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왜 여자만 그런 두려움을 경험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 억울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왜 여성은 전철역이나 조금이라도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면 두려워해야 하는지, 왜 여성이 안전함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없는 건지를 생각하면 사실 어이가 없다. 언젠가 나를 찾아왔던 여성은 마시지샵에서 일하는 성 노동자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등학교 시절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납치를 당했다고 했다. 눈부시게 발전한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점에 대해서, 나는 사실 내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한 남성으로부터 두 번이나 납치를 당했다면서, 자신이 만일 아버지나 오빠가 있는 집의 여자였다면, 돈이 있는 번듯한 집의 딸이었다면, 그런 일을 맥없이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겨우 그곳에서 도망쳐 나와서도 그가 갈 곳은 없더라고 했다. 술집에서 일하면서 돈을 모아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여성들의 불편한 진실 속에는 여성으로서 겪는 두려움이 많이 드러난다. 사실 많은 여성이 전철역이나 어떤 공공장소에서 두려운 일을 겪는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계속 따라오는 남자, 또 극장이나 버스에서 추행을 경험해 본 일은 사실 대부분의 여성이 겪어본 일이다. 길을 가는 여성을 두고 “야, 저 여자는 왜 그렇게 작니?” 혹은 “와! 크다” 등 한 여성의 인격과 관계없이 몸의 특정 부위와 관련지어 이야기를 해대면, 여성들은 모멸감과 함께 극도의 두려움을 느낀다. 만일 여성이 만일 남성에게 특정 부위를 들어 “와! 정말 작다” 같은 뭐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다.

수치와 공포를 넘어 공적으로 말하기

 여성들이 이런 성적 폭력이나 혐오에서 오는 수치와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이런 현실을 서로 이야기하고 담론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미셸 푸코가 말한 대로 담론이 없으면 실재도 “없기” 때문, 아니 엄밀하게 말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이런 체험들이 언급되지 않으면, 그 경험들은 얼굴을 감추면서 실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담론을 막는 가장 강력한 기제는 수치심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겨울 촛불집회의 한편에서 여성들이 여성혐오적인 사고나 발언들을 지적하고 또 공론화하면서, 안전하게 그리고 평등하게 시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운동을 벌인 것은 멋지고 또 자랑스러운 일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한 젊은 여성이 생태 운동을 하면서 겪은 성폭행에 대해 글을 올렸다. 그리고 이 사건이 얼마나 그를 다른 이들의 비판에 떨게 했고, 또 사회는 어쩌면 그다지도 피해자에게 냉랭한 지를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다. 그이는 정직하게 자신의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 함께 생명운동을 하는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일, 그리고 길 가다가 술 취한 남자로부터 뺨을 얻어맞은 이야기와 경찰에서 있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올려놓았다. 나는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그 젊은 친구의 용기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이는 제주 강정마을의 지킴이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아주 고운 사람이다. 생명을 파괴하는 발전 구조에 맞서서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고 소망하며 단순한 삶을 꿈꾸는 젊은이다. 그이의 이런, 너무 정직해서 조금은 낯설고 불편한 이야기가 그저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많은 이들이 댓글과 “좋아요”를 통해 공감한다는 데에 있다.

사회적인 금기를 깨고 자신이 당한 성적 경험의 폭력성에 대한 글쓰기를 하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정직한 성찰을 의미하고 그래서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이야기하지 않고 묻어두면, 상처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테니까 말이다. 한 여성은 무책임한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자랐다. 시장에 갔다가 이상한 아저씨가 몸을 만지는 일을 경험했고, 수치감과 모욕감에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며 가정을 꾸렸다. 그런데 그녀는 사실 내적으로 남편을 미워했다고 이야기한다. 남편은 모르지만, 남편이 자꾸만 자기를 폭행하던 사람과 겹쳐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기가 혐오하던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공연히 남편에게 적개심을 가졌다고도 했다. 이처럼 묻어둔 여성으로서 받았던 차별이나 폭력 등의 경험은 그들의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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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여성혐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무섭고 끔찍한 사건에서 여성혐오증의 흔적을 발견한다.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살해사건도 그런 예가 될 것 같다. 이런 예를 보면, 여성혐오는 결국 수치심을 주어서 여성에게 침묵하기를 강요하고,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규정하고, 또 여성이 가진 능력을 최소화하거나 없애버리는 행위로 표현된다. 더구나 일반적으로 혐오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매우 강력한 부정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이 감정에 의해, 혹은 이 감정에 종속되어, 어떤 비인간적인 그리고 폭압적인 행동을 해도 별로 죄책감이 없다는 점은 큰 문제다. 예를 들어, 나치 정권은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심어주기 위해, 1단계로 “유대인은 더럽다”는 구호를 만들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유대인은 쥐새끼 같다”는 논의를 계속했다. 그러다 보면 유대인은 “더러운 쥐”가 되고, 그러기에 유대인에 대한 강한 혐오는 쥐와 등치가 되면서, 유대인을 죽여도 별로 도덕적인 문제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 혐오라는 강한 감정은 도덕적 불감증을 가져올 수 있고, 그러기에 혐오의 대상이 겪는 고통과 두려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사는 미국에서도 최근 여성혐오가 다시 한번 여론의 중심에 올랐다. 공개적으로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일삼았고 여성을 성추행했던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여성행진(women’s march)’이란 이름으로 진행됐다. 온 나라가 함께 일어나 여성을 깎아내리고 혐오하는 일련의 언행을 당장 중지하라고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나도 우리 학교 학생들과 함께 내가 사는 오클랜드 시위 현장으로 나갔다. 이 시위는 거의 축제와 같았는데, 더욱 좋았던 것은 초등학교 여자 어린이들부터 할머니들까지 많은 여성이 참가했을 뿐 아니라, 이 모임을 지지하는 많은 남성,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그리고 장애인 등 다양한 그룹들이 함께 모였다는 점이다.

그날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마음속에 든 의문은 과연 오늘날 여성혐오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다. 미국의 경우, 현대의 여성혐오는 사실 백인 여성을 중심으로 한 제2기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학생들과 남성 중심의 구조를 비판하면, 그에 대해 공감하는 여학생들이 꼭 붙이는 말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다.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으로 일구어 놓은 여러 가지 혜택들은 당연한 것처럼 누리면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것으로 들려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그래서 다시 여학생들에게 묻는다. 너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그 페미니스트는 어떤 사람이냐고. 그러면 그들은 무조건 화를 내고, 남성들을 무조건 혐오하거나, 레즈비언 그룹, 혹은 불리할 때마다 언제나 여성이라는 카드를 내밀면서 온갖 이익을 차지하는 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

얼마 전에 예사 크리스핀의 『나는 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한 페미니스트의 선언(Why I Am Not a Feminist: A Feminist Manifesto)』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읽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페미니스트들이 양성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를 만든다는 초기의 열정과 비전을 잃고, 단지 남성들이 누리던 권력과 돈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다고 비난한다. 소위 말하는 일반적인 여성주의가 소수의 많이 가지고 좋은 교육을 받은 여성들, 그리고/혹은 대부분 백인 여성들을 위한 것이라면, 또한 그저 문화적 장신구처럼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주장이 새로운 세대를 포함하여 여성 전체의 동의를 얻어낼 수 없다고 경고한다. 결국 자본주의 구조와 맞서면서 인간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주의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이제 겨우 여성들이 억압된 경험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요즘 한국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여성혐오와 여성 대상 폭력을 보면, 무언가 일그러진 허상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사실 젊은 한국 남성들이 모든 이익을 가져갔다고 피해의식을 느끼는 20~30대 한국 여성 대부분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마음 졸이며 공부하고, 하루에 2~3개의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열심히 사는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정말 분노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속성, 그리고 분배의 철학이 없는 우리 사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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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여, 여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분노하라!

 여성혐오 사이트로 알려진 몇몇 사이트를 방문해서 발견한 것은 여성들을 여성의 성기로 제한해서 부르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어떤 여성의 몸이 살이 찌면 (사실 살쪘다는 것이 누구의 기준인지, 무엇이 기준인지도 없다) 그것에 대해 무차별로 공격을 해대고, 아름다운 여성의 몸에 대해서는 마치 자신의 성적 대상인 양 무차별적인 성적 환상을 쏟아 놓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졸속논리를 만나게 된다. 여성을 성 혹은 성기로, 여성의 인격 혹은 여성성을 그저 자신의 (좌절된) 성적 욕구를 푸는 대상인 여성의 몸으로 치환하고, 거기에 자신의 환상과 좌절된 분노를 쏟아대는 모습들을 보면,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연민이 인다. 이렇게 쏟아내는 반여성적인 글은 단지 성공만을 부추기고 물질적인 성공만이 삶의 의미라고 가르치는 현대 사회가 가져다준 많은 젊은 남성(물론 나이든 남성들도 있겠지만)들의 좌절과 분노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익명성을 담보로 그렇게 퍼부어 대는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이 김치녀, 오크녀, 된장녀, 개똥녀라 부르는 그들은 당신들의 사랑스런 누이이며, 벗이며, 연인이라고. 그리고 당신들이 그렇게 신체 한 부분에 천착해서 불러대는 그 이름은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외치고, 지는 생명에 마음 아파하는 당신과 같은 인간이라고. 그대들의 글 속에서 부수고 쪼개 놓은 여성의 인격은 당신의 폭력성 안에 부서져 버린 당신의 자아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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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은 꽃이 되어라

 만일 정말 그들의 비판처럼 힘과 자본을 가진 소수의 여성이 자기 이익만을 생각했다면,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많은 파렴치한 권력과 부를 가진 남자 사람들처럼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남성들이 여성에게 모든 것을 전가해 버리고 미움을 합리화해버리는 아주 쉽고 고민할 필요 없이 행하는 폭력 혹은 그 폭력성을 포기할 때, 그리고 진실을 냉정하게 보고 행동하려고 움직일 때, 우리 사회의 진정한 봄은 그렇게 오리라고 본다. 또한 이제 피어나기 시작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가지지 못한 많은 사람의 아픔과 연대하면서 함께 이 세상을 보듬을 때, 그 목소리들은 꽃이 될 것이다.

여전히 지난겨울은 위대했으며, 미완의 봄은 그래도 아름답다. 왜냐하면 혼돈 속에서 쉽게 동의해 버리지 않고, 소소한 진실을 찾아가는 그 목소리들이 피워낸 꽃이 봄을 완성해 갈 것이기에.

 


박정은. 미국 홀리네임즈수녀회 수녀. 캘리포니아주 홀리네임즈대학교 종교·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영성학과 성서학을 강의한다. 여성, 특히 글로벌 사회에서 소외된 이민 여성들의 삶에 깃든 영성을 연구하며, 영성지도에 관해 연구하고 실천해가고 있다. 영어 저서로는 A Hermeneutic on Dislocation as Experience: Creating a Hybrid Identity, Constructing a Borderland Community(경험으로서의 이주에 관한 해석), Border Crossing Spirituality(경계를 넘는 영성)이 있고, 한글 저서로는 『부서진 것의 아름다움』, 『사려 깊은 수다: 여성은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성장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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