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복음 사이 –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김선실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7월의 말씀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루카 10,38-42

당연하지? 안 당연하지!

오늘의 복음은 마르타가 예수님의 일행을 자신의 집에 모셔서 대접하면서 일어난 일을 전해주고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마르타와 동일시되는 자신을 느낀다. 손님을 초대했으니 당연히 대접을 해야 하고 그래서 분주할 수밖에 없으니 여동생이 도와주어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나 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마르타를 힘들게 했고 나도 힘들게 만드는 요소이다.

마르타는 마리아가 자신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기대를 가졌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자 내심 화가 났다. 더구나 그 기대는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더욱 섭섭하고 속상하다. 자신을 이해할 것 같은 손님에게 걸었던 기대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마르타는 믿었던 두 사람에게 가졌던 기대가 모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다. 얼마나 억장이 무너질 것인가!

마르타를 닮은 나는 지레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마르타와 나 자신에게 타이른다. ‘기대를 가지지 말라고 했잖아! 네 기대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 이제 기대를 내려놓으렴. 애초부터 기대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섭섭하지도 않고 속상하지도 않을 텐데……’.

‘기대하지 않기’와 이미 기대를 가졌다면 ‘그 기대를 내려놓는 것’이 지난 20년 간 나의 일상 속의 수련내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성적으로 사람 만나기를 좋아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편으로는 사람들 때문에 섭섭해 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종종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간관계가 결코 녹록치 않다는 사실이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에니어그램>이라는 자기 성찰 프로그램을 만나면서 나의 타고난 완벽주의적 성향을 탐구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왜 사람들에게 섭섭해 하는지, 왜 사람들 때문에 실망하는지 성찰해 보았다. 나도 모르게 매 순간 판단을 잘하는 성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판단의 이면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장점이 있기 없기?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에 대해 ‘반 아이들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무심한 선생, 선생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며 내심 무시했다. 선생님이라면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이름은 당연히 알고 불러주어야 한다는 기대가 선생 자격을 판단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신출내기 교사 시절 담임 반 아이들 이름은 물론 가르치는 아이들 300명의 이름을 모두 외워서 불러주며 기뻐했던 것도 그 기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성찰 이후에야 깨달았다.

내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을 나도 모르는 새 판단하고 있었고, 그 판단의 밑바탕에는 나의 기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선생이기 때문에 가지는 기대, ‘저 나이 정도라면’ 하는 연륜에 대한 기대,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가지게 되는 수많은 기대가 있다. 그러나 그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기대를 내려놓는 순간 판단하기를 멈추게 되고 그러면 섭섭함이나 실망감이 사라진다.

단체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일하면서 익히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누군가에게 사무능력과 섭외력, 기획력과 조직력 모두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 장점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즐겁게 함께 일할 수 있다. 즉 기대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 다음엔 함께 채워가고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만일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도와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아니 기대했더라도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기대를 내려놓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속상하거나 섭섭하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께 청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걸까? 언니를 도와주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이 마리아의 깊은 열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마르타가 이해하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은 아닐까!

때때로 속상하거나 섭섭하거나 실망감이 클 때, 어떤 기대가 웅크리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 기대를 내려놓는 연습을 해보시라! 일상 속 수련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단번에 되리라 기대하지는 마시라! 마르타를 닮은 나는 오늘도 계속 ‘기대하지 않기’와 ‘기대 내려놓기’를 수련하며 사람들 속에서 기쁘게 살아가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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