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영성’인가 ‘순교자영성’인가? – 11호 비평, 시대의 소리

‘순교영성’인가 ‘순교자영성’인가?

 

강석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p2905_2014_0727_0703

“오늘을 사는 순교영성”을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원고청탁을 받았다. 하지만 필자는 그동안 교회사 연구를 하면서 ‘순교영성’이라는 말이 한국교회가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본받으려는 영성적 노력을 더디게 만들었고, 본래 의도하는 개념과 다른 방향으로 그 뜻이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한국교회가 순교와 관련한 영성적 용어 사용에 대해서 분명한 개념 이해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교영성’이라는 개념은 이제 새롭게 재고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서 그동안의 연구 내용 중에 순교와 순교자에 대해 관련된 영성적 개념 부분을 간략하게 살필 것이다. 한국교회가 순교와 관련해 올바른 개념 이해를 통해 본래의 뜻과 정신을 되살리는 노력에 일말의 기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글의 전개 과정은 ‘영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후, ‘순교’와 ‘순교자’에 대한 영성적 개념 사용을 주목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순교자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영성, 하느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는 말을 살펴보면, 우선 영성에서 일컫는 ‘영(靈, Spirit)’은 살아 있고, 사랑하며, 창조하는 하느님의 인격적 능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을 부여받은 인간에게 자기실현과 자기성취를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이 바로 영성이다. 따라서 영성은 ‘인격적 하느님’과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초월적(超越的) 본성이다. 그래서 영성을 통해 인간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완전하고도 영원한 사랑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고, 그 삶을 본받을 수 있다.

또한 영성을 삶으로 산다고 말할 때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향주삼덕(向主三德)을 통해 완덕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며, 한마디로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을 지칭한다. 이러한 완덕 추구의 노력은 참된 사랑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영성은 곧 향주삼덕의 목표이며, 참사랑을 이루려는 인간의 본질인 셈이다. 그리고 영성적인 삶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십자가 사건에 있다. 그러므로 영성적 삶은 곧 예수께서 보여준 삶의 모범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삶은 ‘하느님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22,37-39)는 사랑의 삶이며,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순교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 확인된 사랑의 삶은 순교의 삶을 지향한다.

 

%eb%b3%b5%ec%9d%8c_2014-03-21_17-32

‘순교영성’과 ‘순교자영성’의 차이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박해 상황이 닥치자,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자신의 의지를 통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였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 교회는 완덕의 절정을 드러내는 행위를 ‘순교’로 이해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예수의 십자가 삶과 성령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완덕의 참된 가치가 마침내 죽음을 통해 실현되는 최상의 신앙 증거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순교’란 신앙의 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언이며, 순교자는 자신과 사랑으로 결합된 그리스도,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한다’”고 계속해서 가르쳐왔다.

이러한 차원에서 교회는 ‘순교’가 갖는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교부시대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속해서 연구해왔다. 특히 한국교회는 조선후기 박해 당시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이해하던 ‘순교’에 대한 개념을 검토한 바 있다. 이러한 연구 작업을 토대로 ‘순교’와 ‘순교자’에 관한 의미를 규정해 볼 수 있다. ‘순교’란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온전히 증거하기 위해 박해 상황에서 죽음을 통해 그것을 증언한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순교자’란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온전히 증거하기 위하여 박해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어놓으면서까지 최상의 증언이자 증거 행위를 드러낸 신앙인을 지칭한다.

또한 지금까지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순교’, ‘순교자’ 개념과 ‘영성’ 개념이 접합된 뜻으로 ‘순교영성’과 ‘순교자영성’에 대해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로 중첩해서 사용하였다. 하지만 그 개념을 깊이 들여다보면 ‘순교영성’과 ‘순교자영성’은 비슷한 개념인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를 함축한다. 이를 간략하게 확인해보면, ‘순교영성’이라는 말은 순교와 영성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용어로 ‘모든 압박과 해를 물리치고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영성’을 말한다. 결국 ‘순교영성’은 신앙의 증거와 증언을 위해 죽는 행위 그 자체를 ‘영성’이라 지칭한 것이다. 그리고 ‘순교자’의 순교 행위를 영성의 개념으로 정의하면, ‘순교자영성’이란 순교자와 영성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용어로 ‘모든 압박과 해를 물리치고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개별 신앙인에 대한 영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박해라는 매개체 앞에서 죽음의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신앙의 가치에 따라 신망애(信望愛: 믿음, 소망, 사랑)라는 향주삼덕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영성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자영성’은 단지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순교자가 죽음 앞에서 보여준 외적 태도를 아는 것이 아니다. ‘순교자영성’은 벗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일상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다. 따라서 ‘순교자영성’의 가치는 신앙인이 기꺼이 순교를 결심하도록 이끌어준 삶과 신앙,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신망애를 통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순교영성’은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 행위와 상황에 중점을 두었지만, ‘순교자영성’은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개별 신앙인의 삶과 신앙에 비중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순교자가 보여준 신망애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고, 영성적 삶을 살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용어가 바로 ‘순교자영성’이다.

 

1280px-st__euphemia_reliquary

Reliquary of Saint Euphemia, Hagios Georgios (Patriarchate) Church, Istanbul, Turkey; photo taken on saint’s feastday, July 11, 2012

‘순교영성’이라는 말의 한계

그렇다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왜 그토록 ‘순교영성’이라는 말을 더 많이 자주 사용했던 것일까? 사실 오늘날까지 한국교회는 대체로 박해시대에 대한 교회사의 서술 방향은 개별 순교자의 삶과 신앙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신앙 선조들이 천주교 수용 과정에서 겪는 박해와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특히 박해시대 교회사와 관련된 서술 내용은 박해시대 상황과 신자들의 고문과 고초, 그리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행위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호교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다. 다시 말해서, 신앙 선조에 대해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덕’과 완벽하리만큼 탁월한 ‘믿음’의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그 문제를 역사 안에서 살펴보면, 개항과 근대로 넘어오면서 그 이전 박해시기 순교와 순교자들에 대한 교회의 시복 준비 작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실 조선 순교자에 대한 시복 준비는 박해시대 때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조선 사회 안에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부터다. 이 당시에 순교자에 대한 시복과 관련하여 교회의 주된 관심 내용은 조선 순교자가 어떠한 박해와 고문을 받았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살피고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는 특정 순교자를 중심으로 그들이 지닌 탁월한 ‘신덕’과 용맹스러운 ‘용덕’, 처형장 앞에서 거룩하고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모습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후에도 순교 상황에서 순교자가 겪은 외적 현상에 대한 강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예를 들어, 각 교구마다 순교자 현양과 신자 재교육 차원에서 마련된 성지 내 박물관이나 전시관의 전시 내용물들을 보면, 대부분 순교자의 ‘신덕’과 ‘용덕’, 그리고 거룩하고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한 모습들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또한 순교자를 죽음 이후 천상을 향해 나아가는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신덕’과 ‘용덕’ 중심의 ‘순교영성’으로 비추어지면서, 사람들에게 ‘내세 지향적 신앙관’을 강조하는 영성으로 새겨졌다. 그 결과로 오늘날 박해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많은 신자들에게는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영웅적 모습을 본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현실과 거리감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했다.

이 문제에 대해 세르베 테오도르 팡케르(Servais Théodore Pinckaers) 교수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순교’라는 단어에 대해서 사람들이 처음으로 갖게 되는 생각은 ‘고문’과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동안 그리스도교 회화(繪畵)나 문학(文學)에서 주요하게 형상화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순교자들이 고문을 참아내는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신자들에게는 순교가 ‘형벌의 동의어’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순교 안에 담겨 있는 중요한 요소들이 신자들에게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순교를 표현할 때 고문이나 고통만을 강조하면,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부터 경험되어, 지금까지 이어 내려져 온 순교 자체에 대한 ‘영성적 측면’과 그 깊이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만든다는 의미다. 그래서 팡케르는 순교자 현양에서 고문, 형벌, 죽음 같은 요소만을 강조한다면 결국 순교자 신심이 갖는 보편적 가치와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 즉 향주삼덕의 복음적 요소가 갖는 영성적 요소들을 파악하는 데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교회사 분야에 수많은 연구 업적을 남긴 최석우 신부 역시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회가 순교와 관련해 ‘용덕’과 ‘죽음’을 강조한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순교의 결과인 용덕을 중시하면서 그 원인인 증언은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순교의 본질은 신앙의 증언이지 죽음의 증언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바로 200년 전에 있었던 윤유일, 최인길, 지황의 순교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증언이지 우리의 죽음 자체를 위한 증언은 결코 아니다.

최석우 신부는 순교에 대해서 ‘용덕’에만 치우친 죽음을 강조한 것에 대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 시대에 중요한 것은 바로 순교자들이 보여준 신앙의 증언 내용 그 자체라는 사실을 강하게 역설하였다.

 

ststephen_giacomocavedone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로 알려진 스테파노(Saint Stephen) – Giacomo Cavedone 작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순교자영성’

‘순교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전후 문맥을 잘 파악해서 개념에 맞게 그 뜻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본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로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자신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려는 뜻이 담겨 있는 개념을 지칭할 때에는 ‘순교자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순교자영성”은 과거 이 땅에서 순교자들이 어떻게 ‘장렬하게, 거룩하게, 탁월한 모습’으로 죽었는지에 대한 교육적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그 당시 순교자들은 평소 어떠한 삶을 살았고, 어떠한 신앙을 가졌기에 마지막 순간, 신앙 때문에 죽음까지도 결심할 수 있었는지를 돌아보는 영성적 측면을 강화해야 한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을 사는 순교자영성”을 이해하는 한 축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앞으로 꾸준히 기울여 나갈 때 ‘순교자영성’은 이 시대에 적합한 영성 중의 하나가 될 것이며, 삶의 영성이면서 실천적 영성으로 새롭게 되살아 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강석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image 1. 가톨릭 신문

image 2. wikimedia

image 3.  wikimedia

image 4.  wikimedia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