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가난한 이의 날 주인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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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유영훈 (ACN Korea(고통받는 교회 돕기) 대외협력)

 

어느덧 우리에게 멀어진 가난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라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는 신명기 15장에서도 나오는데, 희년에 관한 법을 이야기하는 이 구절에서 가난한 이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가난한 이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런데 이런 말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은 그 이유가 가진 자들의 부패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현대 정치에서도 가난 문제를 어떻게 통제하는가에 관한 부분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정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다. 그것 때문에 부동산정책이나 대기업 관련 경제정책이 주요 뉴스의 앞자리에 오르는 것이고, 경제를 담당하는 관리의 직책을 상대적으로 더 높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리라.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국력’보다는 ‘국격’이란 말을 더 많이 듣게 되었다. 힘으로 대변되던 나라의 가치가 ‘가치’ 자체에 집중하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먹고사는’ 데에 급급하던 문화에서 ‘나누고 누리는’ 데로 옮겨가고 있다. 국력에 신경 쓰던 산업사회 시절에는 돈을 더 버는 것이 제일의 가치였고, 노동의 질과 휴식보다는 양과 성실성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공기도 잘 안 통하는 어두운 작업장에서 살인적인 노동시간에 허덕이는 노동자는 당연한 것이고, 남녀 가리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어와야 대접받았다.

그 시절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은 실제로 ‘가난’했나 보다. 도시에 사는 대부분 소시민은 작은 종이봉투에 불과 며칠 먹을 양만큼의 쌀을 사 오고, 매일 아침 그날 먹을 반찬거리를 사야 했다. 장기 휴가나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은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어느 선진 외국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그러던 대한민국이 달라졌다. 자주 향락적인 술판을 벌이다 비명에 간 어느 정치인이 내세웠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몇 번 반복되고서는 그 효험이 작동한 건지 아니면 억척스러운 DNA를 가진 우리 국민성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대기업이 할리우드 유명 영화에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휴대전화가 우리나라의 어느 기업의 제품이라고 한다. 얼마 전 정부의 임시공휴일 조치로 사상 최장의 어마어마한 추석 연휴를 즐기게 된 시민들은 인천국제공항 개항 이래 최대 출국 여객의 인파를 기록했다. 이렇듯 풍요를 누리는 이 시대에도 ‘가난한 이의 날’이 유효한 것일까? 물론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이 풍요롭게 살지 못하지만, 가난이 보편적 문제도 아닌데 세계 13억의 가톨릭 신자는 물론 비신자들도 존경해마지않는 보편교회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혹시 보편적 가르침을 포기하기라도 하신 걸까? 아니면 그냥 교종으로서 교회의 가르침을 선포해야 하는 당위성 때문에 철 지난 이야기를 하신 건 아닐까?

가난의 본질, 빼앗김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 속 여주인공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우리 집안의 몰락 과정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가를 알고 있는 터였다. 아흔아홉 냥 가진 놈이 한 냥을 탐내는 성미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에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부자에게 도둑맞을 정도로 가난이 소유할 가치가 있다는 성찰을 주는 것이 이 소설의 초점일까? 아니면 부의 부정의에 대해 고발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작가의 혜안은 “아흔아홉을 가진 이가 남은 하나마저 차지하려는 것”이라는 탐욕의 본질을 말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챌 필요도 없이 가난은 불편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가난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게다가 가난은 무언가 더럽기까지 하다.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로부터 혹은 가까운 이웃이나 동료로부터도 빼앗긴다. 흔한 텔레비전 속 드라마 이야기처럼 어려운 환경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에 배팅한 도박꾼처럼 자신의 젊음을 사랑하는 남자에 저당 잡힌 여인은 돈을 빼앗기기도 하고, 물건을 빼앗기기도 하며 때론 마음마저 빼앗긴다. 이렇게 어떤 힘에 눌려서 저항하지 못하고 빼앗기는 이가 가난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가난의 본질은 ‘빼앗긴다’라는 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자면 빼앗기는 누구나 가난한 사람인 것이다.

특수사목의 분야가 아니라 교회의 중심이어야 할 가난

가톨릭교회는 오는 11월 셋째 주일인 연중 제33주일을 ‘가난한 이의 날’로 기념한다고 한다. 언어가 주는 느낌은 그것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우리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도 있고,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라는 말도 있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는 이 시대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런데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대에 ‘빈민’이란 말은 부정적 선입견을 폴폴 풍긴다. ‘빈민’, ‘빈곤’은 어서 벗어나고 싶고, 타도하고 싶은 어떤 그런 느낌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교회는 ‘빈민사목’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왔다. 이 말은 노인사목, 청소년사목, 경찰사목 같은 표현처럼 빈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목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빈민사목이라는 말은 노인이나 청소년과는 달리 사목의 느낌보다는 사이에 보호나 지원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말은 빈민, 즉 가난한 사람을 대상화하는 듯한 냄새가 무척 강하게 풍긴다. 그런 차에 한국교회가 올해 처음으로 기념하게 되는 ‘가난한 이의 날’은 ‘빈민의 날’ 대신 선택한 것이라서 반갑다.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한국교회가 새롭게 ‘가난’과 관련한 것들을 정리해보면 어떨까? 현재 한국교회에서 산하에 정식으로 ‘빈민사목’을 전담하는 조직을 만든 교구는 서울대교구와 부산교구뿐이다. 아마 한국에서는 서울과 부산에 가난한 이들의 문제가 집중된 대도시이기 때문인가 보다. 아니면 교구에 가난 문제를 담당하는 다른 부서, 예를 들면 사회복지회 같은 사회사목 전담 부서를 두었으므로 굳이 그러한 조직이 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표현에 따라 태도도 달라질 수 있고, 이름을 지을 때도 장래를 생각하면서 고민을 겪게 마련이다. 경영학에서 기업의 조직구조는 성과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취급한다. 이처럼 표현이나 형태는 어떤 일을 할 때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 교회조직의 구조는 교구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사회사목이나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부서의 역할이나 권한의 크기가 행정을 담당하는 부서에 비하여 큰 곳이 드물다. 좀 과장하자면 마치 기업에서 이미지 제고를 위해 사회공헌부서를 두고 있는 것처럼 빈약해 보인다. 게다가 사회복지를 전담하는 부서는 가난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만 보는 것은 아닐까, 교회의 가난 영성을 어떻게 담아내고자 노력하고 있을까 하는 염려도 생긴다. 즉,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알맞게 활동하는 데에 어느 정도로 구성원들이 일치되어 있는가 하는 염려다.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 의장인 리노 피시켈라 대주교는 ‘가난한 이의 날’ 담화문 발표 기자회견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로부터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받아들여 살아가기 위한 자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의 본질을 내어주는 자원이라고 여긴다면 이 시대에 새롭게 읽어야 하는 가난의 문제를 뛰어난 몇몇 선구자에게만 맡기지 말고 그야말로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제공되는 무형의 양분과 유형의 자산으로 교회의 주요 조직은 가난 사목에 집중하고, 다른 부서들은 그 일들이 잘되도록 돕는 형태로 탈바꿈하기를 나는 바란다. 그래서 교회는 이 시대의 표징을 읽고 백성들에게 복음의 본질인 가난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면 어떨까?

평신도주일에 맞이하는 가난한 이의 날

작년 ‘자비의 특별희년’을 마무리하면서 매년 연중 제33주일을 ‘가난한 이의 날’로 선포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관심과 지원을 호소한 바 있는데, 올해 11월에 맞이할 첫 번째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지난 6월 담화를 발표하셨다. 사실 그 담화는 특별하고 새로운 가르침보다는 “말보다는 행동”과 같은 익숙한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맥락을 들여다보면 현대에 벌어지는 새로운 소외 즉, 문화의 빈곤, 정치의 빈곤이나 교육의 빈곤 등의 탈을 쓰고 “가난이 사회 안에 널리 확장되고 있는 현실”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참여를 촉구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것을 호소한다. 그러한 의미를 담았기 때문인지 마침 이날을 기념해 만든 로고에서도 문을 열고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가난한 이들의 날로 선포된 연중 제33주일은 한국교회가 오래전부터 평신도 주일로 기념하던 날이다. 내년부터 한국교회는 평신도 주일을 가난한 이의 날을 피해 연중 제32주일로 옮기기로 했지만, 평신도 주일은 한국교회의 역사 안에서 특별하게 만들어진 제도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직후 그 산실로 1968년 7월 23일 창립된 한국 가톨릭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가 주교회의에 평신도 사도직을 북돋우기 위한 날을 제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그 응답으로 매년 대림 1주일을 ‘평신도의 날’로 지내도록 했다. 1970년부터는 연중 마지막 전전 주일인 그리스도왕대축일 전 주일로 옮겨 이름도 ‘평신도 주일’로 바꾸어 기념하고 있다. 이는 단지 평신도들의 날로 기념하고 자축하자는 의미라기보다는 평신도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모진 박해 안에서도 교회를 일구어낸 신앙 선조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의 삶을 본받아 이어가자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올해 평신도 주일을 마침 우연하게도 ‘가난한 이의 날’과 겹쳐 보내게 된 것은, 한국교회가 읽어내야 할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나는 우리가 본받아 살아야 하는 신앙 선조들의 모습에서 힌트를 얻어보고자 한다. 박해 당시 신앙 선조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빼앗겼다. 살고 있던 고향 땅을 등져야 했고, 재산과 목숨도 빼앗겨야 했다. 당시에는 목숨보다도 귀하게 여겼던 가문과 신분도 빼앗겨야만 했다. 그들이 바로 가난한 이들이었다. 이런 가난한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셨고, 극진히 사랑하셨다. 우리 역시 신앙 선조들의 후예로서 그 모범에 따라 같은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21세기 한국이라는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우리는 한국사회 안에서, 더 넓게는 아시아대륙, 또 지구촌에서 어떤 이웃이 되어줄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날’이 아니라 ‘가난한 이의 날’임을 알아차린다면 바로 우리가 ‘가난한 이의 날’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마태 25,35-36)

유영훈. ACN Korea(고통받는 교회 돕기) 대외협력. 서울대교구 사회복지회와 사회사목부, 빈민사목위원회를 거쳐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한국평협)까지 총 20년 가까이 교회에서 일했다. 올해 초부터는 고양시에서 노인들을 위한 복지센터를 운영하며 현재 교황청 재단 ACN Korea(고통받는 교회 돕기)에서도 대외협력 일을 맡아 일하고 있다.

참고문헌

박완서, 『도둑맞은 가난』(문이당, 2007).

이미지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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